손재호 목사 Profile
창원한결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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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혁주의 마을에서 퍼온 글입니다.


개혁교회의 형성과 발전과정

 

1. 신약교회의 설립과 고대교회

 

오순절 성령강림을 기점으로 예루살렘에 신약의 교회가 태동하게 되었고, 사도들의 복음 전파로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각 지역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에 의해 교회의 터가 놓여졌다(사도행전 참조).

 

A.D. 70년을 기점으로 신약의 교회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교회는 대내외적으로 핍박과 이단의 위기를 겪으면서도 보존, 성장해 갔다. 로마의 황제 콘스탄틴의 개종과 함께 밀라노 칙령(313년)으로 교회는 제국 안에서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이때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 사이에 기독론 논쟁이 일어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325년 니케아 회의가 열렸다. 제국의 국교가 된 교회는 점점 성장하는 중에,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 사이에 구원론의 논쟁이 일어난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에 달려 있는가? 인간의 선택과 책임에 달려 있는가? 418년 카르타고 교회회의는 펠라기우스의 사상을 정죄했다.

 

2. 중세 로마교회와 동서교회 분열

 

어거스틴을 기점으로 교회는 직분에서 타락의 현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감독과 장로를 분리하여 감독이 장로 위에 있는 것으로 보았고, 도시의 주교들이 시골의 주교들보타 더 큰 권위를 가진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로마의 주교는 자신이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주장하게 되었고, 로마의 주교 레오 1세가 죽은 461년에 교황권이 확립되었다. 이때로부터 성직자 계급제도가 생겨났고, 교회의 계급화 현상이 나타났으며, 동시에 주의 만찬도 제사로 변형되었다.

 

정치적, 사회적, 언어적, 지리적인 이유로 인하여 제국의 동쪽교회와 서쪽 교회는 불화가 누적 되어 갔다. 결국 1054년 서방교회가 니케아 신경에 일방적으로 ‘필리오크에(그리고 아들로부터)’를 삽입하는 사건으로 인하여 양 교회는 분열되었다. 그러나 사실 325년 니케아 교회회의 때부터 동방교회는 아리우스 편이었다. 따라서 아리우스의 출교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인성 고백을 믿지 않았다. 이때 분리된 동방교회는 페르시아 교회였고, 5세기에 아르메니아, 시리아, 압베서안의 교회가 분리되어 나갔고, 마지막에 그리스교회가 분리된 것이다.

 

3. 종교개혁

 

타락하고 부패한 중세 로마교회로부터 교회를 개혁한 사람은 바로 루터였다(1517). 이로써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설립되었다. 루터파 교회는 사도적 복음인 교리는 개혁하였으나 교회질서와 예배를 개혁하지 못했다. 종교개혁 제2세대인 존 칼빈에 의해서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개혁교회로 설 수 있게 되었다. 개혁교회는 교리, 예배, 교회질서에서 완전한 개혁을 단행하였다. 스위스 제네바를 중심으로 시작된 개혁교회는 전체 유럽에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 홀랜드, 독일, 헝가리 등지에 개혁교회들이 세워졌다.

 

4.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는 존 낙스로부터 시작된다. 칼빈이 세운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존 낙스는 1555년 스코틀랜드로 돌아가 6개월간 스코틀랜드 전역을 돌면서 개혁신앙을 전파한다. 낙스가 고향방문을 하고 있을 때, 칼빈은 제네바에서 영국 피난민을 위한 교회를 열었다(1555년 11월 1일). 나중에 낙스는 이 교회를 섬기기도 한다. 낙스가 제네바로 돌아간 후, 정치지도자들은 1557년 12월에 첫 번째 계약(the first bond)에 서명함으로써 장로교회 운동을 시작한다.

 

1559년 낙스가 다시 귀국하여 개혁운동을 펼치고 있을 때, 프랑스의 군대가 파견되어 개혁자들을 소탕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곤경에 빠진 낙스와 개혁자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영국의 군대가 파견되어 프랑스군과 영국군이 싸우게 되었다. 그러던 중 1560년 6월 귀즈가의 메리가 사망함으로써 영국과 프랑스는 7월 6일 에딘버러 조약을 맺고 스코틀랜드에서 철수한다. 그해 8월 낙스는 동료들과 함께 교회의 전면적인 개혁을 위하여 의회에 청원서를 제출하였고, 의회는 낙스가 제출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25개 조항)를 받아들이면서 로마교회를 포기하고 장로교회를 인정하게 되었다. 그해 12월 20일에 에딘버러에서 스코트랜드 장로교회를 조직하게 된다. 그리고 1560년 총회에서 낙스가 작성한 제1치리서를 채택한다. 그러나 1561년 귀즈가의 메리를 계승한 스콧트의 메리가 왕이 되면서 로마교회를 회복하려 하자 다시 한번 교회는 곤란에 봉착하였으나 결국 그녀가 1567년에 폐위되고 한 살 밖에 안 된 제임스 6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스코틀랜드는 강력한 장로교회 국가가 되었다.

 

불행히도 1572년 낙스가 사망하면서, 어린 제임스 6세의 섭정이었던 모톤 백작이 다시 스코틀랜드에 감독주의로 돌이키려 했을 때 또 다시 위기를 겪는다. 이때 장로교회를 견실하게 세워갔던 지도자가 앤드류 멜빌이다. 그가 만든 제2치리서는 1578년 총회에서 채택이 된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1603), 스코틀랜드의 제임스6세가 영국의 왕위를 계승한다(제임스1세). 그는 영국의 청교도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도를 모두 박해하였고, 그의 아들 찰스1세는 청교도 박멸운동을 전개하고 스코틀랜드에는 영국국교회를 따를 것을 강요하였다. 1637년 7월 23일 장로교회가 폐지되고 영국교회의 의식에 따라 예배가 실시되던 날, 스코틀랜드는 봉기하여 장로교회를 사수할 것을 결의하는 ‘국가계약’을 맺었다.

 

이 국가계약은 찰스1세에게는 선전포고였으므로, 그는 스코틀랜드와 싸우기 위하여 의회를 열었는데, 이때 많은 청교도들이 의회에 진출하게 되자, 왕이 의회를 해산하는 과정에서 의회파와 왕당파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이 때 스코틀랜드는 영국과 아일랜드와 함께 신성 동맹과 계약을 맺고 스코틀랜드에 장로교 신앙을 보존하고, 영국과 아일랜드 교회가 성경을 따라 개혁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1643년의 웨스트민스트 회의에 참석한다.

 

찰스 1세가 1647년 1월 의회군에 체포되어 처형되고, 독립교도인 올리버 크롬웰이 지배하면서 독립(회중)파를 편애하자 반감을 느낀 스코틀랜드는 오히려 민족주의를 발흥하였다. 그래서 크롬웰이 죽자, 스코틀랜드는 화란에 피신가 있었던 찰스1세의 아들 찰스2세를 왕으로 옹립했다. 그는 ‘국가 계약’과 ‘신성동맹과 계약’에 서약하였기 때문에 영국의 청교도들까지 감동하여 영국의 왕으로도 추대받았다.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왕이 된 찰스 2세는 그 서약을 무표화하고 장로교회를 탄압하였다. 이때, 스코틀랜드는 국가계약과 신성동맹과 계약을 재확인하고, 찰스2세에 항전하기로 선포한다. 이들을 ‘계약파(Covenanters)’라고 부른다. 계약파는 왕권신수설을 부인하였다. 왕은 백성에게 제한된 충성만을 요구할 수 있고, 백성이 왕과 맺은 계약을 어길 때 벌을 받는 것처럼, 국왕도 계약을 어길 때 백성에 의하여 제재를 받아야 한다. 이 계약파의 정치 사상은 조지 부캐넌에 의하여 다듬어지고 러더포더에 의해 완숙되어졌다. 이에 대한 찰스2세의 박해는 끔찍하고 잔인했다.

 

1685년 찰스2세기 죽자 그의 동생 제임스2세가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아예 로마교회로 돌이키고자 했다. 결국 그는 1688년 명예 혁명으로 왕위에서 쫓겨났다. 그가 축출된 후, 그의 딸 메리가 화란에서 귀국하여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었는데, 그녀는 오렌지의 윌리암 공과 결혼하여 상당히 개혁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종교 관용령을 선포하여 청교도와 장로교도에 대한 살육의 시기를 종식시키고, 1653년 이후 폐지되었던 장로교 총회를 다시 열 수 있게 했다(1690).

 

1710년 영국과 스코틀랜드는 의회를 통합하게 됨으로, 정치적으로는 한 왕실, 한 의회가 되었지만, 종교적으로는 영국은 성공회를, 스코틀랜드는 장로교회를 각각 유지하였다. 두 의회의 통합을 추진한 사람은 윌리암 카스테어스 목사이다. 성공회의 영향을 받은 스코틀랜드는 1712년에 지역 시찰회나 대지주가 지역 교회의 목사를 임명할 수 있는 임명권을 의회로부터 인정받게 된다. 이것은 장로교회 정치를 떠나는 것으로서 장로교회의 분열을 예고하였다.

 

스코틀랜드에서 최초의 장로교회 분열은 1733년 에벤에셀 어스킨 목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가 평신도의 목사 임명권을 반대하였고, 시찰장이 회중이 원치 않는 목사를 파송하는 것에 반대한 이유로 노회에서 제명당했고, 총회에서 면직되었다. 결국, 그와 동료들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떠나 스코틀랜드 자유 교회의 전신인 ‘분리교회(Secession Church)’를 창립했다. 그러나 이 교회는 기존의 장로교회를 참 교회로 인정할 것인지의 여부로 인하여 논쟁이 일어나 서약파와 반서약파로 분리되었다(1747년).

 

또 1752년 토마스 길레스피 목사도 평신도의 목사 임명권을 거부하다가 총회에서 면직되었고, 1761년 동료들과 함께 구원교회(Relief Church)를 조직했다.

 

데이빗 흄의 합리사상에 영향을 받아 18세기말과 19세기에 신학자들이 중도주의 신학운동을 일으켰을 때, 장로교회의 순수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운동이 토마스 찰머스에 의해 일어난다. 중도주의 신학이란 교리와 체험 이 중간에 있는 윤리적인 삶을 표방하는 신학을 말한다. 그러나 그도 역시 평신도의 목사 임명 제도를 폐지할 것을 주장하다가 결국 1848년 정부 교회를 떠나 스코틀랜드 자유교회를 조직한다(1843). 이 자유의 의미는 교회가 정부로부터 자유할 뿐만 아니라 정부가 지명한 목사를 섬길 의무로부터의 자유이다.

 

이후 1847년 길레스피의 구원교회와 어스킨의 분리교회가 합동하여 연합장로교회를 조직하였고, 다시 1900년에 이 연합장로교회와 찰머스의 자유교회가 합동하여 스코틀랜드 연합 자유교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찰머스의 자유교회의 소수파는 자유주의를 수용하는 연합을 거절하고 스스로 작은 교회로 남아 신앙을 보수하고 있다.

 

5. 영국의 교회 개혁

 

영국의 국왕 헨리8세가 수장령을 발표한 후 영국은 로마교회와 단절하고, 독자적인 국교회를 세웠으나 이 교회는 완전한 개혁교회가 아니었고, 단지 교회의 머리만 교황에서 국왕으로 바뀐 것 뿐 교리와 예배, 교회질서는 여전히 로마교회와 동일하였다.

 

영국교회의 개혁에서 특별히 장로교회와 중요한 사람은 존 위클리프와 켄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크랜머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이다. 이들은 감독정치를 반대하고, 장로회 정치가 성경적인 것임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헨리8세와 에드워드 6세 때에 활동하였다.

 

1570년대에 토마스 카터라이터가 공개적으로 영국의 감독정치를 반대하다가 쫓겨나서 1572년 월터 트래비스와 함께 완즈워드에 최초의 영국장로교회를 설립하였다. 이때로부터 장로교회가 영국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여 엘리자베스 여왕과 제임스1세의 통치기간인 17세기 초 윌리엄 에임스에 의해 급속하게 퍼져나간다. 한다.

 

찰스1세가 영국의 청교도를 박해하고, 스코틀랜드조차 감독교회로의 전환을 요구하자 스코틀랜드는 국가계약을 맺고, 또 영국과 아일랜드와 신성동맹과 계약을 체결한다. 이에 찰스1세는 스코틀랜드와 전쟁을 하기 위해 영국의 의회를 소집했는데, 청도교 의원이 대거 진출하자 4번씩이나 의회를 해산하였다. 4번째 의회를 해산하였을 때, 의회파는 자위대를 구성하여 왕당파와 싸움에 돌입한다. 이 혼란의 시기에 청교도들은 영국 교회의 신앙고백, 예배, 교회 정치를 로마교회의 잔재로부터 완전히 개혁하기 위하여 웨스터민스터에서 교회 회의를 소집하였다(1643.7.1-1649.2.22). 이 회의의 결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교리문답, 소교리문답, 예배모범서, 교회정부형태, 교회행정을 위한 지침서 등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 회의의 총대는 의회가 파송한 상, 하원 각15명과 전국에서 모인 121명의 목사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장로회 정치를 주장하는 장로파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라 감독제와 장로제를 가미하는 중도파, 또 개교회의 독립을 주장하는 회중파, 국가가 교회를 통치할 것을 주장하는 에라스투스주의자들로 구성되었다.

 

웨스터민스터 교회회의 이후 영국 장로교회는 1660년 왕정복고와 함께 왕위에 오른 찰스 2세의 통일령, 5마일령, 시의회령으로 인해 큰 박해를 받았다. 통일령은 영국교회는 장로정치가 아니라 감독정치로 회귀하는데, 모든 목사가 3개월 이내로 영국교회로 개종하든지 아니면 사직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의 칙령이다. 5마일령은 통일령에 반대한 목사를 전임지와 도시로부터 5마일 이내에 출입을 금지함으로써 청교도 목사의 활동을 제한하는 법이었고, 시의회령은 국교신자가 비국교신자로 개종하지 못하게 하는 법이다. 그러다가 1688년 명예혁명으로 찰스2세는 축출된 후 왕위 계승을 한 메리에 의해 발표된 관용령(1689)으로 장로교회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았으나 교세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18세기의 영국 장로교회는 더욱 약화되었고, 스코틀랜드 교회의 신학적인 도움을 받은 북부의 교회들만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19세기에 스코틀랜드에서 이주한 장로교인들에 의해 다시 소생되었다. 1836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영국에 대회를 조직하였고, 1843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분열하면서 영국에 스코틀랜드 자유교회의 계통의 교회들이 세워졌다. 그러다가 1876년에 영국 안에 있는 이 두 교회가 연합하여 영국장로교회를 조직하였다. 1921년에 최초의 총회를 구성하였고, 나중에 개혁주의 신학을 고백하는 다른 교회들과 연합하여 지금은 연합개혁교회(the Unite Reformed Church)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6. 아일랜드 장로교회

 

아일랜드는 처음에 패트릭에 의해 복음화되어 켈틱 교회(Celtic Church)라 불려졌다. 1170년 로마교회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면서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종교개혁 때 헨리8세가 수장령을 선포하여 영국교회의 교권을 장악하자 아일랜드는 반대하였다. 제임스1세 때 아일랜드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이 되었고, 이 때 프란시스 베이컨의 조언에 따라 영국과 스코틀랜드 접경의 청교도들이 이 곳에 이주되면서 북아일랜드는 스코틀랜드화된다.

 

열렬한 로마교회의 신자들이었던 원주민들은 영국과 스코틀랜드인의 유입에 분개하였고, 1641년에 폭동을 일으켜 장로교도들을 살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 가운데서 스코틀랜드-아일랜드 계통의 장로교회가 이 곳 아일랜드에서 1642년 최초의 노회를 조직하게 되었고, 1660년에는 10만명의 신자와 80여개의 교회로 성장하였다.

 

이 후 찰스2세와 제임스2세의 박해 가운데서도 꾸준히 성장하였고, 1683년에는 미국에 이민을 간 스코틀랜드-아일랜드 계통의 이주민들을 위해 미국 장로교회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란시스 매케미를 파송하였다.

 

7. 화란개혁교회

 

당시 모든 유럽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로마교회의 영향 아래에 있었던 화란이 개혁교회로 설 수 있었던 것은 존 칼빈의 영향이었다. 제네바에서 칼빈을 통해서 교육을 받아 목사가 된 기도 드 브레가 고국에 돌아와서 1559년 벨직 신앙고백서를 작성한다. 이 고백서는 안트베르프에서 1563년 비밀리에 모인 대회에서 화란교회의 신앙고백서로 채택이 된다.

 

스페인의 식민지배하에 있었던 화란은 계속되는 종교재판과 학정에 항거하였다. 화란은 북부 7개주가 연합하여 독립을 선포하고, 윌리엄 오렌지 공을 공화국의 왕으로 세웠다(1584년). 그리고 오랜 투쟁 끝에 스페인으로부터 완전한 독립하였다(1608년). 이로써 화란의 개혁교회도 로마교회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게 되었다.

 

화란 개혁교회는 스페인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하는데, 1568년 베젤에서 교회규칙을 제정하고, 다시 1571년 엠덴에서 다시 교회 규칙서를 채택하는데, 이때 벨직 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과 제네바교리문답을 사용할 것을 채택한다. 그러다가 알미니우스파의 주장은 결국 1618-19년의 도르트 총회를 모이게 하였고, 여기서 도르트 신경과 도르트 교회질서가 탄생하게 된다. 이때부터 벨직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도르트 신경은 화란개혁교회의 일치신조가 된다.

 

도르트회의 이후 18세기 말까지 화란은 잠시 경건주의의 영향에 들어간다. 그리고 19세기 초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화란을 합병하였으나(1810) 화란이 나폴레옹을 격퇴하고 오렌지의 윌리암 프레데릭을 왕위에 앉힌다(1813). 윌리암 1세는 개혁교회를 화란의 국교로 선포했으나 영국 망명생활 중에 영국국교회에 깊은 영향을 받은 그는 1816년 교회질서를 장로체제에서 귀족정치로 바꾸었으며, 또 신앙고백서를 받아들이는 것을 개인의 자유에 맡겨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헨드맄 드 콕 목사는 도르트 신경을 고수하였는데, 이로 인해 자기가 목회하고 있던 교회의 당회로부터 면직을 당한다. 결국 콕 목사는 1834년 10월 14일 분리를 선언했고, 또 이사야8:11-15을 본문으로 윌리엄 1세를 아합 왕에 비교하여 설교한 일로 추방된 핸리 스홀트 목사가 지도하는 교회와 함께 1840년에 암스텔담에서 대회를 열었고, 또 1869년 미델부르크 대회에서 십자가 아래에 있는 개혁 교회(Reformed Congregations Under Cross)라는 교회와 합동하여 기독개혁교회를 조직하였다.

 

1886년에 아브라함 카이퍼에 의해서 또 다시 분리가 이루어졌다(돌레앙티, 고소). 아브라함 카이퍼(1837-1920), 그는 얀 헨드맄 카이퍼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에 모자라는 아이로 취급받았지만, 레이든 대학을 졸업할 때는 최우수 학생으로 졸업했다. 대학시절에는 종교 자유주의자였다가 신앙을 회복하면서 정통 개혁파 신학자가 되어 기독교 사회 건설에 관심을 나타내었다. 그는 1864년부터 국가개혁교회의 비스트, 우트레히트, 암스텔담에서 목회하였고, 1870년에는 종교 주간지 De Huraet 의 편집인이 되었고, 1872년에는 화란이 당면한 문제를 개혁주의 신앙의 입장에서 조명하기 위하여 일간신문 ‘드 슈탄다르트’를 편집하였다. 또 그는 프린스터러가 창당한 반혁명당을 재결성하여 1874년 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1880년에 자유대학을 설립하여 교수가 되었고, 후에 화란의 수상이 되기도 하였다(1901-1905).

 

카이퍼가 정치에 참여할 때 목사가 아닌 장로로서 암스텔담 교회를 섬겼는데. 그때 카이퍼를 비롯한 암스텔담 교회의 당회는 자유주의적인 신앙을 고백하는 신자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금하였다. 이 일로 1886년 교회당국은 카이퍼와 다수의 장로들을 제명 처분하였고, 이 징계 파동으로 카이퍼를 중심으로 200여 교회가 국가개혁교회를 떠나 돌레앙티 교회를 세웠다. 이 교회는 앞서 분리한 기독개혁교회와 1892년에 연합하였다(화란개혁교회들). 이 연합에 합류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그대로 (기독개혁교회)라고 한다.

 

후에 카이퍼에 의해 이루어진 교회의 다원성 문제, 일반은총 문제, 가정 중생설 문제가 1942년 총회에서 결정되었고 이를 반대한 흐레이다누스와 스킬더 등 많은 교수와 목사 장로들이 면직되면서 1944년 8월 새로운 교회가 분리된다. 이 교회는 화란자유개혁교회이다.

 

8. 미국장로교회 역사

 

17세기 초부터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프랑스, 독일, 화란 등지로부터 미국으로 이민이 이루어진다. 이들은 처음에 각기 독자적인 교회를 설립한다. 이 중에서 장로교회는 미국장로교회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란시스 매케미에 의해 1706년 12월 26일에 뉴저지 주 프리홀드에서 최초의 필라델피아 노회가 조직되었고, 이후 지속적인 성장으로 다시 4개의 노회가 되었다가 1717년 9월 17일 3개 노회가 모여 최초의 대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장로교회는 알미니안주의, 아리안주의, 소시니안주의와 같은 이단신앙으로부터 신앙의 동일성을 지키기 위하여 많은 논쟁 끝에 모든 목사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교리문답에 서명해야 한다는 규칙을 채택한다(1729년 대회).

 

이후 1730년대에 조지 휫필드와 조나단 에드워드를 중심으로 하는 대각성(부흥) 운동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 운동의 결과는 전혀 예기치 않게 장로교회의 분열의 빌미를 제공한다. 즉 부흥 운동을 지지하는 파(신파, new side, 예일대학과 로그대학출신)와 이를 반대하는 파(구파, old side, 하버드 대학출신)로 나뉘고 이 두 파는 결국 1745년에 분열한다. 이 명분 없는 분열이 아무런 유익이 없자 다시 1758년에 연합한다. 그리고 독립전쟁 후 1789년 5월 21일 최초의 미국 장로교회 총회가 조직된다.

 

이후 서부개척과 그 지역의 선교 및 교회설립에 목회자 수급 문제로 인하여 장로교회 총회는 1801년에 회중교회 총회와 통합을 결행한다. 교회가 성장하던 중 여전히 목회자 수급에 문제가 있자, 컴벌런트 노회가 자격 없는 자들을 목사로 세우는 일로 켄터키 대회로부터 징계를 당하자 1810년 분리하여 컴벌런트 장로교회를 조직한다. 이 교회는 1906년 미국장로교회(PCUSA)와 합동한다. 컴벌런트 노회의 이탈 이후 장로교회 총회는 수준 높은 목사 양성을 위하여 1811년 뉴저지에 프린스톤 신학교를 설립한다(어번, 유니온, 웨스턴, 컬럼비아, 레인, 멕코믹, 유니온 신학교 설립).

 

1801년 장로교회는 회중교회와의 통합으로 말미암아 내적 갈등을 갖게 되었는데, 구학파(old school)와 신학파(new school)가 그것이다. 신학파는 신앙고백서를 교리의 요지로만 이해하고, 회중교회적 정치를 추구하고, 구학파는 신앙고백서를 교리의 체계로 믿고, 장로교회정치를 주장하였다. 다수를 차지한 구학파는 1837년 총회에서 투표로 통합계획 통합계획, 첫째, 새 개척지에서 모든 선교사는 상호 협력한다. 둘째, 회중교회에서 장로교회 목사가 일하다가 문제가 발생할 경우, 그가 속한 장로교 노회에 보고하여 문제를 해결하도록 한다. 셋째, 장로교회가 회중교회 목사를 초청할 경우 장로교회 헌법을 따라서 하도록 한다. 그러나 그 목사와 교회 사이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 그 목사가 속한 회중교회 연합회에 보고하도록 한다. 넷째, 상임위원회를 둔다. 회중교회는 모든 남자 회중에 보고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장로교회는 장로교회 헌법에 따라 치리하도록 한다(Amstrong 1956, 30-32, 오덕교 장로교회사, 198-199). 을 폐기하여 장로교회에서 회중교회의 요소를 제거하였다. 다음해 총회에서 구학파는 신학파를 총대로 받아들이지 않자 따로 총회를 조직하게 된다. 그래서 미국장로교회는 두 개의 장로교회로 분열한다.

 

1861년 노예해방문제로 인하여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노예제도폐지를 반대했던 남부지방에 있는 구학파에 속한 교회가 북부지방의 구학파 총회에서 분리되어 미국 남 장로교회를 조직한다. 또 남북전쟁이 끝난 후, 노예제도폐지를 찬성했던 북부지방에 있던 신학파와 구학파도 통합하여 미국 북 장로교회를 조직했다(1869년). 이 통합으로 인하여 북 장로교회는 오히려 신학파의 영향력이 증대되어 신학적, 교리적 포용주의가 강화되었다. 결국 1903년 북장로교회 총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수정하고 첨가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예정과 관련된 장들(3, 10, 11장)을 위시하여 어러 장에 수정을 가하고, 34장(성령), 35장(하나님의 사랑과 선교에 관하여)을 첨가한다. 이 두 장의 내용은 제한적 구속과 효과적 부르심을 피해간다. 35장에서 모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주장하고, 유아로 사망한 아이가 불신자의 자녀라도 구원을 얻게 된다고 선언하여 보편 속죄론을 지지한다. 또 작정 부분에서 예정교리를 삭제하였다. 이 수정으로 인하여 1906년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를 합성한 교리를 가진 컴벌런트 장로교회와 통합한다.

 

이 신학파가 주장한 교리적 포용주의가 북 장로교회 안에 대세를 이루면서 유럽으로부터 건너 온 자유주의(현대주의) 신학을 받아들이게 되고, 100년 동안 신학적 전통을 지켜 오던 프린스톤 신학교가 자유화된다. 이때 메이첸을 중심으로 하는 몇몇 교수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한다(1929). 또 메이첸은 해외 선교부가 자유주의와 되는 것을 막기 위한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자 독립선교부를 조직한다. 총회는 이 문제로 메이첸을 면직하자 그는 100여명의 목사들과 함께 미국 정통장로교회를 조직한다(1936년).

 

정통장로교회에서 천년설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 무천년설을 주장하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대항하여 전천년설을 주장하는 멕킨타이어를 중심으로 페이스 신학교를 설립하고 동시에 성경장로교회를 조직한다.

 

한편, 남 장로교회는 1880-90년 사에 불어 온 진화론과 자유주의 사상에 굳건히 서서 북 장로교회처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수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1886년 죽은 배우자의 형제나 자매와의 결혼을 금한 부분을 삭제하였고, 1939년 로마천주교회를 사탄의 회중으로,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표현한 것을 삭제하였고, 1942년에는 9장에 성령론을, 10장에 복음을 첨가하였다.

 

남 장로교회는 1873년 이후로 계속 교회연합을 시도해오는 북 장로교회를 노예제도를 찬성한 죄를 회개할 것을 촉구하면서 받아들이지 않는다. 또 1878년 다시 연합의 물꼬가 트였다가 북 장로교회가 1906년 컴벌런트 장로교회와 연합하는 바람에 무산된다. 그러다가 남 장로교회는 나중에 북 장로교회가 1958년 북미장로교회와 연합 한 후에 조직된 미국연합장로교회와 교단을 통합하게 된다. 북미장로교회는 스코틀랜드 계약파에 의해 1753년 설립된 연합대회(Associate Synod)와 연합개혁대회(Associate Reformed Synod)라는 두 교단이 1848년에 합동하여 생겨난 교단이다.

 

남북통합을 이룬 연합장로교회는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초교파적 교회 연합 운동 및 일치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1961년 연합장로교회는 성공회, 감리교, 연합 그리스도 교회를 초청하여 교회 연합회를 조직하여 교단 통합 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아직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 운동은 로마교회까지 포함시키고 있다. 급기야 1967년 로마교회와 북미 세계 개혁교회 연맹 사이에 교류가 이루어져 신학, 예배, 선교에 대한 광범한 대화로 인하여 연합장로교회는 모든 면에서 로마교회의 영향을 받아 개신교의 존재 가치를 상실하였다.

 

미국 연합장로교회는 교회연합운동을 하면서 타교단과의 막힌 담을 헐기 위하여 1967년에 신앙고백서를 두 번째 수정을 하였다. 188개의 노회 중 19개 노회가 반대하고, 3개 노회가 기권하여 166개 노회의 절대적인 동의를 얻어 신조가 수정되었다. 중요한 수정내용은 삼위일체라는 단어와 성경무오교리가 삭제되었고, 대신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해가 강조되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가 한 인격 안에 두 개의 품성 곧 인성과 신성을 가진다는 교리가 부인되었고, 단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로 인간이 되셨다”고 선언되었다. 셋째로, 인종, 전쟁과 가난, 성 문제를 시대적인 과제라고 지적하면서 이런 것들을 바로잡기 위하여 교회의 화해 능력이 요구된다고 하였다. 넷째로,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1560년),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2스위스 신조,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서, 소교리문답을 인정하고, 대교리문답은 삭제하였다. 그 대신에 독일 고백교회의 신앙고백서인 바르멘 신학 선언을 포함하였다.

 

여성평등사상은 1869년 북부지역의 북 장로교회 조직과 함께 시작되었다. 여성 해외 선교부 조직(1870년), 여성 국내 선교부 조직(1879년), 여집사 제도 인정(1915년), 모든 초교파기관과 교회회의의 임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1923년), 여 장로제도 인정(1930년), 여 목사 제도 승인(1956년).

 

9. 기타 미국의 교회들

 

미국개혁교회(Reformed Church in America): 뉴욕의 네덜란드 개혁교회를 중심으로 시작되었고, 벨직, 하이델베르크, 도르트 신경을 신앙의 표준으로 채택하고 있고, 1970년대 말 21만 명의 교인이 있었다.

 

기독개혁교회(Christian Reformed Church): 네덜란드 개혁교회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1970년대말 28만 명의 교인이 있었다.

 

북미개혁장로교회(Reformed Presbyterian Church of North America):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의 권위를 신봉하면서 성경을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지침서로 고백하는데, 펜실베니아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1989년 현재 5,000명의 교인이 있고, 제네바 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개혁장로교회, 복음대회(Reformed Presbyterian Church, Evangelical Synod): 1965년 북미개혁장로교회와 정통장로교회와 성경장로교회로부터 나온 신자들로 조직되었는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수정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이 교회는 테네시주 룩아웃 마운틴에 커버넌트 대학과 세인트 루이스에 커버넌트 신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미국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in Ameriaca): 이 교회는 미합중국장로교회 즉 이전에 노예해방문제로 북 장로교회와 결별했던 남 장로교회에서 1973년 교리적, 사회적인 문제로 나온 교회이다. 처음에는 전국장로교회(National Presbyterian Church)라고 하였으나 2차 총회에서 미국장로교회로 개칭하였다. 이 교회는 1647년에 결정한 전통적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교리문답, 교회정치형태, 치리서, 예배모범서를 모두 채택하고 있다. 1989년 현재 19만 명의 교인이 있으며, 미국연합장로교회 다음으로 미국에서 큰 교단으로 성장하고 있다.

 

참고로, 1936년에 메이첸을 중심으로 조직된 정통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두고 있고, 1989년 현재 교인은 19,000명 정도이고, 칼 메킨타이어를 중심으로 금주운동과 전천년설로 인하여 정통장로교회에서 나간 성경장로교회는 1989년 현재 8,000명의 교인이고, 이 교회가 운영하는 페이스 신학교는 폐교 위기에 있다.

 

10. 캐나다와 호주 개혁교회

 

캐나다에는 화란에서 이민을 간 사람들을 중심으로 세워진 캐나다 개혁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해밀턴에 캐내다 개혁교회신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참고로, 캐나다에는 장로교회, 회중교회, 침례교회가 연합하여 조직한 캐나다 연합 교회가 있다.

 

호주에는 역시 화란에서 이민을 간 중심으로 세워진 호주 자유 개혁교회가 있다. 이들은 화란 자유개혁교회, 캐나다 개혁교회, 그리고 한국의 고신과 자매교회 관계에 있다. 참고로, 호주에는 동호주장로교회가 있는데, 자유개혁교회는 이들과 연합을 위한 긴밀한 대화를 진행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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