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이천우 목사(개혁주의 신앙공동체)의 글입니다. 개혁교회를 이해하고 누리는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 개혁 교회를 누리는 삶(1)
이천우 목사(개혁주의 신앙공동체)
성도의 의무와 권리인 신앙고백 학습
- 역사적 개혁교회의 지속을 갈망하면서 -
신앙고백은 교회가 나아가는 방향을 잡아주는 푯대와도 같습니다. 교회는 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공동체이고, 이때 성경의 내용은 방대하고 사상이 심오하기 때문에 어떻게 믿는가의 문제에 대한 대답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하며 이것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에 근거하여 교회는 지금까지 역사를 달려 나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배도의 파도가 도도히 밀려와 아예 교회를 제도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아주 어렵고도 무서운 시대입니다. 현대 교회가 세속주의의 거센 파도 앞에서 방황하고 그래서 심지어 교회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도 비참할 정도로 순전히 인간적인 종교 기업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신앙고백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연구의 중요성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열심히 추구한다는 것은 참으로 필요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이기를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성경을 연구하려고 하는 자세를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전제되지 아니하면 기타 다른 일들이 제아무리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사실은 가치와 의미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추구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지식이 없이는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 4:6)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망한 것은 열심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영적 생활을 수행함에 있어서 지식이 없는 맹목적인 열심은 유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엄청난 해를 자초합니다. 이스라엘은 지식 없는 열심을 좇은 결과 하나님을 배도하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0:2절에서 이것을 말했습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여기서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주신 계시를 가리킵니다. 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인격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해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계시를 주셨으며, 아울러 이 계시로 말미암아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계시의존사색신앙(啓示依存思索信仰)을 하는 것입니다.
만일 성도나 교회가 이 계시를 저버리고 자기 멋대로 열심을 내게 되면 우상숭배에 빠지게 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썩어질 금수와 버러지 형상으로 만들어 왜곡 되이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좇는 방식의 신앙생활을 하지 않게 되면 바로 그 순간부터 자기를 좇는 것 곧 자기의 의를 좇은 것이 되어지고 맙니다. 그러한 자기 열심과 자기의 의의 결국은 오로지 영혼의 황폐함만을 초래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써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추구해 나가야 합니다. 젊고 힘이 있고 시간이 있을 때에 주님께로 부르심을 받을 날이 이르기 전에 우리는 더더욱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증대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있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나가는 인생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는 부지런히 성경을 연구해야 합니다. TV를 보고, 신문을 보고, 게임을 하는 시간을 줄이고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오늘날과 같은 고도의 정보화시대에 어떻게 TV나 신문을 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TV와 신문을 보는 시간의 십분의 일만큼도 성경을 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을 절재하고 성경을 읽고 연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성경을 제대로 읽고 이해할 수 있으려면 역사적 개혁 교회가 고백해 나온 신앙고백이나 혹은 성경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조직신학 같은 교리 공부 과정을 한번 가져야 합니다. 특별히 신앙고백 같은 교리 학습은 성경 전체의 메시지가 어떤 흐름으로 전개되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그렇지만 성도들이 스스로 교리 공부를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도들의 신앙을 인도하는데 이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교리 공부 곧 신앙고백 학습입니다.
교리 공부는 성경 전체를 체계적이며 조직적으로 공부하고 주연(周延)된 사고로서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뒷받침 해 주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성도라면 반드시 이 과정을 한번쯤은 거쳐야 합니다. 이렇게 하고 나면 다음부터는 성경 어떤 부분을 읽더라도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되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적어도 곁길로는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교리 공부는 딱딱하고 재미가 없다는 말을 하는데 재미로 성경을 배운다는 것은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소리이고 그러려면 소설이나 읽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사실은 성경의 진리를 제대로 알기만 하면 성경은 세상의 그 어떤 소설보다도 더 흥미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나오는 베뢰아 사람들이 성경을 상고한 이유는 ‘이것이 그러한가’ 하는 것을 살펴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바울이 선포한 메시지가 과연 성경적인가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던 것입니다. 현대의 성도들에게서는 이런 자세기 더더욱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은 성경의 뒷받침을 받지 못하는 이론들이 온 사방에 널려 있고 검증되지 않은 채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쉽게 퍼져나가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여기 저기서 각양각색의 세미나들이 개최되고 부흥회들이 열립니다. 장사꾼들에 의해서 마구잡이로 만들어진 복음을 다루는 책들은 또 얼마나 많이 넘쳐납니까? 신학적으로 검증도 되지 못한 이론들이 하나님의 말씀인양 마구잡이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성경의 문맥이나 사상의 통일성과는 상관없이 여기저기서 끌어다가 자기의 이론에 뜯어 맞추는 식의 성경 강의들도 넘쳐 나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들이 버젓이 간판을 내걸고 하나의 큰 단체를 이루어 존재하는 까닭에 충분한 신학적 지식이 없는 순진한 성도들은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고 있는 실정입니다.
신앙고백의 중요성
참으로 현대 교회는 다양한 위기에 직면하여 거의 집단적인 거짓 교회로 전락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계 2:9, 3:1). 온 사방에 자칭 교회들이 널려 있지만 정작 역사적으로 개혁파 교회가 믿고 지켜 나온 제반 신앙의 도리로부터 이탈 해 버린지 이미 오래 입니다. 이 사실은 자기들이 진리를 믿는다고 공언하지만 그렇게 믿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도무지 성경적으로 맞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을 통하여 여실히 증명됩니다.
어느 한 사람의 성도가 신앙생활을 한다 할 때에 이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원리에 성립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첫째, 신앙과 생활의 원천인 성경에 집중한다는 의미이고, 둘째, 성경에 대한 이해는 정통성 곧 주연된 사고 체계를 가져야 하므로 이는 교회가 역사적으로 고백해 나온 신앙고백에 동의하는 데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하는 원리입니다. 끝으로, 성경이 가르치는 일정한 생활 체계를 갖게 됩니다. 경건으로 연결되지 않는 신학은 철학이요 사변일 것입니다. 반면 경건으로 연결된다 할지라도 일정한 질서 체계가 있어야 합니다.
성도와 교회는 반드시 신앙고백을 가져야 하는데 이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칼빈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서 충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요리문답(신앙고백)이 없이는 스스로 보전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요리문답은 좋은 씨앗을 맨땅에서 말라 죽지 않도록 지킴으로써 시대를 거치면서 증식되게 해주기 때문이다.’ 신앙고백이 없는 교회란 마치 정신 없는 육체와도 같아서 ‘죽은 교회’요, ‘거짓 교회’에 불과할 뿐입니다.
여기서 신앙고백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는 두 가지 적절한 실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고전적인 실례로서 종교 개혁 시대 당시 스위스에서 일어났던 자유 방만한 주관적 성경 해석이 초래한 ‘뭔스터시의 재난’ 사건입니다. 1522년 루터에 의하여 최초로 독일어 신약성경이 번역되고 쯔빙글리 일행이 1930년에 신구약 성경 전체를 번역하여 보급하게 되자 개인적으로 성경을 연구한 후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주말 성경공부 모임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1533-35년도에 이르러 극단적 개혁을 주장하던 일부 재세례파 무리들은 하나님께서 뮌스터 시를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만들라고 지시했다면서 시청사와 시의회를 차례로 장악하여 뮌스터 시를 점령한 후 자칭 ‘압제 당하는 자들의 피난처’라고 선포했습니다. 이들이 시를 장악하고 있는 동안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운 합법적인 광란이 도처에서 자행되었습니다.
두 번째 사례는, 최근의 것으로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다미 선교회의 ‘1992년 10월 28일 세상 종말 선포’ 사건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다미 선교회 사람들이 종말 준비에 쏟은 숱한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이장림 목사가 주도한 다미 선교회의 오류가 한국 기독교에 끼친 해악과 부작용은 다양한 형태로 일어났습니다.
이상 두 가지 실례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는데 두 가지 사건 모두 ‘교회의 역사적 신앙고백’ 곧 ‘교회가 역사적으로 보전해 나온 정통 신앙’이 없거나 있어도 무시한 데서 발생한 사건들이라고 하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뮌스터 시의 재난’과 ‘1992년 10월 28일 세상 종말 선포 사건’은 사실은 오늘날에도 이런 저런 형태의 다양한 변신 형태로써 여전히 재현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고백의 사상과 배치되는 각양 인본주의 수단으로서 부흥을 이룬 대형 교회들과 이런 저런 명칭을 앞세워 제멋대로 신앙의 형태를 조성해 나가는 사설 선교회들이 역사 속에서 개혁 교회가 진술해 나온 신앙고백과는 도무지 일치되지 않는 것들을 앞세워 복음의 영역을 형성해 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오늘날 인터넷의 발달에 편승하여 얼마나 다양한 개인적인 신앙 형태들이 유행을 만들어내고 있습니까?
배도의 물결이 도도히 흐르고 있는 이 위기의 때에 ‘과연 어떻게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하는 고민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길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비록 세상 속에서 기독교가 어떤 다양한 모습으로 타락하고 그래서 구원을 돕는 기관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구원을 저버리게 만드는 유혹거리로 작용한다 할지라도(마 23:15) 한편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분명한 또 하나의 세계를 이루면서 면면히 역사 속을 달리고 있습니다. 성도는 자신이 받은 구원이 궁극적인 완성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면서 단아한 모습을 드러내 나갈 수 있으려면 역사적 개혁 교회가 온갖 박해와 유혹 앞에서도 초지일관 고백해 나온 신앙의 정통 곧 개혁교회의 역사적 신앙고백의 자리에 자신을 갖다 놓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한번 구원하신 당신의 백성인 경우 끝까지 구원하여 완성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성도의 견인 역사’가 어느 한 성도에게 적용될 때에 그는 바로 이와 같은 깨달음에 필연적으로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역사적 개혁 교회에 대한 인식의 중요성
지금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대중들의 인기를 휩쓸고 있는 ‘자칭 개혁교회’가 아니요, 역사 속에서 생명의 피값을 지불하면서까지 신앙고백을 지켜 나온 ‘역사적 개혁교회’, 바로 그 개혁교회의 생명력으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과거 역사 속에서 교회가 사라졌던 불행한 시기가 꽤 오랜 동안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교회가 나서서 자칭 교회 노릇을 하고 있었지만 개혁자들이 보기에 그것은 도저히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교회 부재의 시대가 무려 100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서서히 종교 개혁은 일어났고 개혁교회가 출현함으로써 초대교회 이후 몇 세기 정도 존재하다가 사라져버린 하나님의 나라는 다시금 그 모습을 뚜렷하게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겨우 4세기도 넘기지 못한 채 오늘날 교회는 또 다시 사라지고 있는 경향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들마다 마치 신앙고백에서 이탈하기를 경주하듯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종교 개혁 시대의 내적인 분열과 끝없는 분쟁이 낳은 여러 부작용들이 지금까지도 온갖 형태의 모습으로서 증가되고 발달하면서 참 교회를 혼란에 빠트리고 있습니다. 가령 지금까지도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17세기 초에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항론파, 영국에서 발생한 독립교회주의, 독일의 경건주의, 18세기에는 헤론후트파와 감리교도, 스웨덴버그파가 일어났습니다. 19세기 초에는 다비즘에 의한 형제교회단, 스코틀란드의 어빙이아니즘, 몰모니즘, 강신술파 등등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들의 정체를 뚜렷하게 드러내놓고 역사적 개혁파 교회 앞에 도전하는 세력은 사실 별로 위협적이지 않습니다. 보다 위협적이고 전율을 느끼기까지 하는 것은 ‘거짓 개혁교회들의 범람 현상’이라 하겠습니다. 즉 역사적 개혁교회가 고백해 나온 신앙고백과 전혀 상관없는 신앙활동을 하면서도 자기네가 전통 개혁교회라고 주장하며 나서는 사이비 교회들인 것입니다. 이들은 ‘교회 성장학’과도 같은 희한한 세속적인 방법들을 동원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교회의 외적인 덩치를 내세우면서 그것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데서 되어진 역사라고 치장하며 나선다는 데서 문제의 심각성은 더합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오묘함을 알지 못하는 어린 사람들의 눈에는 그런 것이 정통 기독교인양 생각되기 마련이기에 현재 제도권을 이루기까지 한 이들의 ‘복음 증거 활동’은 아이러니칼 하게도 사실은 가장 교회를 심각하게 타락시키는 제2의 그 당시의 베드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개혁교회라고 주장하지만 역사적 개혁 교회가 고백해 나온 신앙고백들을 따르지 않는 한 영원토록 그렇습니다.
어떤 이론가는 성경이 있는데 왜 굳이 신앙고백을 배워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질문이야 말로 자가당착에 빠졌다고 밖에 할 수 없으니 다음과 같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서문’에서 밝힌 하지(A. A. Hodge)의 설명이 이를 잘 지적한다고 하겠습니다. “만일 교회가 오래 노력하여 자세히 교리를 밝히고 표현한 것으로부터 도움을 받기를 원하지 않는 개인이 있다면 그는 자기의 지혜만으로 자기만의 신경을 작성하는 것이다. 교리에 대한 거부감의 근원은 하나님의 백성이 집단적으로 시험해서 증명을 얻은 신앙과 신경들을 부정하는 그 자신만의 사사로운 판단과 지혜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신앙고백을 가르치지 않는 교회로 말미암아 교인들은 갈수록 우민화(愚民化)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마다 설교라고 쏟아내지만 사실 신앙고백에 비추어볼 때 이단과 사이비로 정죄받을 수밖에 없는 엉터리 설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현대 교회가 이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 까닭에 목사의 설교에서 비진리적인 것들이 나타나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일이 허다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처럼 진리를 분별하게 되면 도리어 ‘교만하다’고 눈총을 받는 현실이 되어버렸습니다.
신앙고백은 성경의 진리를 가장 정확하게 조직화시킨 ‘교리의 체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라 한다면 당연히 신앙고백의 교리를 배워야 합니다. 어떤 학자는 ‘교리는 우리를 하나의 교회로 연합시키는 공통된 지식과 믿음’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많은 교회들이 신앙고백을 교인들의 신앙을 위한 기본으로 삼지 않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어이없게도 신앙고백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교인들이 허다해진 실정입니다.
참으로 아쉽게도 신앙고백이 무엇인지, 교리가 무엇인지 모르는 교인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이들은 ‘신앙고백’과 ‘교리’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이 맘에 들지 않는다거나 무언가 복잡한 이론일 것 같다는 생각에서 느끼는 부담감 혹은 어려운 법률서처럼 전문용어가 가득하고 알아듣기 힘들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문제는 교인들의 생각을 이렇게 만들어버린 주범은 다름 아닌 목사들이라고 하는 데서 심각성이 있습니다. 즉 이는 스스로 신앙고백 교육을 외면한 목사들이 자초한 타락의 자업자득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일부 정신 나간 목사들이 성경적 교회가 아닌 다만 성공적 교회 곧 눈에 보이는 교회의 양적인 성장이 하나님 나라의 일의 전부인양 생각하고 온갖 방법론들을 개발해냈습니다. 우선 눈에 드러나 보이는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목사들은 교인들의 낮은 정서에 아첨하며 다가가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부흥이라는 슬로건 아래 용맹스럽게 활약한 부흥사들이 키친 부정적인 영향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인스턴트 식품에 길들여진 현대의 성향은 신앙의 영역에서도 나타나 요즈음 교인들 역시 인스턴트 성경공부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QT’ 같은 희한한 성경공부가 유행을 이루고 있고, 교회의 외적인 성장의 기교와 재주를 가르치는 교재들이 홍수를 이루듯이 넘쳐 나고 있습니다. 검증되지 아니한 성경공부 교재들, 설교 테이프들, 간증 비디오들 등등이 사방에 널려 있지만 정작 역사적 개혁교회가 고백해 나온 신앙고백으로서 달아보면 함량미달 정도로 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사이비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 투성이입니다. 역사적 개혁 교회가 고백해 나온 신앙고백은 거의 성경과 방불한 가치를 갖습니다. 교회는 이 신앙고백으로서 이단들이나 진리에 대한 부분적인 해석들 그리고 진리의 축소와 과장 기타 등등의 도전 앞에서 ‘자기를 수호’해 나왔습니다.
이름만 갖다 붙인 ‘가짜 개혁주의 교회’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생명을 계승해 나온 교회로서의 ‘진정한 개혁주의 교회’가 되려면 다른 무엇보다도 역사적 개혁주의 교회가 고백해 나온 동일한 신앙고백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정신과 신학과 삶이 역사적 개혁 교회의 그것과 일치를 이루지 않고 그렇게 하는 데 관심도 없으면서 이름 좋은 줄은 알아서 그것만 떡 따다가 ‘개혁주의 교회’라고 한다고 해서 실제로 개혁주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행위는 오히려 이름을 도용하는 도둑질에 불과할 뿐이요, 믿음의 선진들의 거룩한 희생적 신앙을 욕되게 하는 짓이 되는 것입니다.
요리문답과 신앙고백의 정의
그러면 신조 혹은 신앙고백이란 무엇이며, 이것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사실 교회는 그 성격상 발생 초기부터 신조를 가져왔습니다. 신조의 기원은 주님의 물음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사람들이 가졌던 주님께 대한 이해는 다양했습니다. 어떤 이는 세례 요한이라고 했고, 어떤 이는 엘리야라고 했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했습니다. 만일 예수님을 이렇게 안다면, 그것은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반면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고,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고 하셨습니다(마 16:13-19).
따라서 예수님께 대한 이와 같은 신앙고백이 없이는 교회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신조 혹은 신앙고백은 역사 속에서 다양하게 가해진 도전 앞에서 내용이 좀더 세밀하고 구체적이며 조직화되게 됩니다. 가령 비록 겉으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다 할지라도 정작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증인들과도 같이 하나님의 피조물로 생각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고백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교회를 생각할 때에도 정작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교회의 상과 이탈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도적 교회 시대 때부터 이미 좌우 곧 유대주의와 세속주의에 근원을 둔 이단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더욱이 오류들은 갈수록 미묘해졌습니다. 이런 까닭에 교회는 진리에 대한 생각을 좀더 명확하게 진술하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고, 이에 따라 명확한 단어와 문장을 사용하여 문서로서 확정하여야 했습니다. 참으로 교회를 향한 다양한 도전들이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났고, 따라서 그럴 때마다 교회의 신앙고백은 불가불 좀더 명확하고 세밀하며 깊고 조직적인 내용으로 발전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로마 교회를 맞서서 개혁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당시의 역사적 상황 앞에서 교회의 신앙고백은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신앙고백(confession)이란 ‘나는 믿는다’는 뜻을 가진 라틴어 신조(credo)라는 어원으로부터 유래된 것으로서 ‘공동체가 신앙을 유지하기 위하여 꼭 필요한 믿음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신앙고백은 신조라는 유개념에 속해 있는 종개념의 용어로서 나머지 것으로는 신경(creed), 요리문답(catechism), 교헌(canon), 규범(rule of faith), 신앙의 상징(symbol of faith), 선언(decree)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와서는 신조는 종교개혁 이전의 신앙고백들을 가리키고 종교개혁 시대의 경우 그냥 신앙고백이라는 명칭으로 사용하는 흐름입니다. 벌코프(Louis Berkhof)는 신조와 신앙고백들에 대해 정의하기를 ‘그 내용에 관한 한 성경적 진리의 조직적 진술’이라고 했습니다. 좀더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본다면 필립 샤프(Philip Schaff)의 정의가 적당하겠는데 곧 ‘공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신앙 고백 또는 신앙의 내용을 언어의 형태로 표현하되 그것에 특별한 권위를 부여하여 구원을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여기거나 최소한 건전한 교회를 유지하기에 없어서는 안될 것으로 간주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신앙고백은 교회가 나아가는 방향을 잡아주는 푯대와도 같습니다. 교회는 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공동체이고 이때 성경의 내용은 방대하고 사상이 심오하기 때문에 어떻게 믿는가의 문제에 대한 대답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하며, 이것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에 근거하여 교회는 지금까지 역사를 달려 나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갈수록 상황은 더더욱 나빠지는 듯 합니다. 지금은 배도의 파도가 도도히 밀려와 아예 교회를 제도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아주 어렵고도 무서운 시대입니다. 지금 주위를 둘러보면 개혁 교회의 신앙고백들이 한결같이 우려했던 ‘거짓 교회들’ 곧 자신들이 믿는 바의 도리에 충실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성경의 가르침에서 멀리 이탈해버린 세속적 기업형 교회들이 사방에 난무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현대 교회가 세속주의의 거센 파도 앞에서 방황하고 그래서 심지어 교회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도 비참할 정도로 순전히 인간적인 종교 기업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신앙고백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로마 교회의 거짓된 교리로부터 성경이 가르치는 바른 교회를 회복하는 것이 종교 개혁 시대의 사명이었다면 지금은 교회라는 허울 좋은 명분 아래 사실상 인간적인 종교 기관으로 전락해 버린 거짓 교회들의 홍수 속에서 종교 개혁 시대의 신앙고백을 온전히 간직하고 서 나가는 ‘올바른 교회’ 하나가 제대로 나타나는 것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이러한 때에 이제 그토록 수많은 개혁자들이 자신들의 생명의 피값까지도 기꺼이 지불하면서 회복시킨 교회, 그 교회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돌아가는 일은 믿음의 백성이라면 마땅히 취해야 할 행동이며, 사실상 구원과도 직결되는 문제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임재방식인 것이요, 칼빈도 말했듯이 올바른 교회를 이루는 일을 떠나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 개혁 시대의 교회로 돌아가기를 소원합니다. 이를 위하여 종교 개혁 시대의 교회가 산고 끝에 낳은 아홉 가지의 신앙고백 문서들 - 제네바 교회 요리문답(Geneva Church Catechism), 스코틀랜드 신앙고백(Scotland Confession), 벨기에 신앙고백(Belgic Confession),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Heidelberg Catechism), 제 2 스위스 신앙고백(Second Helvetic Confession), 도르트 신경(Canons of Dort),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Westminster Large Catechism),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 을, 같은 주제로 조화시켜(Harmonized) 살펴보는 방식으로 연구해 나가려고 합니다.
본 강의의 연구 방식과 특징
신앙고백들을 주제별로 엮어서 살펴보는 이런 시도가 일찍이 몇몇 신학자들에 의해서 시도된 바가 있는데, 최근에 와서는 한국 개혁 교회권에도 잘 알려져 있는 죠엘 비크(Joel R. Beeke)와 싱클레어 퍼거슨(Sinclair B. Ferguson)의 공동 작업으로 출판된 ‘조화된 개혁신조들(Reformed Confessions Harmonized)’이 좀더 특별한 연구 방법을 시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두 사람은 역사적 개혁 교회의 신앙고백 7개를 택하여 조화시켜보는 시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위 저서의 결정적인 약점이라면 신앙고백을 조직신학적 주제에 따라 배치한 까닭에, 각 신앙고백들의 연속성이 지나칠 정도로 무시된 점입니다. 이는 신앙고백들을 조직신학의 각 주제에 뜯어 맞추려고 하는 한 결코 해결될 수 없는 한계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역사적 개혁 교회의 신앙고백들 중의 어느 것도 현재 신학권에서 체계를 잡고 있는 형식의 조직신학적 주제에 맞추어 작성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개혁 교회의 신앙고백들은 자기 시대에 밀어닥친 이단들과 사이비의 도전에 직면하여 진리를 수호하는데 목적을 두었을 뿐이지 하나의 신학을 조직적으로 진술하려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본 강의는 ‘조화된 개혁신조들(Reformed Confessions Harmonized)’이 취하고 있는 방식에서 얻은 힌트를 토대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지적한 바 신학 주제들에 맞추어 이곳 저곳에서 일부분의 내용들을 가져와서 억지로 뜯어 맞추는 데서 오는 여러 가지 약점들을 답습하지 않기 위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순서를 기준으로 삼기로 했습니다. 즉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순서를 따라가면서 이전의 신앙고백들이 고백한 신앙의 내용들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종합적 비교를 해보려는 것입니다.
본 연구가 시도한 두 번째 특징은 ‘스코틀랜드 신앙고백’과 ‘영국교회 39개조 신조’까지도 포함시킴으로서 역사적인 중요성이 그리 크지 않은 ‘프랑스 신앙고백’을 비롯한 나머지 서너 개의 신앙고백들은 의도적으로 배제시켰고 그야말로 역사적 개혁 교회의 대표적인 신앙고백들은 거의 다 종합하여 비교했다고 하는 점입니다. 또 하나의 특징으로는 각 강의마다 ‘학습목표’를 제시함으로써 각 과의 연구가 방향을 잃고 헤매는 일이 없도록 했으며, 각 강의 끝에는 특별히 알아두어야 할 중요한 신학적 개념들에 대한 이해를 돕는 해설들을 제시하고, 최종적으로 복습을 위한 점검 난을 두어 학습자가 자신의 학습 정도를 검토해 볼 수 있게 했다는 점입니다.
이와 같은 연구와 학습 과정을 통하여 도달하려는 목표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인들로 하여금 정확한 신앙 위에 설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본 학습을 시도하게 되면 아마도 교인들 중 일부가 떨어져 나갈지도 모릅니다. 사고하기를 싫어하고 대충대충 기분과 감정에 따라 적당히 믿으려고 하는 것이 두드러진 현대적인 성향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들의 경우 본래부터 자신들이 가짜였음을 자폭하는 것임에 별일이 아니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본래 말씀에 걸려 넘어지는 것은 주께서 세우신 법칙이기 때문입니다(벧전 2:8). 평안할 때 하는 신앙고백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이요, 정작 진실은 그것을 시험하는 창수가 일어났을 때 드러내는 반응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마 7:24-27). 자신을 스스로 속이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는 법입니다(갈 6:3). 자신의 구원의 확실성은 말씀의 거울 앞에서 달아보고 내리는 평가여야 합니다. 신앙고백 학습은 구원을 달아보는 시금석 역할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관심을 갖고자 하는 것은 보다 더 확실하게 신앙의 지리로 나아오게 될 진실한 믿음의 지체들에 대한 것입니다. 본 학습을 통하여 신앙이 더욱 굳어지고 견고해지면서 교회를 이루는 지체로서의 역할에 더더욱 충성하는 성도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오묘한 구원의 도리를 깊이 깨닫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주는 깊은 확신에 사로잡히는 까닭에 당연히 나타내기 마련인 반응이라 하겠습니다. 복음 진리에 대한 지식이 체계적이며 논리적으로 이해되는 사람에게서는 상대적으로 ‘구원의 확신’이 증가하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깨달음은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베푸시기 마련인 ‘구원의 확신의 능력’이 배후에서 역사하는 데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 학습이 추구하는 목표에 대한 앞의 이야기를 다시 간추려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이 시대가 회복해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교회의 모습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정확하게 배우고, 둘째, 배운 바대로 실질의 교회를 이루며, 셋째, 교회를 향한 어떠한 유혹 앞에서도 단호하게 서 나감으로써 믿음의 선진들로부터 받은 값진 유산을 후대의 역사 속으로 계승해야만 하는 시대적인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려 합니다. 넷째, 따라서 이 일의 일환으로서 개혁파 교회권에서 자녀들을 위한 성경연구로 오래 동안 활용되고 있는 칼빈의 제네바 교회 요리문답에 대한 연구 혹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해설을 병행하여 우리의 자녀들을 위한 신앙교육 자료로 사용할 것입니다.
덧붙여서 신앙고백에 요리문답을 포함시키는 것에 대해서도 잠깐 언급할 것이 있습니다. 중세 시대에도 신앙과 교리교육을 위해 묻고 답하는 문답형식이 존재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사용되었던 주된 자료들로는 사도신경, 주기도문, 십계명 등등 다양했습니다. 그런데 중세 말기에는 '고해성사'를 위하여 성찬에 대한 가르침이 첨가됩니다. 이후로 중세의 신앙교육은 고해성사에 거의 전적으로 종속되게 됩니다. 16세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요리문답(Catechism)은 교리교육의 방편이었다는 점에서는 중세적 전통에 연결되어 있지만 고해성사와는 명확하게 분리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볼 때 초대교회적인 전통에 보다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이미 1526년에 자신의 ‘독일미사(Deutsche Messe)’에서 요리문답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그러나 요리문답서는 일종의 교육이라 불리우는데 그것으로 사람들은 이방인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어할 때 그들이 기독교에서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행해야 하며 행하지 말아야 하는지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교육한다.” 16세기의 모든 개신교 요리문답서들은 바로 이와 같은 루터의 정의에 충실한 것들이었습니다.
1528년에 요리문답서에 관한 두 권의 책이 출판되었는데 하나는 라흐만 (Lachmann)의 저술 혹은 카스파르 그뢰털(Kaspar Graeter)의 공저로 알려진 ‘교리교육 혹은 어린이 교육’이었고, 다른 하나는 알타멀(A. Althammer)의 긴 제목의 저술, ‘요리문답서 즉 어떻게 청소년들을 가르치고 교육시킬 것인지 문답 형식으로 된 기독교 신앙에 대한 교육’입니다.
루터는 1529년에 아이들의 신앙교육을 위해 소요리문답서를 작성했고, 1년 뒤인 1530년에는 성인들의 신앙교육을 위해 만든 대요리문답서를 작성합니다. 이후로 이것들은 많은 교회들의 공식적인 교육지침서 역할을 했으며, 요리문답서를 보편화시키게 되는 기원 역할을 하게 됩니다. 루터의 요리문답서는 개혁파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심지어 트렌트(Trente) 공회의 결정에 따라 1566년에 공포된 ‘로마교 요리문답서’의 형성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요리문답과 신앙고백은 형식만 다를 뿐 성격상으로는 같다고 보아야 합니다. 칼빈은 1차 교리교육서를 1536년 11월에서 1537년 1월 사이에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것은 그가 1536년 8월 제네바 종교 개혁자 파렐의 설득으로 종교개혁 운동에 가담을 결심한지 불과 몇 달이 되지 못해서 작성한 것입니다. 칼빈의 1차 요리교육서의 특징은 구성상 루터의 대요리문답서를 본보기로 하고 있고, 내용적으로는 기독교강요(1536년판)를 요약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칼빈은 1차 교리교육서의 원명에 ‘신앙고백’이라는 단어를 첨가했습니다. 이것은 요리문답에 교회의 공적인 권위를 부여한 것입니다. 즉 1차 요리문답은 신앙고백과 방불한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이를 공적으로 선서해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칼빈의 1차 요리문답서는 사실 문답 형식으로 된 것은 아니고 이후 2차 요리문답이 작성될 때에 완전한 문답 형식을 취하게 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의 기능은 성경을 뒤로 밀어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고백은 성경을 보존하고 보호합니다. 성경을 자유분방하게 사용하는 바르지 못한 영들의 미혹을 제재하면서, 모든 논의를 성경으로 돌아가게끔 해주는 것이 신앙고백의 목적입니다.
맺는 말
지금까지 성도가 일상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성경 공부의 당위성과 더불어 역사적 개혁 교회가 전개해 나온 신앙고백 학습의 중요성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장로교회는 1907년에 독노회를 조직할 당시 영국교회의 39개 신조의 형식을 답습하고 인도 장로교회의 경우를 따라 ‘12 신조’라고 하는 간결한 형태의 신앙고백을 작성했습니다. 그러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에 대해서는 “성경을 밝히 해석한 책으로 인정한 것인즉 우리 교회와 신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칠 것으로 알며 그 중에 성경 요리문답은 우리 교회 문답책으로 채용하는 것이다”고 하는 부가적인 설명 정도로서 받아들였습니다. 이후 1960년대에 이르러 일부 장로교단들이 비로소 교회의 공식 신앙고백서로 채택하게 되지만 직분자들을 임직할 때만 비로소 신앙을 확인하는 절차를 밟을 뿐이고 일반 성도들이 세례를 받는 조건으로는 사용하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렇게 한국 장로교회는 역사적 개혁 교회가 고백해 나온 신앙고백들과는 아예 처음부터 친할 수가 없는 구조를 형성해 나왔던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이제 최근에 들어와서 그로 말미암는 부정적인 영향들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교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열심만을 내세워 앞 다투다시피 복음의 전선에 나서다 보니,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비성경적인 신앙 형태들이 버젓이 신앙생활의 정도인 듯이 유행병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어느덧 “무엇이 진리이냐?”가 아니라 “무엇이 더 크고 성공적이냐?”에 집중되어버렸습니다. 버젓이 성경을 옆에 두고 있는 기독교 안에서조차 ‘크고 많으면 옳은 것’으로 여기는 혼란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고백이 없는 교회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신앙고백은 성경이 그 방대한 내용을 통해서 가르치고 있는 진리들을 상호 충돌이 없는 사상으로 체계화 시킨 것입니다. 신앙고백의 안내를 받아 성경을 읽을 때라야 성경에 대한 성도의 구원론적인 지식은 보다 간결해지고 보다 명확해지게 됩니다. 역사적 개혁 교회가 간직해 나온 신앙고백들의 뒷받침을 받지 않으면 도무지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온전히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역사적 개혁 교회의 신앙고백을 무시한 채로 자기 소견에 옳은 방식대로 교회 성장을 추구한 후유증으로 오늘날 한국 교회는 살았다 이름하지만 사실상 죽은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교회의 경영자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인도해 나가시는 당신의 참된 교회는 당신의 참된 백성들의 신앙고백적인 삶을 통하여 여전히 역사 속에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 개혁 교회가 고백해 나온 신앙고백의 터 위에서 교회를 이루는 일을 생명처럼 여기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드러납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성도라 한다면 기독교적인 성향의 종교인들이 만들어 내는 시대의 유행으로부터가 아니라, 필히 살아계신 주님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마 17:3). 이를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가야 하며(딤후 3:16), 이는 역사적 개혁 교회가 고백해 나온 신앙고백으로 돌아가는 것임에 다름이 아닙니다. 바로 이것이 가장 안전하게 구원을 누리는 방법일 것이며, 가장 정확하게 교회를 구현하는 실력일 것이며,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입니다. 함께 역사적 개혁교회의 신앙고백들을 학습하십시다.
어떤 이들은 ‘신앙고백 학습은 재미가 없고 딱딱하다!’고 하면서 외면합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소설처럼 재미로 즐기는 대상이 아니고 공부하는 자세로 열심히 학습해야 할 과제입니다’라고 답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재미가 있어야 …’ 하는 식으로 토를 다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대답은 이렇습니다. “사실 엄밀히 말해서 성경처럼 재미있는 책이 또 어디 있습니까? 만일 성경 그 자체가 재미가 없고, 그것에다 덕지덕지 덧칠한 이야기들이 재미있다면 그것은 분명 그 사람의 영성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려는 겸손한 마음으로 가히 성경의 집약이라고 할 수 있는 신앙고백을 학습하십시다. 그리고 성경 읽기에 착념하십시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학습하는 것도 동일한 가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역사적 개혁 교회의 신앙고백들의 사상적 원천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칼빈이 성경의 재미에 대해서 묘사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참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의 저작이 아무리 기교 면에서 잘 다듬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성경만큼 감동을 줄 수 없다는 사실에서 성경의 이 특수한 힘은 명백해집니다.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나 키케로(Cicero)의 글을 읽어보시라. 플라톤(Plato)이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또는 그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의 책을 읽어보시라. 그것들은 놀라운 방법으로 독자들을 매혹시키며 기쁘게 하고 감동을 주며 또 황홀하게 만들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다 읽은 후에는 이 성경을 읽는 데 전념하십시오. 그리하면 성경은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깊이 감동시키며 우리 마음에 스며들 뿐만 아니라 골수에까지 새겨짐으로써 그 깊은 인상과 비교할 때에 수사학자나 철학자들의 힘은 거의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노력으로 얻게 되는 일체의 재능과 미덕을 훨씬 능가하는 이 성경은 신적인 무엇을 호흡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1권 8장 1절 끝부분).
순결한 우리 개혁 교회 성도들은 신앙고백을 학습하고 기독교 강요를 학습하며 무엇보다도 더더욱 성경 자체를 학습하는 데 일로 매진함으로써 오늘날처럼 우리의 영혼을 호리는 온갖 감언이설들이 난무한 시대에 우리에게 이루어진 구원을 확실하게 누리는 지혜와 실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손재호2006.08.31 22:09
손재호2006.03.28 23:46
손재호2005.10.19 22:22
손재호2005.10.09 17:13
손재호2005.09.29 11:08
손재호2005.09.25 04:16
손재호2005.08.06 18:54
손재호2005.07.31 14:06
손재호2005.07.15 10:03
손재호2005.07.14 16:40
손재호2005.07.14 16:36
손재호2005.03.19 21:25
손재호2005.03.19 21:24
손재호2005.03.16 11:24
손재호2005.02.02 15:14
손재호2005.01.17 15:50
손재호2005.01.14 20:54
손재호2004.12.21 23:23
손재호2004.09.04 09:15
손재호2004.04.28 2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