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재호 목사 Pro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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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495주년 기념 언약 교회 신앙 강좌 2>

 

<제1치리서>와 <제2치리서>를 통해 본 장로교회의 특성

 

이승구 (합동신학 대학원 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스코틀란드 교회가 천주교회로부터 성경적인 교회로 종교개혁을 이루는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성경, 그리고 성경에 근거한 믿음을 고백한 스코츠 신앙고백서(1560)와 더불어 스코틀란드 전체의 교회와 학교의 조직을 성경적으로 정비하려고 한 <제1치리서>(1560), 그리고 후에 이를 변경해 낸 <제2치리서> (1577/78) 등을 들 수 있다. 사상이 성경에 의해 변한 사람들은 실천적인 문제도 성경적으로 바꾸는 일을 과감히 했다.

 

역사적 배경

1. 개신교의 초기 순교자들:

(1) 최초의 순교자 패트릭 해밀턴(Patrick Hamilton, 1503-1528),

귀족 출신으로 파리 대학 대학에서 공부할 때 루터를 읽고 배운 후에 세인트 안드류스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가르치다가 제임스 비톤 대주교(James Beaton)와의 충돌로 1527년에 독일로 피신하여 말부르그에서 프랑소와 람버트(Francois Lambert) 함께 아주 루터파적인 짧은 신조(Loci commune)를 출판하고, 논쟁을 하자는 비톤 대감독의 초청을 받아 세인트 안드류스에서 기소되고 1528년 2월 27일에 24세의 나이로 화형당함.

(2) 죠오지 위샤트(George Wishart, 1513?-1546)

1546년 5월 1일에 세인트 안드류스(St. Andrews) 대성당과 딘스코트(deanscourt) 사이에 (지금 GW 사인이 있는 곳에서) 사형에 처해진 위샤트.

- 아버딘 대학을 졸업

-스코틀란드에서 헬라어가 처음으로 가르쳐진 학교인 몬트로즈 아카데미(Montrose Academy)의 교사

- 희랍어 신약성경을 가르쳤다는 혐의를 받고 도망하여 영국과 스위스로 피하여 살면서 <제일 스위스 신앙고백서>를 영어로 번역

- 1542년 말경 영국으로 돌아가 캠브리쥐의 코르프스 크리스티 컬리쥐(Corpus Christi College)에서 1년여 가르치다가,

- 1543또는 1544년에 다시 스코틀란드로 와서 몬트로즈(Pmtrose), 던디(Dundee), 그리고 동부 로디안 (East Lothian) 등지에서 개신교 사상을 설교하다가 해딩톤 근처에서 체포되어 - (해밀턴을 화형 했던 제임스 비톤의 조카요 1539년 그를 이어 스코틀란드 천주교회의 대표적 인물로 추기경이 된) 데이비드 비톤 추기경(Cardinal David Beaton, 1494-1546)에 의해 세인트 안드루스에서 화형당했다.

 

2. 개신교도들의 반발

이런 순교에 보복하고자 위샤트의 화형을 주도했던 비톤 추기경을 개신교 귀족들이 죽이고 그의 사체를 성안드류성 성문에 매다는 일(1546년 5월 29일). 이 암살 후에 그들은 성에서 요새를 만들고 있었으나, 결국 프랑스 함대와 군대에 의해 함락당하고 프랑스 갤리선의 노예가 된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인 죤 낙스(John Knox)가 스코틀란드 종교 개혁의 중심 인물이 된다. 그는 비톤 추기경을 암살한 사람들의 무리에 그 암살과 시해 사건 있은 지 일년 후에 참가하여 세인트 안드류스 성에 있으면서 죤 로프(John Rough)의 요청 하에 1547년 부활절 설교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3. John Knox

- 에딘버러에서 17마일 동편에 있는 하딩톤(Haddington) 근방에서 출생하였고(1505?, 1513?, 1514?, 1515?)

- 세인트 안드류스에서 수학하고

- 1536년에 사제로 임직한 것으로 여겨지는 Knox

- 길염(Thomas Gilyem=Gwilliam)의 영향으로 개신교로 개종하고 후에 러프(John Rough)와 죠오지 위샤트의 더 확고하고 열정적인 원리와 가르침에 동조하며 위샤트가 하딩톤에서 설교할 때 그들 시중했고, 큰 칼을 들고서 그의 bodyguard 역할을 하였고, 그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그와 함께 화형 당하려고도 했다고 한다.

- 1546년 5월 29일의 비톤 추기경을 제거하는 거사 당시 세인트 안드류스에 거주하면서 개신교 귀족의 자녀들에게 라틴어와 불어를 가르치고 있던 낙스도 일 년 뒤에 그의 제자들과 함께 세인트앤드루스 성에 모인 무리에 한 참여했다.

- 프랑스군에 의해 성이 점령되자 낙스도 프랑스 겔리선에서 19개월을 노역한 후에

- 영국 개신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의 개입으로 1549년 초에 풀려나 4월부터 영국에 있으면서 에드워드 6세와 크랜머(Cranmer) 대주교의 종교개혁 운동을 도왔다(1549-54). 즉, 그는 때때로 6명의 궁전 목사 중의 하나로 사역하기도 하면서 미사를 우상숭배라고 지적하고, 성찬 때에 무릎을 꿇는 것을 반대하는 일 등을 하였던 것이다. 자주 왕실 설교도 하던 그는 그에게 1552년에 제안된 로체스터 주교직(bishopric of Rochester)은 거절

- 에드워드 6세가 1553년 7월 6일에 죽자 메리 여왕(Mary Tutor, 1553-58 통치한 소위 Bloody Mary) 치하인 1554년 1월 말에 제네바로 가서 칼빈과 사귀고 츄리히에서 불링거와 사귄 후

- 칼빈의 권고를 따라 프랑크프르트의 영국인 피난민 교회의 목사로 있다가 이 교회에서 영국 교회의 <공동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을 사용할 것인가 제네바식 예전을 따를 것인가의 문제로 논쟁이 일어나 축출 당하자,

- 낙스와 윌리엄 휘팅햄(William Whittingham, 1524?-79), 그리고 그들과 동조하는 이들은 1555년 4월에 다시 제네바로 가게 된다.

- 낙스는 제네바에서 칼빈의 영향력이 가장 강하던 기간 중에 4년간 칼빈이 설교하던 바로 옆 건물에서 모이던 <영국인 피난민 교회>에서 목회.

- 이 때도 스코틀란드의 상황을 염려하며 그의 유명한 전투 문서라고 할 수 있는 <<여성들의 야만적인 통치에 대항하는 첫째 나팔 소리>>(First Blast of the Trumpet against the Monstrous Regiment of Women, 1558)를 썼고,

- 여러 개혁파 인사들, 특히 제임스 슈튜어트(James Stewart, 1513?-70), Argyll의 제5 공작인 알치발드 캄벨(Archibald Campbell, 1530-73) 등과 함께 하는 “회중의 귀족들”(the Lords of Congregation), 즉 “주의 회중”(the Congregation of the Lord)의 지도자들의 강한 권면에 따라 1559년 5월 2일에 드디어 에딘버러의 외항인 레이뜨(Leith)를 통해 스크틀란드에 다시 돌아오게 된다.

귀국하자마자 여왕의 법령에 의해 법밖에 있는 자로 선언된 낙스는 다른 개혁파 인사들과 함께 Perth에서 당시 섭정을 하고 있던(Queen Regent) 메리 여왕의 어머니(Mary of Guise/Lorraine)에게 개혁의 필요성을 요청하나 이런 개혁의 요구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던디(Dundee)와 펄뜨(Perth)에서의 설교는 백성들의 개신교적 열망을 더 강화시켰고,

- 죤 해밀톤 대주교(Archbishop John Hamilton, 1546-71)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낙스는 1559년 6월 11일에 센인트 안드류스 대성당에서 다시 설교하므로 언젠가는 다시 세인트 안드류스에 가서 성경을 바로 선포하겠다는 낙스의 오랜 소망을 이루게 된다.

- 결국 스코틀란드 왕실군 4,000명과 프랑스 지원 군 대(對) 500명의 개혁파 군대와 (1560년 1월 27일의 벌윅 조약[The Treaty of Berwick]에 따라 스코틀란드 개혁파를 돕게 된) 영국군 1만 명의 전투가 1560년 4월 4일부터 시작되어 6월 16일 프로테스탄트파가 승리하고,

- 1560년 7월 6일에 맺어진 에딘버러 조약(The Treaty of Edinburgh)에 따라 7월 15일에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동시에 철수하고,

- 1560년 7월 19일 St. Giles 대성당에서 낙스 집례 하에 공적인 감사 예배를 드림으로써, 스코틀란드가 일단 독자적으로 정치적, 종교적 문제를 개신교적인 방향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4. 스코틀란드 종교개혁의 구체적 모습

- 여섯 명의 요한이 4일 만에 초안하고 작성한 신앙고백서를 (John Knox, 훗날 로디언의 감독이 된 John Spottiswoode, 이전에 프란시스파 사제였으나 대륙의 개혁자들을 잘 알고 친교하며 훗날 글라스고우와 서부 지역의 감독이 된 John Willock, Padua에서 법학을 공부한 법학 박사, 후에 Perth의 목사인 John Row, 세인트 앤드류스의 목사인 John Douglas, 세인트 앤드류스의 부수도원장이었고 1547년에는 낙스의 이단자 혐의 재판을 하여야 했던, 그러나 후에는 교황은 적그리스도이고 천주교 미사는 우상 숭배라고 강하게 주장한 John Winram)

-1560년 8월 1일 구성된 스코틀란드 의회가 1560년 8월 17일에 받아들임으로써 스코틀란드 종교 개혁의 신앙 고백적 기초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제일 치리서>(The First Book of Discipline), 그리고 <공예배서>(The Book of Common Order)와 함께 스코틀란드 종교 개혁의 토대를 놓은 문서.

 

- 1560년 12월 5일에 남편인 프랑스 왕 프랑소와 II세가 죽자

- 1561년 8월 19일에 스코틀란드로 돌아와 19세의 과부 여왕으로 다스리기 시작한 메리 슈튜어트(Mary Queen of Scots/Mary Stuart, 1542-87)와 낙스의 대결은 매우 시사적 이 때 낙스는 부인이 1560년 12월에 사망하여 남은 두 아들 양육도 신경 써야 하는 상화이었음(1563년 Andrew, Lord Ochiltree의 딸인 Margaret Stewart를 후처로 맞음).

- 에딘버러의 홀리루드(Horyrood) 궁에서 메리 여왕은 미사를 드리기 시작했고, 낙스는 이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하기 시작.

- (1)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인 단리(Lord Darnly, 1545-67)가 1567년 2월 10일에 의문스럽게 살해당한 뒤 단지 3개월이 지난 후 그녀가 보뜨웰의 4대 백작(4th Earl of Bothwell)이요 단리의 죽음의 주된 책임을 지닌 것으로 알려진 제임스 헵번(James Hepburn, 1536?-78)과의 결혼한 것과

- (2) 법을 어기면서 죤 해밀톤을 대주교를 다시 세우려한 시도는 여론을 더 나쁘게 만들어 분노한 이들은 그녀를 폐위시키고,

- 총회는 1567년 6월 25일에는 그녀는 통치권을 포기한 것이라고 선언하였고,

- 6월 29일에는 그녀의 어린 아들을 스털링(Sterling)에서 제임스 6세(후에 영국과 합하여 제임스 I세가 됨)로 세우는 대관식을 하였다. 이 대관식에서 낙스는 소년 왕 요시아(왕하 12장)에 대한 설교하고, 12월에는 의회에서 설교하면서 스코틀란드 전체를 철저한 개신교 국가로 만드는 투쟁을 계속하다가 1572년 11월 24일에 낙스는 사망한다.

 

<제1치리서>

 

(흄 브라운의 이른 바 “스코틀란드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서”인) <제일 치리서>(The First Book of Discipline), 교회의 조직과 체제에 관한 계획

“저주 받은 교황주의에 의해서 그 동안 완전히 아주 오용된 것들의 개혁”을 위한 지침들

- 이는 1560년도 5월에 3주 동안 작성되었다가 후에 개정되었으며,

- 낙스와 그의 동료들은 종교 개혁을 빨리 완수하려고 1560년 5월 30일에 의회에 제출:

당시는 영국과 프랑스가 긴장 관계에 있는 상황이므로 결정 내려지지 않고

라틴어로 번역하여 대륙의 여러 개혁자들에게 보내어 의견을 청취하도록 함

- 1560년 12월 20일에 에딘버러에서 모인 총회에 제출된 치리서

(6명의 목사, 여러 교회의 장로들인 36명이 함께 모임 총회)

- 1561년 1월 15일에 모인 귀족들의 회의에서 검토되었으나 동의를 받지는 못함

아마도 교회의 치리에 대한 강한 표현에 모두가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교회에 속한 토지를 소유하는 문제에 대한 귀족들의 불안 때문으로 여겨짐. 낙스는 1561년 1월 27일에 많은 귀족들이 다음 같은 조건 하에서 치리서에 서명했다고 전했다. 즉, 현재 교회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자들은 이 수입 가운데서 목회자들의 사례를 지급하되, 소유권은 종신토록 가진다는 조건이다. 그러나 귀족들은 결국 <치리서>를 공식적으로 수용하지는 않은 것이다.

==>

교회는 독자적으로 1년에 두 번씩 총회로 모여 의논하면서 이 <치리서> 내용대로 교회와 사회 전체를 개혁하려고 하였다.

 

설교자들은 교회 내의 모든 부정들을 개혁하고, 교회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쳤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행해야 하며, 모든 왕국들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우리들의 성패를 맡겨야 한다고 하였다.

 

1. 제1항 교리에 대하여

이것이 가장 간단한 조항이다. 그러나 이것에 다른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조항의 내용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버지 하나님이 유일한 머리로 명령하여 세우시고 그의 양들이 따르도록 하신 것을 볼 때에 우리들은 그의 복음이 이 왕국의 모든 교회(kirk)와 모든 모임(assembly)에서 참되고도 공개적으로 선포되는 것이 필요하며, 그의 복음에 위반 되는 모든 교리들은 사람의 구원에 도움이 안 될 정도가 아니라 정죄 받을 만한 것으로 여겨져서 온전히 배제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는 (1) 교회의 머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하고, 따라서 (2) 그의 복음이 교회의 모든 모임에서 선포 되고, (3) 그에 위반되는 모든 것들은 온전히 배제 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선언한다. 그러므로 이하 이 치리서의 내용은 이를 구체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혹시 이를 오해할 사람들이 있을까봐 아주 친절하게 여기서 말하는 복음이 무엇이지도 밝히고 있다: “복음의 선포라는 말로써 우리들은 신약 성경 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도 포함하여 이해하니, 즉, 그 율법과 선지서들과 역사들, 그 안에서 (신약에 사는) 우리들이 참되게 소유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으로(in figure) 언급하고 있는 내용도 지칭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경전체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도 한다.

또한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교훈들로는 “하나님의 말씀의 명백한 명령이 없이 사람들이 법으로나 회의에 의해서나 규정에 의해서 사람들의 양심에 부과시킨 것들”리라고 하면서 다음 같은 것들을 아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겠다는 서약, 혼인 맹세, 남자와 여자들은 몇 가지 위장하는 의복에 묶어 놓는 일, 금식일의 미신적 준수, 양심을 위해 (특정한 날에는) 고기를 먹지 않도록 하는 것,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 교황주의자들이 창안해낸 것들인 사도들의 절기들, 순교자들의 절기들, 성녀들의 절기들, 성탄절, 예수님의 할례를 기념하는 절기, 주현절, 성결례절, 그리고 마리아와 관련된 여러 절기들과 같은 것들과 같이 사람들이 명령한 어떤 거룩한 날들[聖日]을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경 가운데서 명령되지도 않고 확신을 가질 수도 없는 것은 이 왕국에서 온전히 제거 되엉야 한다고 강하게 선언하고 있다.

 

2. 성례 문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정과 사도들의 관습 외에 그 어떤 것도 덧붙여져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말씀과 약속이 먼저 선포된 후에 세례와 성찬만이 복음의 표와 인으로 제시되고 준수될 것이 강조되고 있다. 세례 때도 주께서 명하신 평범한 물 외에 기름이나 소금이나 왁스를 같이 사용하는 것이나 침 밷음, 주문을 왜움, 십자가 형태로 세례베품 등과 같은 것은 성경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배제 되어야 할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성찬도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과 가장 비슷하게 하는 것이 좋다고 하면서 모두가 상에 둘러앉는 방식을 최선의 것으로 제안하고, 목사가 떡을 떼어 가까이 앉은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같은 존중하는 태도와 엄숙성을 가지고 그들끼리 또 나누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행동과 시도들의 모범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고 제안하면서, 이 때 예수님의 죽음 생각하도록 할 성경 구절을 목사가 읽어 주는 것은 좋은 데 그것은 주어진 지혜를 따라 하도록 권하고 있다.

 

3. 우상숭배의 폐지(Abolishing idolatry) 문제

- “우상숭배라는 말로 우리들은 미사와 성자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상을 숭배하는 것과 상들을 지니는 것과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포함 되지 않은 하나님을 높인다고 하는 모든 것을 지칭하는 것이다”(By idolatry, we understand the Mass, invocation of saints, adoration of images, and the keeping and retaining of the same; and, finally, all honouring of God not contained in his holy word).

- <제일 치리서>는 “하나님 말씀에 포함되지 않은 온갖 형태의 하나님을 숭배한다고 하는 것 모두”를 예배에서의 우상숭배로 더 명확히 규정하였다. 그리고 교회의 예배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강해로 풍성하게 되었고, 엄격한 치리를 강조하게 되었다.

- (1560년 12월 총회 때에 아직도 미사를 집례하고 있는 성직자들의 처벌을 엄격히 집행 해 주도록 의회에 청원하면서 미사 집례자들의 명단을 첨부하였음)

 

4. 목사들과 합법적인 선출의 문제

“개혁된 교회 혹은 종교 개혁을 지향하는 교회에서는 그 누구도 그 일에로 합법적으로 부름을 받지 않고서는 설교하려고 하거나 성례를 집례하려고 해서는 결코 안 된다. 일반적 소명은 선출(election)과 시취(examination), 그리고 임직(admission)으로 구성된다.”

- 특별히 선출된 학식 있는 목사들에 의해 시험(examination)을 받은 후

- 교인들에 의해 정당하게 청빙받고(election)

- 목사를 임직할 때 안수하지 않고 장립식에서 기도만으로 임직(admission)하게 함.

“비록 사도들은 안수를 하였으나, [사도 시대 이후의 상황에서] 이 의식의 사용은 불필요하다고 우리들은 판단한다.” 이는 스코츠 신앙고백서 20조에서 교회의 정치와 질서가 “교회를 교화하기 보다는 오히려 미신을 품게 하는 때는 그것을 변경해도 좋으며 또 변경시켜야 한다”고 선언한 것과 연관되는 문제라고 여겨진다. 그렇게 했던 주된 동기가 천주교에서 생각하던 주교의 안수에 의한 인물의 계승이라는 생각, 안수를 통해 성령님의 특별한 은혜가 임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미신을 극복하는 것이었음을 생각하면 스코츠 신앙고백서 작성자들의 동기는 교회 안에서 행하던 것이라도 성경적 근거가 없으며 특히 그것의 행사가 미신을 품게 하는 때는 변경해도 좋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변경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바를 구체화 하는 것으로 여겼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후 1577년에 총회에서 받아들여진 <제2 치리서>에서는 안수하는 일이 다시 나타났다. 이는 아마도 17년이 지난 당시에는 더 이상 천주교적인 미신이 작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상징적인 행위로서의 안수를 허용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 이후로 장로교회에서는 목사 임직 시에 안수를 선택 가능한 것(optional)한 것으로 여기되, 안수를 하는 경우에도 그것은 임직자가 그 일에로 성별되었음을 드러내는 단지 상징적 행위로만 여긴 것이다.

- 먼저 각 공동체가 자신들의 목사를 선출하도록 하고, 40일 동안도 적당한 목사를 청빙하지 않을 때는 가장 개혁된 교회(the best reformed kirk)가 위원회와 함께 교리와 지식에서 뿐만 아니라 삶에 대해서도 잘 점검함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양떼를 잘 목양할 수 있는 목사를 제시할 수 있다고 함.

- 1560년에 목사 자격이 있다고 인정된 자들: 12명보다 많은 이들이 독경자(readers)로 인허됨. (1560년 12월 총회 때 44명이 임직됨) 후에 자격 있는 목회자들이 세워지자 1581년 총회에서는 더 이상 독경자(readers)들은 세우지 않도록 결의함.

- 또한 <제일 치리서>는 “경건하고 많이 배운 사람들이”(godly and learned men) 부족함을 절감하면서 목회자들 위한 높은 교육적 수준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렇게 (1) 잘 훈련되고 준비된 목회자는 (2) 회중의 선출로 청빙되어야 하며, (3) 성경을 차례로 체계적으로 강해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온전한 가르침을 얻게끔 해야 한다.

 

5. 목사들에 대한 사례와 교회에 정당하게 주어진 재산과 임대료의 분배에 관하여

(Concerning the Provision for the Ministers, and for the Distribution of the Rents and Possessions Justly Appertaining to the Kirk)

 

- 또한 이 부분에서 <제일치리서>는 시골 지역(rural places)에서는 목사나 독경자(reader)가 아이들을 가르치도록 하고, 모든 도시 교구(town parish)마다는 학교(school)를 세우게 하고, 10개의 대교구마다 잘 준비된 교사들이 있는 중등 교육 기관(college)을 가지게 하고, St. Andrews, Aberdeen 그리고 Glasgow 3개 도시에 세워진 대학교(university)의 종교개혁적 개혁이 시도되도록 하였다. 또한 모든 이들이 평등하게 대학교(University)까지 공부할 수 있는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는 아주 높은 교육적 구조도 세계 역사상 최초로 제시하고 있다.

 

6. 교회의 재산과 (교회가 받는) 임대료에 대하여

학교의 운영과 목사들의 삶을 교회가 지지하게 하고

- 동시에 스스로 경제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는 이들을 돌아보는 전국적 제도도 도입함.

- 가난한 자들은 10분의 일세를 면제하고

- 부자들로부터 1년에 네 번은 구제 헌금을 거두어 집사가 관리하여 구제하도록 함.

- 천주교가 소유하고 있는 토지는 개혁된 교회에 양도하도록 함.

(처음에 “미신적 용도”를 위해 잘못 주어진 재산들)

- 또한 <제일치리서>는 일정한 거리에 있는 목회자들이 매주 한번씩 모여서 성경과 성경적 교리를 논의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니, 이는 일종의 계속 교육의 역할도 하며 노회의 토대를 이루게 한 것이다.

 

7. 교회의 치리에 관하여

 

8. 장로들과 집사들의 선출에 관하여

매년 선출되는, 즉 1년 임기제로 선출되어 섬기는 장로와 집사 제도를 가지게 되었다.

- 하나님 말씀에 대한 최선의 지식을 가지고, 정결한 삶을 살며, 신실한 사람, 정직하게 말하는 남자들을 제시하면(nominated to be in election)

- 그들에 대해서 매년 자유로운 선거를 한다(8월 1일) (The election of elders and deacons ought to be used every year once (which we judge to be most convenient the first day of August).

- 재선될 수는 있으나(he is appointed yearly, by common and free election).

- 집사, 재무 등은 3년의 공백을 가지도록(provided always, that the deacons, treasurers, be not compelled to receive the office again for the space of three years).

- “그들은 술취하지 말고, 겸손하고, 조화와 평화를 사랑하고 좋아 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에게 경건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They must be sober, humble, lovers and entertainers of concord and peace; and, finally, they ought to be the example of godliness to others.)

- “만일에 그렇지 않은 모습이 나타날 때 (그런 것이 비밀스러운 것이며) 목사나 같이 섬기는 동료들에 권고를 받아야 하고, 공적인 것일 때는 사역자들 앞에서 책망 받아야 한다. 이전에 목사들에 대해서 취해진 것과 같은 질서가 장로들과 집사들에게도 세워져야 한다.”(And if the contrary thereof appears, they must be admonished by the minister, or by some of their brethren of the ministry, if the fault is secret; and if it is open and known, it must be rebuked before the ministry, and the same order kept against the senior or deacon, that before is described against the minister.)

 

9. 교회의 정책(the Policy of the Church)에 대하여

하나님 말씀에 대한 설교와 해석에 대해서,

혼인에 대해서

장례에 대해서

예배당과 수리에 대해서

성례를 더럽히고 말씀을 모독하며 적법하게 불리워지지 않았음에도 목사로 자처하는 사람들에 대한 벌에 대해서

 

- 그러나 <제일 치리서>에는 옛 주교들과 비슷한 감독자들(superintendents)을 임시적으로 용인(5조 뒷부분): 교회의 조직과 확장을 위해서 “당분간” “경건하고 학식 있는 이들”을 열명-12명 뽑아서 그들로 10개의 교구로 나누어진 각 교구(diocese)의 행정적인 일을 하게 하되, 교구 목사들 보다 높지는 않게 했고,

부지런히 설교하고 교회를 개척할 필요성 부과 그들은 목사를 임명할 권한은 없고

- 지교회에 목회자가 필요할 때에는 근방 다른 교회의 목회자들과 모인 위원회(Council)에서 의논하여 목사 후보를 추천하고

- 지교회가 결정하도록 함. 낙스가 처음 작성한 원안에는 이 제도에 대한 언급이 없었을 것으로 예상됨 그러므로 아마도 이 부분은 John Spottiswoode이나 훗날 글라스고우와 서부 지역의 감독이 된 John Willock 영향일 것으로 추론됨.

- 임시적, 순전한 행정직, 이들도 비판을 받고 치리 받는 입장이었다는 것, 모든 총회에서 집회 초기에 이들에 활동에 대한 감사를 행한 것에서 일반적 주교직과는 다른 것임이 드러남. 만일에 “감독자가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서 게으르거나 교회들을 방문하고 덜아 보는 일에서 게으르거나 다른 목사들이 정죄 받을 다른 죄를 지었음이 분명하게 정죄되거든 그의 인격이나 직임에 구애 받지 않고 그 직무에서 물러나도록” 규정됨.

계획: 1. 오르크니 감독관(the superintendent of Orkney): 그의 교구는 the Isles of Orkney, Shetland, Caithness, and Strathnaver. 그는 the town of Kirkwall에 거주해야 함.

2. 로스 감독관(The superintendent of Ross): 그의 교구는 Ross, Sutherland, Moray, with the North Isles of the Skye, and the Lewis. 그는 Canonry of Ross에 거주.

 

3. 알가일 감독관(The superintendent of Argyll): whose diocese shall comprehend Argyll, [Kintyre,] Lorne, the South Isles, Arran [and] Bute, with their adjacents, with Lochaber. His residence to be in [Argyll].

 

4. 아버딘 감독관(The superintendent of Aberdeen): 그의 교구는 Dee and Spey 사이로 Aberdeen and Banff 군을 포함함. 그는 Old Aberdeen에 거주해야 함.

 

5. 브레친 감독관(The superintendent of Brechin): 그의 교구는 Mearns와 Angus 전 주를 포함함. 그는 Brechin에 거주해야 함.

 

6. 쎄인트 안드류스 감독관(The superintendent of Saint Andrews): 그의 교구는 파이프 (Fife)와 포떨링햄(Fotheringham)으로부터 스털링(Stirling)에 이르는 지역, 그리고 펄뜨(Perth) 주 전체를 포함함. 그는 Saint Andrews에 거주해야 함.

 

7. 에딘버러 감독관(The superintendent of Edinburgh): 그의 교구는 로디안(Lothian) 주 전체와 스털링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Merse, Lauderdale, 그리고 Wedale 교회의 동의를 얻어 포함 시키고 그는 Edinburgh에 거주 해야 한다..

 

8. 예드버러 감독관(The superintendent of Jedburgh): 그의 교구는 Teviotdale, Tweeddale, Liddesdale, 그리고 the Forest of Ettrick을 포함한다. 그는 에드버러에 거주 해야 한다.

 

9. 글리스고우 감독관The superintendent of Glasgow): 그의 교구는 Clydesdale, Renfrew, Menteith, Lennox, Kyle, 그리고 Cunningham을 포함 한다. 그는 Glasgow에 거주해야 한다.

 

10. 덤프라이스 감독관(The superintendent of Dumfries): 그의 교구는 Galloway, Carrick, Nithsdale, Annandale을 포함한다. 그는 Dumfries에 거주해야 한다.

 

시행: 1561년 3월 9일 이들을 선출하고 임직식 행함

- 낙스가 설교하고 교우들과 실제 대상자 5명에게 문답함

- 그 자리에 참여한 목사와 장로들이 이들과 악수례하고

- 기도로 임직식함. (안수는 없었음)

- Lothian 지역 John Spottiswoode

- Fife 지역--- John Winram

- Glasgow 지역--- John Willock

-Angus & Mearns 지역--- Earskin of Dunn

-Argyll 지역 --- John Carswell

실제 업무 수행은 정부의 인준과 지명을 받기 위해 6개월을 더 기다려야 했다.

 

<제2치리서>(1577/78)

 

- 낙스 사후에 개혁 운동의 사상적 지도자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고 흔히 “장로교주의의 아버지”(the father of Presbyterianism)이라고 불려지는 앤드류 멜빌(Andrew Melville, 1545-1622)의 주도하에 작성된 <제2치리서>(The Second Book of Discipline)가 1577년 총회에서 받아들여짐으로 스코틀란드에 철저한 장로교 조직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 <제2치리서>에서는 목사와 감독은 같은 직분임을 명확히 규정하였고, 앤드류 멜빌이 세인트 안드류스 대하교의 학장(Principal)으로 임명된 1580년 이후에 이르러서야<제1치리서>에서 감독자들에게 위임했던 행정적 권세를 노회(presbyteries)와 교회 법정(ecclesiastical courts)에로 이관하게 되었다. <제2치리서>에서는 주교제도 자체가 옳지 않은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 모든 목사의 동등성을 분명히 선언하였다.

- 노회(presbytery)가 명확한 교회 제도로 드러나게 되었고, 노회가 하나님의 법을 따른 것임이 분명히 선언되었다(jure divino theory). 비로소 이때에 이르러서야 처음 개혁자들의 본래적 의도에 일치하는 모습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 이렇게 온전한 장로교 제도가 나타난 것은 1581년에 이르러서이지만, 그것은 이미 스코틀란드 종교개혁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었다고 말하는 더글라스의 말에 우리는 기꺼이 동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제일 치리서>에서 이미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므로 모든 회원은 국가의 종교를 통제하는 데 있어서 동등한 지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에서의 평등성은 정치적 사회적 평등성보다 훨씬 더 먼저 선언되었다는 점을 주목하여 보지 않을 수 없다. 왕과 귀족들이 있는 정황에서도 교회에서는 모든 진정한 신자들의 동등한 지위와 결정권이 선포되었기 때문이다.

- 물론 이 이후로 스코틀란드의 교회와 학교를 개혁하여 스코틀란드 전체를 개혁하는 일은 순조로운 일을 아니었다. 특히 1660년 왕권이 회복(Restoration)된 후에는 감독제냐 노회 제도냐의 문제가 논쟁의 핵심이 되었고 17세기 스코틀란드의 언약도들(covenanters)은 낙스 등이 가르친 성경적 개혁파 사상에 충실하기 위해 피흘리기까지 노력했다.

 

<공예배서>(The Book of Common Order)

1562년에 총회의 동의를 받고, 1564년에는 개정되고 확대되어서 권위를 지닌 것으로 총회에서 공표됨.

- 이미 폐지된 천주교적 미사를 명확히 금하면서,

- 성찬 때에 회중들이 긴 성찬상에 둘러 앉아 성찬에 참여하도록 하고,

- 당회의 허락에 의한 표(token)을 가진 이들만이 성찬에 참여하도록 하고,

- 혼인은 예배 중의 한 부분으로 회중 앞에서 시행하도록 (즉, 사적인 혼인식 폐지)

- 예배 중의 시편 찬송과 어린 아이들에 대한 요리 문답 교육을 명백히 하는

스코틀란드 종교 개혁의 토대를 놓은 문서.

 

나가면서

 

여기서 “성경적”이라는 말은 때로는 명확히 성격적 근거가 있는 것을 뜻하기도 하지만, 성경 전체의 뜻에서 볼 때 보다 바른 이라는 뜻으로 생각될 수도 있는 문제들이 언급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점이니 우리의 삶에서 성경의 어느 구절에 근거해서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보다 “성경적”인 것이 있다고는 할 수 있느니 성경 전체의 빛에서 하나님의 뜻에 더 가까운 것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 1 치리서>와 <제 2 치리서> 등에서 언급된 구체적인 문제들은 그와 같이 폭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에 가까운 것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문서들의 또 하나의 특성은 이들 문서들은 스코틀란드 전체의 교회와 학교를 개혁하는 것과 관련된 문서들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국가 교회(national church)에 대한 생각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지도적인 사람들이 성경적 견해를 가지고 있을 때 (스코틀란드 종교 개혁이 이루어 질 때 같은 때가 바로 그런 때이다)에는 이런 국가 교회적 생각이 의미 있고 아름다운 결과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지도적인 사람들이 성경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있을 때에는 이런 국가 교회의 이상은 오히려 문제를 낳을 수 있고, 국가 교회에 속해 있던 이들이 그런 교회에 대해서 “애통하면서” 참 교회를 선언하고 나와야 하는 결과를 낼 수도 있다. 아브라함 카이퍼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바로 그런 일을 감행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국가 교회의 이상을 버려 버린 사람들도 자신이 속해 있는 지교회뿐만이 아니라, 같은 교단의 교회들은 같은 입장을 지니고 같은 일을 수행하겠다고 나갔던 것을 우리는 유념해야 한다. 이들에 비하면 우리들은 매우 개교회주의적인 분위기에 많이 물들어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교회를 새롭게 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그저 개 교회적인 일에만 신경을 쓸 뿐이다. 교단 전체를 새롭게 하는 일에 있어서는 상당히 비관주의적인 태도를 나타내는 것은 시대의 악함이 극에 도달한 것일 수도 있지만 우리들이 교회에 대한 바른 이해에서 멀어진 채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것만을 생각하고 있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문서를 작성하신 목사님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잘 권면하면서 이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방식으로 이 문서를 제출하고 있다. 다음에 인용하는 제1치리서의 마지막 말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이를 어떤 태도와 마음으로 수행하고 있는 지를 잘 나타내준다. 이를 우리 교우들 앞에도 같은 심정으로 제시하면서 우리 모두 그들과 그들의 말을 듣던 첫 사람들의 심정으로 우리들의 교회를 돌아 볼 수 있었으면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성령님의 능력으로 여러분들의 마음을 밝히사 하나님 앞에서 그가 보시기에 선하고 받아들여질 만한 것들을 분명히 볼 수 있게 하시고, 하나님께 온전히 엎디어 순종하여 여러분들 자신의 감정보다는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선호하게 하시고,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고 그의 영예를 높이기 위하여, 그리고 여러분들 자신의 양심의 위로와 확신을 위하여, 앞으로 따라 올 후손들의 대한 위로와 모범을 위하여 강한 영으로 힘을 주셔서 여러분들이 이 왕국 가운데서 용감하게 악을 벌하고 덕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들의 영예에 의해

가장 겸허한 종들이

에딘버러에서 1560년 5월 20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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