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재호 목사 Pro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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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부천개혁교회 이천우 목사의 글이다. 이혼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이혼에 관한 질문에 대한 답변


(부천개혁교회 이천우 목사)

 

이혼!

 

오늘날 참 많이 행해지고 있지요. 통계청의 발표에 의하면, 현재 발표된 2004년도의 경우 13만9천3백65쌍으로 1일 평균 3백81쌍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전체 이혼의 이유로는 성격차이에 따른 갈등이 49.4%로 가장 높았으며, 경제문제가 14.7%, 가족간의 불화로도 10.0%가 이혼하였으며, 배우자 부정이 7.0% 였습니다. 통계청의 이혼율 발표에 의하면 유배우 1천명 당 이혼건수를 나타내는 '유배우 이혼율'이 작성, 공개됐는데 1천명 당 5.8건(쌍)으로 1백명 당 0.58%이며, 우리나라 전체 부부의 이혼율은 1.16%라고 합니다.

 

세상 법은 이혼을 허용하고 있으며, 참으로 많은 사람이 결혼을 한 후 또한 이혼을 하고 있습니다. 이혼에는 드문 경우이겠지만 막 결혼한 신혼 부부들의 여행 중에도 행해지는 경우도 있다지요. 이렇게 이혼이란 것이 쉽게 행해질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님의 질문의 경우에는 이혼을 하는 사람 중에서 비그리스도인의 경우까지 포함해서 질문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경우에서 이혼을 하는 사람을 가지고 질문을 한 것이었을 것이며, 그리고 이 이혼을 개혁주의 입장에서 과연 어떻게 다루며 가르쳐 왔는지를 알고자 하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사실 님의 질문에서처럼 개혁주의 입장에서 이혼을 다룬 것을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장로교회가 신조의 표준으로 삼는데 있어서 사도신조와 더불어 중요한 문서로 삼는 것 중의 하나인 웨스트민스터 삼대표준 문서인 신앙고백서와 대교리 문답에서 볼 수 있는 정도입니다. 그 외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봐야 합니다. 사실 성경에서 가르침을 받는 것 이상의 개혁주의 입장도 없습니다. 개혁주의 입장은 '오직 성경으로!'입니다.

 

먼저 개혁주의 입장에서 알 수 있는 문헌 자료로는 웨스트민스터 삼대표준 문서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 139항에서는 제7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을 열거하여 다루면서 이중에 부당한 이혼 혹은 버림을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4장 결혼과 이혼에 관하여의 제5, 6항에서 이혼에 대해서 다루었습니다.

 

먼저 5항에서는, "약혼한 후에 범한 간음이나 간통이 결혼 전에 발견되면, 무흠한 측에서 그 약혼을 파기할 수가 있다(마1:18-20). 결혼한 후에 간음한 경우는, 무흠한 측에서 이혼 소송을 하는 것이 적법하며(마5:31,32), 이혼한 후에는, 범죄한 측이 죽은 경우나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적법하다(마19:9; 롬7:2,3)." 라고 하였으며, 이어서 6항에서는, "인간의 마음은 부패한 까닭에, 하나님께서 결혼을 통해서 짝지어 주신 사람들을 갈라 놓기 위하여 부당하게 이혼 사유를 캐내는 경향이 있지마는, 간음 또는 교회나 세상의 법률에 의해서도 결코 어떻게 할 수 없는 고의적인 별거(別居)외에는 어떤 것도 이혼을 위한 충분한 사유가 될 수 없다(마19:8,9; 고전7:15; 마19:6). 이혼을 할 때에는 공적인 법적 절차를 밟아야 하며, 관련된 당사자들이 그들 자신의 사건에 있어서 자신의 의견이나 결정에 따라 자의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신24:1-4)."라고 하였습니다.

 

이곳을 보게 되면, "그리스도인에게도 이혼이 허용(허락)되고 있구나!."라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혼하고 나서 다른 사람과도 얼마든지 재혼을 할 수 있구나!."라는 것두요.

 

그러나, 우리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나 그리고 이것의 근거가 되는 성경의 가르침의 진정한 의도를 올바르게 이해하여 알면 이혼은 허용이나 불허용이나 이런 문제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명백한 선언에서부터 보겠습니다. 창세기 2장 20-25절에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아담과 하와가 한몸의 부부가 되는 광경이 나옵니다. 남자인 아담에게서 나온 여자인 하와는 남자와 상응하는 자로서 남자를 돕는 관계의 배필로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에게로 이끌어 오는 여자는 남자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로서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마 19:4-5). 그러면서 예수님은 성경에 기록된 이 사실을 들어서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라고 또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마 19:6).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는 것과 남자는 그의 부모를 떠나 제 아내와 합하여 한몸을 이룬다고 하는 것, 그래서 두 사람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몸으로 하나님께서 이렇게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는 것은 남자와 여자를합하여 한몸된 '부부'가 되게 하신 사람에게 하나님이 세우신 대원칙입니다. 사람이 이혼하여 갈라서는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이 한몸된 부부가 되는 결혼에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간섭하시는 섭리가 있었기에 이혼에서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개입과 간섭하심으로 되어야 하는 것이지 사람 저들 스스로의 마음으로 이혼을 생각하고 이를 결정하고 행하여 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혼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임을 믿고 이를 순종하는 믿음에 있어 왔으면서도 이혼은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짐에 따라 순종하는 믿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저들 생각과 마음대로 해나간다는 것이 말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못박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말이죠. 하나님이 이혼으로 이끌고 가시지 않는 한에는, 그래서 하나님이 이혼을 허락하시지 않는 한에는 결코 도무지 이혼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죠.. 따라서 이혼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혼은 안 됩니다. 이혼은 못합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이혼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결코 이혼의 허용(허락)을 말해주는 것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서도 동일하게 볼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 10-16절에서 결혼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 이혼 문제에 답변을 합니다. 여기서 그는 10-11절에서 먼저 주께서 친히 주신 결혼 명령에 대해 언급하였습니다.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이게 뭔 이야기입니까? 지금 사도 바울이 결혼한 그리스도인에게 하고 있는 말인데 아내는 남편과 헤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만일 남편과 헤어졌다면 그대로 혼자 지내든지 아니면 남편에게로 다시 돌아가 합하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에게도 아내를 버리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가 말한 것과 같이 마가도 남자와 여자의 결혼을 하나님께서 창조 때에 이 두 사람에게 하신 일로 거슬러 올라가서 하나님이 둘을 짝지어 한몸 되게 하신 것으로 말하며, 이러한 한몸을 사람이 나누어 몸을 둘로 만들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막 10:6-9)

 

사도 바울은 말입니다. "갈리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갈라진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서로 헤어져 있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본시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간에서는 사회 관습적으로 이혼에 관한 문제가 없었습니다. 이혼이란 남자 쪽에서나 여자 쪽에서나 동등하게 요구할 수 있는 권리인데 유대인들 사회에서는 여자 쪽에서는 이혼할 권리가 없고 다만 남자들이 여자를 버리던 관습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모세 때에 와서 이 관습이 바뀝니다. 만일에 이혼을 하여야 할 상황이 생겼을 경우에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하게 한 것입니다.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낼 것이요"(신 24:1). 이를 가지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말을 걸어서 올무를 걸고자 하였습니다. "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그러자 예수께서는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마 19:7-9)고 말씀하여서 세 가지를 분명히 하십니다. 첫째는, 이혼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바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러한데도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서 하나님의 의도와는 다르게 저들 마음대로 이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옛날 유대인 사회에서는 남자와 여자를 짝지어 한몸되게 하여서 둘이 결코 나누어질 수 없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서 관습적으로 남편 쪽에서 아무런 이유 없이 아내를 버려오는 악행을 해온 것입니다. 세 번째는, 그래서 아무런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림으로써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나눌 수 없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게 살아오는 그들에게 이혼에 합당한 이유가 있지 않으면 이혼을 할 수 없게 함으로써 여자를 보호하는 이혼 증서를 써 주게 하였습니다.

 

결국은 말입니다. 모세가 남편이 이혼 증서를 아내에게 써 주어서 집에서 내보내게 한 것은 이혼을 허용하고 그래서 이혼을 허락하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악한 죄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의 본의에서 떠나 자기들 마음대로 악하게 죄를 저지르고 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나눌 수 없으니 너희들 마음대로 아내와 갈라지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만일 부득이하게 갈라져야 하겠다면 아내도 납득하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모든 사람이 수긍할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께서도 허락하시는 이유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합당한 이유로 아내에게서 부정한 행위를 보고 이로 인해서 아내에게 분노하여 미워하게 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장가드는 것도 간음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음행한 여고 외에는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 한 것은 음행한 연고 외에는 이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짝지어 한몸이 되게 한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 서로 각각의 몸으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단지 헤어진다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되게 하신 몸을 사람이 갈라 찢어 놓는 행위의 악을 행하는 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혼 증서를 써주고서 아내를 집에서 내보내는 경우도 이것이 이혼을 허락하는 것이 아닌 것은 사도 바울이 이혼을 한 자에게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는 말에서 더욱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의 의도는 이혼할 수 있는 상황일지라도 한몸된 부부의 관계를 유지해가라는 것을 담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은 사람이 저들끼리 갈라지는 이혼을 할 수 없다고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만부득이하게 이혼을 하여 갈라졌더라도 그 이혼이 가령 어느 나라에서 볼 수 있는 결혼지참금 여부로나 식사를 태운 데 대한 분노의 이유만으로나 기타 등등의 아주 사소한 일 때문이라든지 이런 이기적이고 자기의 욕심을 위하여 악용되어서는 안될 것이기에 그냥 혼자 지내거나 할 수만 있으면 다시 재결합하여 화합된 한몸을 이루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7장 12-16절에서 다루고 있는 이혼 문제는 이렇게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는 대원칙 속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12-14절에서 부부 중에서 그리스도인이 이혼을 원하나 불신자가 이혼을 원하지 않을 경우를 말합니다(12-14절). 만일 어떤 믿음의 형제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아내와 살고 있을 때 그 아내가 남편과 함께 계속해서 살기를 원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경우 믿음의 남편은 분명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아내로 인해서 적지 않은 고통을 겪게 됩니다. 믿음의 남편이 온전히 그리스도께 헌신하여 사는 일에 믿지 않는 아내가 이해하고 따를 리가 만무합니다. 당연히 신앙생활과 관련하여 사사건건 부딪히기 마련입니다.

 

가령 우리 나라의 경우 조상의 제사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심각한 대립에 놓여 있습니다. 믿음의 남편은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일에 집중하나, 믿지 않는 아내가 시부모와 친척을 따라 조상에게 제사를 드린다고 하면, 이는 단지 아내의 임무와 역할로만 돌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남편이 주일에 예배의 삶을 온전히 가지려고 하는데, 믿지 않는 아내가 남편을 종용하여 야외놀이를 가자고 할 경우 가정의 화목과 아내 사랑, 가족 사랑을 빌미로 따라 나설 일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4-38). 당연히 가정의 화목은 깨어집니다. 그것으로 나타나지는 극한 상황이 무엇입니까? 이혼입니다. 추석이나 설 명절이 있은 후에 이혼의 가정이 평상시에 비해서 급증한다는 통계는 이제는 놀랄 일이 되지 못하며 따라서 이런한 현상에 대하여 사람들은 충격을 받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은 어떤 입장을 분명히 취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믿지 않는 아내가 이혼을 원하지 않을 경우 믿음의 남편은 그 아내가 남편과 함께 살기를 원하는 한에는 아내를 집에서 쫓아 내보내거나 이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남편이 믿지 않는 여자를 아내로 맞이할 경우 그와 같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습니까? 그렇게 까지 나올 줄을 전혀 몰랐습니까? 아닙니다. 충분히 예견된 일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남편은 믿지 않는 아내와 헤어져서는 안됩니다. 믿지 않는 아내가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한 몸을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믿음의 남편은 믿지 않는 아내로 인해 겪는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 사실 그 고통은 믿지 않는 여자를 아내로 맞이한 데 따른 것이기에 자신이 만든 고통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통은 처음부터 불신자로서 부부의 연을 맺은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 교회는 주께서 주신 복음을 통해서 부부 중 남편이나 또는 아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시 고린도 지역의 결혼 문화의 여건은 이혼의 요구를 남자 쪽에서만이 아니라 여자 쪽에서도 요구하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경우 부부가 모두가 아닌 한편만일 경우는 당시 고린도교회가 처한 문화적 풍토 속에서 금욕주의에 의한 것이든 또는 방탕한 삶에 의한 것이든 이혼이 요구될 경우 음행을 한 연고 외에는 다른 이런 저런 이유를 가지고서 그리스도인은 갈라질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바울은 말합니다.

 

왜 그래야 하는가에 대한 참으로 중요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만일 믿음의 남편이 이혼으로 나갈 경우에는 믿지 않는 아내가 믿음의 남편의 도움으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 것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믿지 않는 아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구원받을 기회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라"(12절)고 하면서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14절)고 말하였습니다. 믿지 않는 아내가 믿음의 남편과 함께 계속해서 살기를 원하는데 이혼을 한다면, 아내의 구원을 외면하는 꼴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이혼으로 인한 폐해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자녀에게로까지 확산됩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인 남편이 그리스도인이 아닌 아내와 살고 있을 때 믿지 않는 아내가 이혼을 원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믿는 자인 남편이 부득불 이혼으로 나갈 경우에는 그 자녀들마저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할 기회를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녀들이 부모와 함께 산다고 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 안에서 자녀들도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여 죄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음의 형제는 심각히 고려하여 가족의 구원을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이것은 아내가 그리스도를 믿으나 남편이 믿지 않는 경우에서도 동일합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한 여자와 결혼하는 것은 그 두 사람이 서로 상대방에 대하여 갖는 마음이 사랑으로 불타서 이든 또는 다른 의도에 의해서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란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란 의미이기도 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 속에 개입하셔서 그들이 짝을 이루어 둘이 한몸이 되도록 하시는 결혼을 주관하여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이때 이 결혼을 주관하신 하나님은 이로 인해서 이루게 된 가정사에도 말씀으로 간섭을 하셔서 주관을 하십니다. 그것은 두 사람이 합력하여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특성을 지닌 가정을 세워나가는데 돕는 일을 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아내에게서는 남편이 필요한 것이고 남편에게서는 아내의 협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믿는 자의 남편과 믿지 않는 자의 아내로 되어진 부부 관계에서도 그대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믿는 남편으로 인하여 믿지 않는 아내가 구원받을 수 있고, 믿는 아내로 인하여 믿지 않는 남편이 구원받을 수 있고, 믿는 부모로 인하여 그 자식이 구원받을 수 있게 하십니다.

 

그런데 15절에 이르면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뜻으로 하고 있는 말입니까? 얼핏 보아 생각하면,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이혼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구나 라고 말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니까 이혼을 해도 된다는 것으로 말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이혼을 안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혼을 해야만 할 상황이면 이혼을 해도 상관이 없다."는 말을 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앞의 구절과의 연계에서 보아야 합니다. 믿는 자의 남편이 믿지 않는 아내가 남편과 함께 살기를 원하면 이혼을 요구하지 않는 것은 아내가 남편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게 되어서 거룩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믿는 자의 남편을 이용하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 아내에게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15절에서는 정반대의 형편에서 이혼이 요구되는 경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가 그리스도인인 아내나 남편에게 헤어지기를 원할 경우이죠. 이 경우는 어떻게 할 것을 말하고 있는가 하면 "이혼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그리스도인이 아닌 남편이나 아내가 그리스도인인 아내나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할 경우는 반드시 이혼을 안 할 필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이혼을 해야 할 때는 이혼을 해도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이혼을 허락하거나 부추기는 말로 잘못 적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바울의 이 말은 사실은 이혼 여부를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설사 이혼을 해야만 하는 경우에 처할지라도 거기에 연연하지 말고 누구의 구속을 받아서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 구속을 받는 관계가 아닙니다. 남편에게서 아내는, 그리고 아내에게서 남편은 서로 상응하는 자로서 돕는 관계이지 상대방에게 구속되어서 지배하고 지배받고 하는 소유의 개념이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는 둘 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나님의 소유된 자로서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 둘을 하나님께서 짝지어 한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가 믿는 아내나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바울은 말입니다. 전혀 결혼한 사실에 개의치 말라고 말합니다.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와 함께 살든 아니면 함께 살지 않든지 간에 믿는 자는 하나님의 소유된 하나님의 것에서 달라지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그래서 자신을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자로 인정하지 않을 때 굳이 그를 억지로 붙들어 둘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를, 그리고 그들의 자녀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하시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반드시 믿는 남편으로 인해서 믿지 않는 아내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믿는 아내로 인해서 믿지 않는 남편이 반드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그리고 믿는 부부로 인해서 그 자녀들도 반드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남편이나 아내로 인해서 믿지 않는 아내나 남편이, 그리고 자녀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도 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가 믿는 아내나 남편으로 인해서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그 이름을 믿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가 갈라지기를 원하거든 갈라지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면 여기에 더 이상 그에게 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으로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고전 6:14-16)의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를 섬기면서 또한 하나님도 섬기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지 않는 한에는 믿는 자가 갈라서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비록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일치가 되지 않는 것이 대원칙으로서 함께 부부로 살아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에게 믿는 남편이나 아내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게 하여 그에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을 수 있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만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가 이혼을 요구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수 있는 것을 마다하여 거부할 경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자가 같이 살 것을 고집할 경우 결국 믿는 자인 남편이나 아내가 믿지 않는 자인 아내나 남편과 같이 지낸다고 해서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이럴 경우는 갈라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결혼과 이혼이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결혼이란 둘이 한몸이 되게 하신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부득이한 이혼이란 것도 자기 욕심을 따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성전 된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벨리알을 함께 섬길 수 없듯이 믿는 자가 그 마음이 나뉘어서 하나님도 섬기고 믿지 않는 남편도 섬기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나 남편 중 한편을 주인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 된 남편이나 아내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어서 구원을 받지 못한 아내나 남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여야 합니다. 그래서 그도 구원을 받아 하나님을 섬기는 한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까닭에 믿지 않는 자와 결혼을 했을 경우 그가 함께 살 것을 원할 경우 그에게 구원받을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경우에 있어서 결혼이란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하는 기회로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결혼이나 이혼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어 모으시는 방편이요 하나님을 섬겨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의 나라됨의 거룩한 모습입니다. 이를 서로 인정하고 가정을 이루는 것이 결혼입니다. 그리고 이 거룩됨을 음행이나 고의적 유기로 훼손시키코자 할 때 이를 지켜 나가게 하신 것이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허용하는 이혼입니다.

 

이제 정리해 가며 결론을 이끌어 나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결혼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인된 남자를 부모에게서 떠나 한 여자와 합하여 둘이 한몸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결코 나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말입니다. 죄로 부패한 사람의 악함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하나님께서 한몸 되게 하신 대원칙을 깨뜨리는 일을 합니다. 그것이 이혼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는 사람은 여기에 아무런 죄의식과 책임을 갖지 않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과연 그럴 수 있는가 할 때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혼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깨뜨리는 일을 결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에게서도 죄는 작용하며 그래서 힘있게 활동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이혼하는 가정을 흔치 않게 봅니다. 더욱이 한편이 그리스도인이며 한편은 비그리스도인 인데 이혼하는 가정이 아니라, 남편과 아내 모두 그리스도인인데도 이혼하는 경우가 흔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는 것이 대원칙인데도 불구하고 사람에게서 나오는 악한 죄성은 이를 따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혼을 합니다.

 

이혼의 사유로 이런 저런 이유를 듭니다. 통계청의 발표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성격 차이가 가장 큽니다. 그런가 하면 가족간의 불화가 이혼의 이유가 되기도 하며 배우자 부정이 이혼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배우자의 부정은 다른 이유에 비해서 현저히 적습니다. 2004년의 통계의 결과 7.0%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음행의 연고 외에 다른 이유로 사람들은 이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모든 사람들은 이혼의 이유를 안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그 마음에 음행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혼을 당하지 않거나 이혼을 하지 않을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말이죠. 꼭 어떤 이혼 사유가 될만한 것이 있어서 배우자와 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은 이혼 사유를 변명으로 내세우지만 실은 아주 사소한 것 가지고도 헤어지며 전혀 이혼 사유가 될 것이 아닌 것 가지고도 헤어지는 일을 서슴없이 합니다. 대개는 자기 욕심이 작용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혼을 할 경우에 모세가 이혼 증서를 써주도록 한 까닭은 사람의 완고하고 악한 마음을 알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이라고 하면서 그것은 본래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또한 누구든지 음행을 한 까닭이 아니고서는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간음을 하는 것이라고 하여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는 일을 하는 악함을 책망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이혼을 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이혼을 할 수 없습니까? 사실 이런 식으로 질문을 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어떤 한 남자와 어떤 한 여자가 어떠한 과정으로 결혼을 하였든지 간에 하나님이 짝지어 둘이 한몸되게 하신 것을 사람이 나누는 일을 할 수 없는데 이를 사람이 나누는 일을 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이 이혼을 할 수 있느니 없느니를 판단하고 다루어 갈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악한 죄인은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행동을 서슴치 않습니다. 그래서 이혼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혼을 할 수 없습니까? 그리스도인도 이혼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은 잘하는 짓이 아닙니다. 분명히 완고하고 악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 음행한 연고를 들고 종교적인 이유를 들어서 이혼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하십니까? 그러한 그 자신도 이혼을 당할 고소를 당할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항상 마음에 음행을 품고 사는 것이 악한 죄인의 본성이며 항상 하나님과 함께 또 다른 주인도 섬기며 두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이 악한 죄인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누구를 고소하고 누가 누구에게 이혼을 요구할 수 있는 의로운 자리에 있겠습니까?

 

모세가 사람의 마음이 완악한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사람이 아내와 이혼을 할 경우에는 이혼증서를 써주어서 하라고 하였고, 사도 바울이 비그리스도인의 남편이 그리스도인의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하면 결국 그 아내가 그대로 남편과 같이 지낸다고 해서 남편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헤어지라고 하였지만 말입니다. 이 모두에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이혼하려고 하느냐는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행동하는 위법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가령 다른 사람과 다시 결혼하기 위해서 그동안 함께 살았던 아내와 그렇게 쉽게 헤어질 수 있느냐는 것이죠. 또는 남편이 경제적으로 무능하기 때문에 그 고통을 덜어버리려고 그동안 함께 살았던 남편과 헤어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말입니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는 대원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빛과 어둠이 함께 공존할 수 없는 것이 대원칙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이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요 또한 믿는 남편이나 아내를 인하여 믿지 않는 아내나 남편을,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을 구원할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말입니다. 이혼을 할 수 있는 이유가 있으며 또한 모세와 사도 바울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듯이 능히 이혼을 할만한 이유가 있으면 이혼이 허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는 자는 그 결과를 하나님에게 맡기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용서하는 마음을 품고 이혼을 할 지경에 이른 그 상황으로 인해서 생긴 고통과 번민의 짐을 지고 나감으로써 한 아내의 남편으로 있으며 그렇듯이 한 남편의 아내로 있는 것이 다름 아닌 돕는 배필인 부부의 관계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신 것 같이'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 6-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우리가 먼저 주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여 베품으로써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누리게 된 은혜가 남편을 통해서 아내에게로, 그리고 아내를 통해서 남편에게로, 그리고 부부를 통해서 그 자녀에게로 확대되어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도 이혼을 할 수 있느냐 라거나 또는 이혼을 할 수 없느냐는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도 이혼을 한다는 문제에 직면하는 것입니다만 과연 이혼을 할 경우에 즈음하여서 그리스도인이 갖는 신앙적 자태는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행동을 하는 것이겠는가 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의 주가 되시고 그러한 우리를 한 남자와 한 여자로 만나게 하여 결혼을 하게 하여 가정을 꾸리게 하시면서 갖는 중점적인 관심은 남편의 구원이요 아내의 구원이며 자녀의 구원에 있기 때문에 그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게 하시는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서 한 남자에게로 여자를 이끄신 것이요 한 여자를 남자가 맞이하게 하신 것이요 그리고 자녀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과연 남편으로 인해서 아내가 구원을 얻을는지 아내로 인해서 남편이 구원을 얻을는지 이 부부로 인해서 그 자녀가 구원을 얻을는지는 알지를 못합니다. 구원을 얻을 수도 있고 구원을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남편은 아내에게로 아내는 남편에게로 부모는 자녀에게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전파를 위해서 보냄을 받은 자의 위치에 있어서 구원의 기회를 얻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서 각각 맡은 자로서의 역할을 남편 또는 아내로 있는 자기가 있는 위치에서 다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남편을 아내를 자녀를 하나님과 화목시키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신 것 같이 또한 우리도 가정을 이루고서 살아가면서 갈라지게 하는 이혼 사유가 될만한 악한 죄가 발생할 때 불행한 그 짐을 지고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남자를 지으시고 또한 그의 몸에서 여자를 나오게 하여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임을 알게 하시면서 이를 원리로 세워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어 돕는 배필이 되게 한 것입니다.

 

이혼!,

 

그리스도인도 이혼을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허용(허락)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패한 죄성을 지닌 사람의 마음이 완고하고 악한 까닭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합당한 사유를 제시하며 이혼을 할 수 밖에 없음을 법으로, 또는 종교적 이유로 호소하는 데요. 만물보다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인데 누가 여기에 비난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분명하잖습니까? 이혼, 이것은 성경을 통해서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뜻이겠습니까? 아닙니다. 결혼한 남편이 아내에 대하는, 그리고 또한 아내가 남편에 대하는 자세에 있어서 진정한 하나님의 뜻은 "주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심같이 또한 너희도 자신을 주라"는 데 있습니다. 아내에게서 남편은 그런 자입니다. 남편에게서 아내도 그런 자입니다.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남자에게로 여자를 보내고, 남자는 부모를 떠나 그 여자를 맞이하여 나가게 하여서 하나님이 짝지어 둘이 한몸되게 하신 관계로 유지되어서 화목케 하라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는지를. 그러나 말입니다. 만일에 할 수 없이 부득이하게 이혼을 하게 되더라도 그래서 혼자가 되더라도 그는 주님만을 섬기는 사랑에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그의 영혼[생명]은 구원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결혼이나 이혼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진정 참으로, 그리고 언제나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 부딪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인도와 도우심을 따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는데 있습니다(고전 7:17). 그렇다면 말입니다. 결혼한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가족에 대하여 갖는 진정한 자세는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주님이 자신에게 하신 것을 그대로 따라서 자신이 희생된 것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며 그분의 베푸신 사랑을 힘입어 살게 하는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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