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재호 목사 Pro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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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예배와 예배갱신

 

김영재 /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1. 예배의 전통과 토착화

 

한국 교회가 100여년을 자라 오는 가운데, 신학과 실천에서 한국 특유의 것으로 발전하게 된 것들이 있다. 그러한 현상은 특히 예배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 보인다. 한국 특유의 것으로 발전한 것 가운데는 물론 긍정적인 것도 있고 부정적인 것도 있다. 예배에서 볼 수 있는 부정적인 요소는 극복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에서 구약과 신약의 계속성(繼續性)과 단절성(斷絶性)에 대한 신학적인 이해를 잘 정립하고 정리하지 못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도 그러하고, 무속적(巫俗的)인 민속 신앙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예배와 예배 인도자에 대한 이해에 구약적인 요소와 일반 종교적인 요소가 다분히 있음을 발견한다. 흔히 강단을 제단이라고 하는가 하면 예배를 ‘제사’라고 표현한다. 예를 들면, “새벽 기도회를 갖는다”를 “새벽 제단을 쌓는다”, 기도를 “기도의 제단”이라고 하는 표현 등이 그러하다. 따라서 목사를 제사장으로 이해하고, 중보자적 존재로 인식한다. 평신도와는 구별된 신분으로 이해하여,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떠받드는가 하면, 초인간적으로 역할하고 활동하는 사람으로 살기를 요구하며,  그렇게 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목사도 휴식을 충분히 취해야 한다든지, 설교하고 가르치기 위해서는 지식을 얻고 충분히 준비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일에는 인색하다. 적어도 예배에서는 목사가 평신도와는 완전히 구별된 거룩한 사람으로 역할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기대한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의 예배는 예배를 제사로 혹은 예배 인도자를 제사장으로 이해하는 편으로 정착되어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종교개혁의 이해와는 달리 부정적인 방향으로 토착화가 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예배의 토착화라고 할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기독교가 전래되기 이전에 우리에게 종교적인 의식으로는 무속적인 의식이나 불교적인 의식이 있었을 뿐 기독교적 예배는 없었다. 그러므로 한국적인 혹은 토착적인 기독교 예배라는 개념은 성립되지 않는다. 예컨대, 한국의 민속 종교인 무속 종교의 강신(降神)굿 형식을 예배에 도입할 수 있다든지 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기독교의 예배는 우상이나 잡신을 섬기는 종교 의식과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위 예배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세계와 역사를 주관하시며, 죄를 범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와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셨으며,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재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시며 창조와 섭리와 우리의 구원과 성화를 위하여 역사(役事)하시는 성령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 삼위 하나님께 기독교적인 의식으로 예배한다고 할 때, 우리는 서양의 기독교와 함께 전수 받은 예배 의식에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서양 기독교의 전통이 단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배 형식 역시 획일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예배가 그러한 다양한 예배 의식의 하나를 택하거나 나름대로 다양한 예배 형식의 하나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예배의식은 성경적이요 전통적인 것임에는 변함이 없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 예배는 성경적이요 신학적이어야 한다. 예배는 신되어야 한다. 종교 개혁자들은 중세 교회의 제도와 정치 및 신학의 개혁을 주창하면서 우선적으로 시도한 것이 예배의 개혁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루터는 예배 의식에서 성경에 위배되지 않는 것은 허용한다는 데 반하여, 칼빈은 예배는 성경적이어야 하고 신학적으로 충실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 점에서 칼빈은 루터보다 더 철저하였다. 칼빈은 예배와 모든 교회 생활이 성경에 합하는지를 검토하고 철저히 비판하면서, “명령받지 아니한 것은 자유로이 선택할 수 없다”는 태도를 취하였다. 이와 같이 예배의 개혁을 두고 대표적인 두 종교 개혁자는 약간의 견해 차이를 보였으나, 예배에서 비성경적이고 비신학적인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는 데에는 생각을 같이 하였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예배에 비성경적이며, 비신학적인 요소가 있다면, 그리고 그러한 방향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요소가 있다면, 마땅히 제거되어야 하고 갱신되어야 할 것이다.

 

2. 예배 갱신의 방향과 한계

 

한국 교회의 예배가 갱신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예배 갱신의 방향을 양극단으로 제시한다. 보다 예전적(例典的)인 형식을 갖추는 방향과 형식을 벗어나 더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대조적이다. 예전적인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이들은 한국 교회의 예배는 집회이지 예배가 아니라거나 불완전한 예배로 규정하는가 하면, 자유롭게 예배하는 것을 주장하는 이들은 종래의 예배가 형식적이어서 생동성이 없고 감동이 없는 예배라고 단정한다. 양편이 다 종래의 예배를 온통 부정하는데, 그럴 수는 없다.

 

예배의 갱신 혹은 개혁을 논하면서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칼빈이 지적한 바와 같이, 아무도 특정한 예배 형식을 포준적인 형식으로 주장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목회자는 예배의 요소가 비성경적이 아닌 한에 있어서는, 예배 형식의 원리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고, 예배자들이 이해하는 지를 생각하고 덕을 세우는 일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성경은 예배형식이 어떠해야 함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가 어떤 갱신해야 할 요소를 지녔다고 하더라도, 예배를 인도하는 이나 함께 참례하는 성도들이 모두 나름대로 신령과 진리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두고 비판적인 말을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므로 조심스럽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 역사에서 예배는 소위 다락방식 예배에서 예전적 예배로 발전하였다. 신약 성경 안에서도 그런 흔적을 발견하다. 여기서 발전이란 말은 반드시 보다 나은 방향으로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중세 교회의 예배를 지나치게 번거로운, 형식적인 예배로 이해하고 초대 교회의 보다 단순한 형식의 예배로 회복하려고 하였으며, 비성경적이고 비신학적인 요소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예배를 예전적인 형식으로 짜임새 있게 잘 갖춘다고 하여 예배가 “완전한 예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죄인들이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 앞에 완전한 예배일 수가 없다. 반면에, 형식을 벗어난 자유로운 예배가 영적인 진정한 예배임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형식을 갖추지 않은 예배는 얼마든지 무질서한 예배로 실추될 수 있다. 우리는 다만 화목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고 우리의 부족한 예배를 사랑과 자비로 받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쁨으로 예배한다. 그러므로 예배 형식의 갱신에는 한계가 있다. 예배 형식의 갱신은 소극적인 의미를 가질 뿐이다. 따라서 예배에서 비성경적이 비신학적인 요소를 제거하는 일이 예배 갱신의 중요한 과제임과 동시에 예배 형식은 다양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예배가 우리의 삶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면, 적극적인, 진정한 예배 갱신은 우리의 삶의 갱신과 개혁을 포괄하는 것이다.

 

예배는 여러 교파 교회에서 그들의 신학을 따라 형식을 다소 달리한다. 그러나 예배 형식이 다양함은 신학적인 배경뿐 아니라 문화적인 배경의 차이에도 기인한다. 선교하는 교회의 예배 형식이 피선교 교회에 그대로 이식이 되지 않는 것도, 다시 말하여, 선교지에서 토착화가 이루어지는 것도 그러한 까닭에서다. 미국에는 백인들의 교회와 흑인들의 교회가 거의 별개로 나뉘어 있다. 백인들과 흑인들은 각자가 서로 다른 문화적인 유산과 배경을 가지고 있다. 양자의 음악이 다르고 정서가 다르다. 그래서 그들의 예배에는 그러한 문화적인 배경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북구와 서구의 백인들은 대체로 조용히 차분하게 예배한다. 그들의 고전적인 음악과 연극과 연주회의 분위기를 보면 그 이유를 알 만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흑인 교회에서는 열광적으로 예배를 드린다. 손뼉을 치고 몸을 흔들며 찬송한다. 설교자의 설교에 회중은 자주 “아멘, 할렐루야”로 화답한다. 혹은 노래의 후렴을 부르듯 구호를 외치며 호응한다. 그러한 예배는 아프리카 교회에서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들에게서 조용하고 차분한 예배를 기대한다는 것이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같은 백인이라도 정열적인 음악과 춤과 카니발의 문화를 가진 남구의 히스파니아계 백인들은 훨씬 열정적으로 예배를 드린다. 오순절 운동이 남미와 아프리카에서 많은 호응을 얻고 잇다는 점도 이러한 문화적인 배경이나 사람들의 기질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 교회의 예배 형식 역시 문화적인 영향으로 말미암아 어떤 특징을 갖게 된 것임을 인식한다. 무속 종교가 문화의 바탕이 되어 있다고 하나 유교 및 불교가 우리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라면, 우리는 백인들처럼 조용하고 차분한 예배에 익숙할 수 있는 문화적인 배경을 가진 민족이다. 군자(君子)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라는 유교적 가르침을 받아 왔을 뿐 아니라, 양반 행세와 제사의 형식에도 익숙하며, 불교적인 조용한 명상에도 생소하지 않다. 동양화나 아악(雅樂)이나 대중들이 좋아했던 창(唱)이 다 정적(靜的)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 문화에는 신나는 대중적인 농악(農樂)도 있으며, 무속 종교에서 가무(歌舞)를 특징으로 하는 무당굿도 있어서 우리네 사람들에게는 종교적 열광으로 치달을 수 있는 충동도 잠재해 있다.

 

한국에는 신학적인 색깔을 달리하는 여러 교파 교회가 있다. 그리고 우리의 문화는 변모되고 있음을 인식한다. 이제 우리는 흑인들의 발랄하며 원색적인 음악이 미국사회와 온 세계의 대중 음악이 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 유의 대중 음악에 열광하는 세대에게는 이제 흑백이나 황색의 구별이 없다. 그런 음약에 익숙한 세대에게는 조용하고 차분한 예배는 진부한 예배일 것이다. “찬양과 경배”식 예배는 그러한 세대를 위한 예배인 것 같다. 그런데 교회안에는 이러한 신세대(新世代)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소위 구세대(舊世代)도 있다. 그래서 세대들이 따로 모여 드리는 예배는 다양하다. 그러나 교회의 지체들이 모두 함께 드리는 공예배의 형식은 노회와 총회의 유대를 존중하는 가운데 신학에 근거하여 결정되어야 한다. 맹목적인 예배 갱신은 곧 신학의 수정(修正)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예배의 갱신은 그 형식의 갱신이지만 예배의 참 뜻을 이해하고 추구하는 것이 선결 문제이다. 진정한 예배는 예배라는 단의 뜻을 풀이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옳게 아는 데서 이해할 수 있다. 구원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천지 만물과 우리를 지으신 거룩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주의 날에 안식의 축복을 누리며 예배한다. 화목 제물 되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을 주시며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 예배한다. 감사함으로 예배하며,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함으로 예배하며 말씀을 청종(聽從)하는 거룩한 삶으로 예배한다.

 

계시 종교인 기독교 예배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요소와 우리가 하나님께 아뢰는 요소로 구성된다. 아룀, 즉 드림에 중점을 두나 청종이 없는 예배는 이방 종교의 예배이다. 중세교회의 예전적인 기도에 치중하는 예배나 오늘날 일부 교회의 찬양에 치중하는 예배가 둘 다 말씀은 소흘히 하고 아룀에 치중하는 예배이다. 우리는 예배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과 우리가 화답으로 드리는 기도와 찬양이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점들을 염두에 두면서 한국교회의 예배에서 비신학적인 부분은 갱신되어야 할 것이므로 먼저 특이한 점들을 지적해 보기로 한다.

 

3. 한국 교회의 예배 장소

 

1) 예배당의 외양

 

예배는 어디서나 드릴 수 있는 것이지만, 예배당은 정착된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생기게 된 것이다. 서양에서 예배당 건축은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부터 있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곳 예배당의 건축 양식들은 유럽의 문화적인 전통 속에서 신학적인 이해를 따라 발전되어 온 것이다. 동방 교회의 건물은 비잔틴 문화권에 속한 것이어서 서 유럽의 건축 양식과는 또 다르다. 서유럽의 교회 건물들로 말하자면, 고딕의 바실리카(Basilika)식에서부터 중세의 로마네스크식, 고틱식, 르네상스식, 바로코식 혹은 네오고틱식과 현대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 모든 양식들은 각기 그 시대의 정신을 대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고려하지 않고, 좋아 보이는 양식(樣式)이면 무분별하게 그대로 모방하여 건축한 교회당들을 우리는 너무나 흔히 본다. 한국의 예배당들이 서구의 양식을 따라 건축되기 시작한 것은 1910년 경부터이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적인 배경은 서양의 역사와 문화적인 배경과는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양의 시대 정신을 대변하고 있는 역사적인 산물을 그대로 이식해 놓은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제는 우리도 예배당 건축에 대한 식견(識見)을 가질 만한 때가 된지가 이미 오래이다. 서양의 중세 시대의 고딕식을 모방한 건물을 많은 돈을 드려 자랑스럽게 세우는 일은 토착화에 대한 이해는 고사하고 문화 일반에 대한 조예나 식견이 너무나 빈약함을 드러내는 것이어서 안타깝게 여긴다. 건실하게 지은 예배당 건물은 오랜 세월을 문화적인 유산으로 남는 것이므로 지역의 건축 문화에 기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예배당 건축의 토착화를 시도한다고 예배당을 반드시 옛날 고전적 한옥 양식으로 지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한옥을 기념물로 보관할 정도로 고유한 옛 건축 양식이 사라져 가는 시점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독립 기념관이나 혹은 경주의 박물관 건물 등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적인 양식의 교회당 건물을 짓는 일은 시도해 볼만한 일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지어야 토착적인 교회당 건물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20세기의 새로운 건축 양식들은 비록 그것들이 서양의 전통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국제화되었기 때문에, 기독교와 문화의 세계성과 시대성을 고려하면서 기독교적인 특색을 나타내는 동시에 고장의 문화에 기여할 수 있는 양식을 모색하면 되는 것으로 안다.

 

2) 예배당의 내부 구조

 

예배당의 외부 구조가 서양 것을 모방해 온 것과는 대조적으로 예배당 안의 구조는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형태로 발전하였음을 관찰한다. 목사게 제사장이라는 비 개신교적인, 아니 중세적이며 구약적인 사상에 걸맞게 발전하였다. 전통적으로 예배당의 전면에는 성찬상이 있었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이를 제단(祭壇)이라고 불렀다. 성찬의 화체설을 믿고 목사를 제사장이라고 주장하는 로마 카톨릭에서는 여전히 제단이라고 한다. 설교 강도상(講道床)은 예배당 중간 옆에 있거나 전면 옆쪽에 있었다. 주로 일부 개혁주의 교회와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고교회적(高敎會的)인 의식을 배제하고 설교 말씀을 존중히 여기면서 예배를 드린다는 뜻에서 강도상을 가운데 두고 모든 치장을 단순화하고 있다. 예배당이 지성소와 성소로 나뉘고 지성소에 해당하는 안쪽 중앙에 제단이 놓이는, 이중적인 예배 공간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에서였다.

 

한국 예배당의 강단 구조는 미국의 장로교회 혹은 복음주의 교회에서 유래된 것이거나, 아니면 유사하게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예배당에서는 목사가 회중에게 가까운 나지막한 아랫단에서 서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한다. 목사의 등뒤로 위쪽에는 성가대가 회중을 마주 보고 앉는다. 한국교회에서는 목사가 아래의 본래 강단을 그냥 둔 채로 윗강단을 점한 것이다. 그 바람에 강단은 이중화되었다. 강단을 제단이라고 하여 신성시(神聖視)하는 데에서 한국 교회의 강단은 자연 이중 혹은 삼중 강단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예배의 공간이 이분화(二分化)되었다. 회중을 향한 강단 가장 자리에 울타리를 치거나 줄을 침으로서 강단을 성역화하고 있는 예배당도 흔히 볼 수 있다. 많은 교회에서 강단에서 여전히 신을 벗는 것도 그런 의미를 지닌다. 이중 간단과 강단의 성역화는 예배 공간의 이분화를 초래한다. 그것은 또한 교권주의의 조장과 교계주의화(직분의 계층화)를 뒷받침하며 가르친다. 그 뿐이 아니다. 강단 안쪽 벽에 걸린 휘장은 한국교회에서만 볼 수 있는 것으로 구약 시대의 성전의 휘장을 연상케 한다. 예배 인도자가 앉는 높은 등받이 의자는 혹시라도 보좌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는가 싶어 두렵고 송구스럽다. 강도상을 가운데 두게 된 복음적인 개신교 교회 본래의 취지와는 전혀 달리 발전한 것이다.

 

유럽과 미국의 교회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예배 인도자가 회중이 있는 곳에서 강단으로 접근하게 되어 있다. 예배 인도자는 회중의 한 사람이며 회중을 대표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어떤 교회의 예배당에서는 목사가 회중이 있는 장소를 거치지 않고 강단 위 옆문이나 뒷문을 통하여, 혹은 강단 휘장을 가르며 강단으로 나타나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접근은 강단을 성역화(聖域化)하다 못해 무대화(舞臺化)하는 격이 된다. 강단이 무대화가 되면 강단은 현실과는 분리된 공간이 되고 회중은 참례자 아닌 관객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서양의 교회에서 강단 안쪽 중앙에 성찬상을 두고 있는 예배당인 경우 예배 인도자가 서는 곳은 높지 않다. 그러나 설교하는 강도상은 높이 두고 있다. 기도와 찬송은 하나님께 올리는 것이며 설교는 위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임을 상징화하는 것이라고 본다.

 

한국 교회 예배당의 강단이 성역화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비스럽고 엄숙한 분위기는 조성되지 못하고 있다. 말씀을 선포하는 강도상은 강단 중앙에 넓고 크게 놓여 있는 반면에 성례를 집행하는 기물들, 즉 성찬상은 눈에 드러나게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성찬상을 강도상 아래쪽에 두고 있을 경우에도, 그것이 또 하나의, 즉 제이, 혹은 제 삼의 강도상으로 쓰이거나 다용도 탁자로 사용되고 있어서 성찬상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를 전달하지 못한다. 그 뿐 아니라 서양의 예배당에서는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세례를 위한 물을 담는 세례대를 한국 교회의 예배당에서는 거의 볼 수 없다. 침례교회의 경우는 강단에다 욕조(浴槽)를 두고 있다. 교회의 표지(標識)가 말씀의 선포와 성례의 집행이라면, 그것을 위한 기물은 교회의 표지를 상징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말씀 선포와 성례 집례를 위한 기물을 고루 갖추는 것이 바람직하다.

 

4. 한국 교회 예배의 성격

 

1) 한국 교회의 예배 형태

 

한국 교회의 예배는 사경회 혹은 부흥회 집회 식의 예배가 그대로 정착된 것이라고 흔히 말한다. 그것은 예배에 평신도가 기도한다거나 예배 진행에 있어서 예전의 부분이 적은가 하면, 예배진행자의 개인적인 인도에 예배가 많이 좌우되고 있는 점에서도 그러하거니와 지나치게 설교 중심의 예배라는 점에서 그러하며, 전체적인 예배의 성격과 분위기도 그러하다. 주보에 예배 인도를 사회라고 하고 있는 것도 그런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성례는 자주 행하지 않으면서 설교 중심으로 예배해 왔기 때문에, 교인들은 예배 드리는 것은 곧 설교 말씀 듣는 것으로 생각할 정도로 설교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예전(Liturgy)의 순서는 말씀을 듣기 위한 준비 행위처럼 생각하는 경향이다. 그래서 예배를 드림으로 갖게 되는 경건한 마음과 은혜를 받았다는 충족감은 그 날의 설교가 좋았느냐에 좌우된다. 한국교회가 개교회주의(個敎會主義) 경향으로 치닫기 시작한 것은 1950년 이후였다. 감독 정치 제도를 가진 감리교회는 물론, 장로교회도 교구제도적 교회로 성장해 왔었는데, 1950년대 이후 교회의 분열로 인하여 교세 확장 경쟁이 시작되고 교파 교회와 교단들이 난립하면서, 그리고 6.25 동란으로 인하여 생겨나게 된 무지역 노회가 생겨나면서 교구 제도적인 교회 제도가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각 지역의 개 교회들은 서로 경쟁적으로 성장하는 교회가 되었으며, 많은 교회들이 대교회를 지향하게 되었다. 1970년대 이후 한국의 산업화로 인한 인구의 도시 집중화로 말미암아, 그리고 기업이나 시장의 대형화를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사회 구조의 추세를 따라,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대교회주의는 필연적으로 개교회주의를 지향하거나 유발하게 되는 것인데, 교회가 대교회가 될 수 있는 결정적인 요인은 유능한 설교자를 가지는 것이었다. 예전과 설교, 또한 설교와 성례의 균형을 갖추지 못한 예배로 말미암아 교인들은 교회 공동체의 지체 의식을 가지기보다는 좋은 설교를 찾아서 쉽게 교회를 옮기는 이기적인 교인들이 되었다. 그런 교인들이 많아지게 되면서 회중교회 유형의 대교회들이 설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된 것이다.

 

2) 예배의 주관적 요소와 객관적 요소

 

개신교회의 신학적 전통을 말하자면 루터주의와 개혁주의(칼빈주의)를 말할 수 있는데, 이러한 전통은 예배에서도 엿볼 수 있다. 루터가 예배에서 하나님께 향한 감사를 강조한 점에서 루터교의 예배가 보다 주관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칼빈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순종을 강조한 점에서 개혁주의 예배는 보다 객관적인 면을 더 가졌다고 볼 수 있다. 한국에는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장로교회가 다수이기는 하나, 경건주의적 부흥 운동을 경험한 한국교회는 예배에서 주관적인 면을 많이 강조하는 경향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또한, 복음주의의 영향이고 특징이기도 하다. 피선교 교회에서는 복음주의적인 설교가 더 요청되는 것은 사실이다. 회개와 중생과 헌신을 가르치는 복음주의적 설교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데 더 집중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모든 본문을 실생활에 적용하려고 하는 것 역시 옳지 않다. 예를 들면, 변화산의 사건을 말하는 본문은 그대로 전해야 하는 본문이지 우리의 생활에 적요하도록 역설할 수 있는 본문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인지에 대한 말씀을 동시에 가르쳐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예배에서 주관적인 요소와 객관적인 요소가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예배에서 객관적인 진리를 많이 강조하면 주지주의(主知主義)에 기울고, 주관적인 면을 지나치게 추구하면 감정주의에 빠지며, 교리 없는 기독교를 주창한 경건주의적 약점을 드러내게 된다. 예배에는 하나님을 향한 감격과 뜨거움이 있어야 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경성하여 경외함을 가지고 경청하는 차분함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교인들이 생동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게 되어야 한다.

 

3) 예배서의 필요성

 

한국의 많은 교회가 개혁주의 전통을 존중하고 보수함을 표방하지만 예배에 대한 일정한 형식이 없다. 아마 그것은 예배의 자유로운 형식을 선호하는 미국교회의 선교사들의 영향이기도 하겠으나, 우리의 예배는 그냥 사경 집회식의 예배에서 발전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피선교 교회가 복잡한 의식을 갖추지 않고 단순하게 예배를 드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기독교의 초대 교회가 역시 그렇게 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예배의식(Liturgy)은 교회의 연륜과 더불어 더 짜임새가 있게 되었으며, 나중에 중세기에는 더 복잡하고 번거로운 의식으로 발전하게 되었음을 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예배의 순수성과 단순성을 회복하려고 초대 교회의 예배를 이상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초대 교회에서는 예배를 주로 가정 교회에서 드렸기 때문에 예배 의식이 번거로울 수는 없었지만, 모일 때마다 성찬식을 거행하였으므로 그냥 부흥집회식의 예배와는 같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성찬 예식 자체가 의식을 동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11장 23절에서 34절까지의 말씀에서 보듯이, 단순하면서도 엄숙하게 예배를 드렸던 것으로 안다. 발견된 문서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교회는 2세기 초에서부터 예배의식을 가졌고 기도서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초대 교회의 예배의식 문서들은 아닌게 아니라 당신의 신학과 신앙고백의 발전을 이해하는 일에도 크게 도움을 주는 것이다.

 

개혁주의 전통은 단순한 예배 형식을 가지는 것이지만 예배서나 기도서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었다. 많은 청교도들이나 독일의 경건주의자들이 자유롭게 기도 드리는 것을 좋아했으나, 그들은 역사적으로 예배 의식서를 가져온 국가 교회나 국민교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예배 질서의 테두리 안에서 보다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전혀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과는 무관한 채로 “자유롭게”드린다는 의식(意識)조차 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예배의 방향이 종잡을 수 없도록 발전하게 되는 것이라고 본다. 청교도적인, 혹은 부흥적이며 복음주의적인 예배의 전통을 존중한다고 하더라도, 예배의 지첨서가 될 수 있으며, 모범이 되는 기도를 수록하고 있는 예전을 가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문서화된 예배의 원리나 지침은 있어야 예배학이 성립할 수도 있다. 신앙과 신학의 표현인 예배의 원리와 실제가 목회자의 구전(口傳)이나 사사(師事)를 통하여서만 전수되어야 한다면, 예배는 신학이 될 수 없다. 우리도 초기의 청교도들과 같이 예전은 가지면서도, 거기에 얽매이지 않고 즉흥적으로 기도할 수 있는 자유를 향유할 수 있으면 되는 줄로 안다. 기도문이 있는 예전이 있으면, 즉흥적으로 자유롭게 기도한다고 하더라도, 예배 시의 기도가 바람직한 기준과 범위를 가히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칼빈이 말한 바와 같이, 자유롭게 기도한다고 할 경우도 늘 하는 말을 되풀이하기 쉬운데, 기도문이 있으면, 자유롭게 기도하더라도 훨씬 더 변화 있고 풍부한 말로써 기도할 수 있다. 예배서는 위에서 간단없이 이상한 방향으로 발전하는 예배를 바로 잡기 위하여서도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 특이한 방향으로 발전하게 된 점들이 어떤 것인가를 살피기로 한다.

 

4) 말씀 예배의 특이한 점과 유의할 점

 

(1) 예배를 시작하면서 종을 치고 묵도함으로 예배를 시작하는 것은 한국 교회에서만 보는 특이한 것이다. 종을 치는 것은 카톨릭의 전통이라고 한다. 그것은 또한 국회나 법정에서 사회자가 개회를 선언할 때 사회봉으로 두드리는 것과 비슷한 것이기도 하다. 그 뿐 아니라, 묵상 기도(묵도)로 예배를 시작하는 것도 특이하다. 아마도 예배 전에 소위 준비 찬송을 해 왔으므로 예배 시작에 조용히 기도함으로 시작의 매듭을 삼은 것으로 이해한다.

 

유럽과 미국의 장로교와 개혁파 교회 또는 많은 개신교에서는 오르간 전주에서부터 예배가 시작된다. 회중은 늦어도 10분 전에는 다 예배당에 들어와 조용히 기다린다. 시간이 되면 오르간 전주가 시작된다. 전주가 끝나면 예배 시작 찬송을 부른다. 그러면 예배 인도자가 강도상으로 가서 서든지 혹은 강단 중앙에 서서 “예배하자”(call to worship)를 말한다. “묵상 기도함으로써 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하는 것보다는, 칼빈이 즐겨 따랐던 대로,“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시편124:8). 다함께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께 예배합시다.”하는 말이 우리가 누구에게 왜 예배를 드리자는 것인지를 분명히 표현하고 있어서 더 감동적이다.

 

(2) 예배에서 헌금한 사람들의 이름을 들어 광고하거나 목사가 십일조나 감사헌금을 드린 사람을 위하여 복을 빌어 주는 것은 한국 교회 이외의 교회에서는 볼 수 없는 희한한 광경이다. 목회적인 차원에서 회중의 기복 신앙에 부응한다는 것인데 바람직하지 않다. 주보에 헌금한 사람들의 이름을 기재하는 것도 한국교회에서만 볼 수 있는 풍습으로 전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창조주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 예배에 전혀 맞지 않는 행위이다. 감사하는 사람은 받은 은혜에 그냥 절하고 감사할 뿐이다. 감사의 헌물을 바쳤으니까 또 복을 달라는 것은 진정한 감사 행위가 될 수 없다.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저급한 샤먼의 신처럼 인식하게 해서는 안된다.

 

(3) 성가대가 찬양을 할 때 목사가 강단에서 성가대 향하여 내려다보는 일도 1970년대 이후에 생기게 된 이상한 자세이다. 목사가 성가를 받아 올리는 중보 역할을 하는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으므로 바람직하지 않다. 예배와 찬양은 하나님께서 내려다보시며 받으신다.

 

(4) 강단을 많은 돈을 드려 화려하게 꽃으로 장식하는 일 역시 한국 교회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것이다. 꽃꽂이의 기법이 불교 철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므로 기독교적인 꽃꽂이를 창안해야 한다고 말하는 신학자도 있다. 무슨 뜻인지에 대한 이해를 떠나서 우선 강단을 많은 돈을 드려 꽃으로 장식하는 일 자체가 개혁주의 전통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5) 옛날에는 목사가 한복에 두루마기를 입고 강단에 섰었다. 이제는 두루마기가 가운으로 대치되어 그런 멋을 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예배에서 목사 아닌 장로와 집사들까지 가운을 입는 것은 기이한 풍경일 뿐 아니라 개혁주의 전통과도 거리가 멀다. 미국서도 보수적이며 복음적인 장로교회에서는 목사도 가운을 입지 않는다. 칼빈이 걸친 가운은 제네바 교회의 예배당이 겨울이면 너무 추워서 입은 외투, 즉 두루마기였다. 루터는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직분자이므로 교수처럼 가운을 입는 것이 좋은 것으로 여겼으나 사제복은 배제하였다. 목회자에 따라서 말씀 예배 때는 평상복을 입다가 성찬식에는 가운을 입어 예배와 성찬식을 구별한다. 그 어느 의식이 더 거룩하거나 덜 거룩한 것이 아니므로 가운을 입든지 안 입든지 하는 일은 일관성 있게 할 일이다.

 

(6) 한국 교회의 예배에서 또 한가지 특이한 것은 장로가 중재의 기도라고도 하고 목회 기도라고도 하는 예배에서 매우 중요한 기도 순서를 맡아 하는 일이다. 장로의 직분은 목사와 함께 당회를 구성하고 목사를 보좌하여 교회를 치리하는 것이다. 예배에서 목회 기도를 맡는 일은 장로의 본래적인 직무는 아니다. 장로의 기도는 길어서 예배 전체의 균형을 깨뜨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기도에서 더러는 신학적인 허점을 드러내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목회적인 문제점을 노출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목회적인 배려에서 전통을 따른다면 장로는 공기도를 옳게 하도록 배워야 할 것이다. 공기도의 지침서는 그래서 필요한 줄 안다.

 

(7) 성경 봉독의 본래적인 의미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선포하여 회중이 청종하도록 하는 데 있으므로 교독보다는 봉독이 바람직하다. 찬송은 회중의 몫이고 기도 역시 회중을 대표하여 하는 것이므로 화답식의 기도는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와 찬양인 시편을 교독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서양에서는 성경을 봉독할 때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는 말씀을 듣는다는 의미에서 회중이 일어서는 교회도 있다. 주일 저녁 예배에 혹은 수요일 저녁 예배에는 교독을 하거나 함께 읽는 것도 좋은 줄 안다.

 

(8) 성경 봉독을 제목 설교를 위하여 한 두어 절만 읽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서양의 전통은 설교 본문 이외에 구약과 신약에서 각각 한 번씩, 다시 말하면, 성경 말씀을 두 번 읽거나, 혹은 구약이나 신약에서 한 번을 읽는 것이 전통이 되어 왔다. 이 경우, 설교 본문은 설교할 때 먼저 설교 본문을 어디서 택했음을 말하면서 봉독한다. 설교 본문만을 읽는 것은 쯔빙글리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말한다. 비록 단 한 구절만을 설교의 본문으로 한다고 하더라도, 그 말씀이 포함되어 있는 문단의 말씀을 함께 봉독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한 일이다.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와 경배와 간구를 드리며, 그가 하시는 말씀을 듣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중세 교회가 성경 봉독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9) 한국 교회에서 옛날에는 십계명을 자주 교독했으나, 이제와서는 거의 하지 않는 경향인데, 예배 때마다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자주 해야 할 것으로 안다. 루터와 쯔빙글리 및 칼빈은 율법과 복음 또는 계명과 순종의 생활에 대한 각자의 이해에 따라 십계명을 예배 순서의 어디에 두느냐에 관심을 기울였다. 교인들로 하여금 윤리적인 성숙한 기독신자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서도 필요하다.

 

(10) 감사와 경배를 드리는 예배 서두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 찬송’을 불러야 된다. 신앙의 경험이나 고백의 찬송은 말씀을 듣기 위한 준비나 혹은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불러 구분하는 것이 듣기 좋다. 성가대의 지휘자는 어떤 찬송으로 송영을 불러야 할 것인지 예배에 대한 상식을 갖추어야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통일찬송가]에는 신앙 경험을 간증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하는 찬송에 비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가가 너무 적게 수록되어 있다. 시편 찬송가가 더 수록되어야 할 것이다. 예배 찬양으로 분류된 찬송들도 대부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찬송으로 편중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그것은 구원에 초점을 두는 복음주의 혹은 부흥주의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예배 찬양으로는 모름지기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들이 균형을 이루도록 편집이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통일찬송가’에는 저 천국에 대한 소망을 노래하는 찬송 가운데 많은 것을 “장례”에 부르는 찬송으로 분류한 것은 부당하다. 그 바람에 소망을 노래하는 많은 찬송들을 일반 예배에서는 기피하게 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11) 주일 공 예배 이전에 소위 준비 찬송을 하는 것은 순서를 갖춘 예배 의식에는 맞지 않는 것이다. 모든 의식이 그러하듯이 예배는 약속된 정한 시간에 모든 회중이 다 같이 모여 시작해야 의식다운 예배 의식이 된다. 미리 여러 주제의 찬송을 부르고 나면, 예배 시작에 하나님께 인사하는 경배 찬양은 별 의미가 없어진다. 그러나 작은 규모의 교회에서는 교인들로 하여금 예배하는 마음 준비를 하도록 하기 위하여 전통을 따라 하는 것도 무방한 줄 안다. 냉냉하게 앉아 있거나 잡담을 나누는 것보다는 찬송하는 편이 훨씬 낫다. 주일 저녁 예배에는, 오전에 하나님께 나와 뵈옵고 예배하였으므로, 예배 시작 전에 찬송을 불러도 좋고 예배 시작에 경배 찬양이 아니라도 무방한 줄 안다.

 

(12) 목사가 축도할 때 양손을 쳐드는 것은 유대인들이 기도할 때 취하는 자세이다. 축도자가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여 마치 자신이 회중에게 축복을 내리는 듯 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은 옳지 않다. 축도는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가,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이, 축도하면 하나님께서 예배하는 당신의 백성을 축복해 주시기로 약속하시고 명하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선포함과 동시에 그 뜻을 따라 축복을 비는 기원이다. 그래서 서양의 교회에서는 주로 민수기 6장 25절과 26절의 말씀을 따라 축도한다. “주(여호와)께서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주(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주(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한국 교회에서는 주로 고린도후서 13:13절의 바울의 기원으로 축도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있을지어다”라고 하는 말은 “...있기를 축원하나이다”하는 말과 같은 말이다. 바울이 로마서를 끝맺으면서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롬16:27)”이라고 하는 축원의 말을 “하나님께 ...있을지어다”로 번역한 것을 보면, 그 말이 단순히 기원한다는 말이지, 말하는 자의 권위를 나타내는 어법이라고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것이 권위주의적인 어감을 나타내는 것이어서 잘못된 이해를 유발한다면 쉬운 현대 말로 표현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5) 성례식에서 보는 특이한 점과 유의할 점

 

(1) 목사가 세례를 베풀 때 장로가 물그릇을 든다. 그 경우, 편의를 위하여 또한 거룩하게 여기느라고 그러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데, 물그릇이 컵 모양이어서 이상하다. 이것도 한국 교회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것이다. 세례의 물은 마시는 물이 아니고 씻는 물이다. 씻는 예식에 쓰이는 기명은 컵 모양이 아니고 대야 모양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 그릇은 세례대가 있어서 그 위에 두는 것이 좋은 줄 안다.

 

(2) 세례 집례 시의 말씀(baptismal formula)을 근래에 와서 예배 모범서에 있는 말씀을 따라 “OOO씨(혹은 에게),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하고 말하는데, 그것은 영어를 직역한 말로서 우리말다운 말이 아니다. 우리말에 “내가”는 행위자인 주격을 특별히 강조할 때 쓰는 말이다. 세례 집례 시에 집례자 자신을 특별히 강조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내가”하는 말은 생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1960년대 이전에만 하더라도 집례자가 “내가”라는 주어를 생략하고 바른 우리말로 말하였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 헌법(1962년도 판)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고 보면 근래에 와서 교적부에 세례 집례자의 난을 두어 밝히게 하는 것도 바람직한 것이 못된다. 누가 세례를 집례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에 연합하는 세례를 받은 사실이다.

 

(3) 시례 집례 후에 수세자가 세례교인 되었음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공포하노라”고 할 경우의 “...의 이름으로”는,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대로, “...의 이름을 가지고” “...을 대신하여” 혹은 “...의 권위를 위임받아” 라는 뜻이다. 그러나 집례 시의 “...의 이름으로” 할 때는 “...으로”는 “집으로 간다”고 할 때의 “...으로”같은 말로서 다른 뜻을 가진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28:19)고 하신 말씀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에 연합하는 세례를 주라”고 하는 뜻이다. 이러한 뜻이 영어역(into the name of)이나 독일어역(in den Namen)에서는 그 뜻이 분명하다. 로마서 6장3절에 있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롬6:3)이라고 할 경우  에이스+4격을 쓰고 있음에 반하여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마7:22) 할 경우에는 그냥 3격 명사를 사용하고 있다. “이름으로”라는 말이 한가지 뜻으로 이해하게 만들기 때문에 집례 시의 말씀은 실은 잘못 번역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하튼 집례자는 이 뜻을 재인식해야 할 뿐 아니라, 교인들에게도 거듭 잘 설명해야 한다.

 

(4) 한국 교회에서 세례식은 학습을 시키는 일 때문에 한 해에 두 번씩 행하는 것이 관례이나, 필요에 따라서는 수시로 행할 수도 있다. 유아 세례는 서양 교회의 경우, 생후 한 달만에 받게 하는 것이 관례이다. 그래서 매달 첫 주일에 유아 세례를 받게 한다. 어거스틴의 이해를 따르자면, 유아 세례는 할 수 있는 대로 일찍 받게 하는 것이 좋다. 우리의 경우 한 두 번 기회를 놓칠 경우, 아기는 벌써 돌을 지나게 된다. 유아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아기의 나이를 두 살 미만으로 하고 있는 것은 선교 교회라는 사정을 감안하여, 새로 믿기로 한 가정의 자녀의 경우를 고려하여 정한 것으로 생각한다.

 

(5) 세례, 특히 유아 세례의 경우는 예배 순서에서 신앙고백을 한 이후 찬송을 부르기 전후에 늦어도 설교 순서 이전에 세례를 주어 유아실로 가게 하는 것이 좋다.

 

(6) 성찬상을 보로 덮는 관습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에서 유래된 것 같다. 그러나 대부분의 구미의 교회에서는 덮지 않는다. 우리는 별나게도 ‘카버’로 덮는 문화를 가져서 덮는 것을 선호하는 줄 안다. 성찬식에서는 보자기를 열고 덮는 것도 의식(儀式)이라는 점을 인식할 때, 우리는 불필요하고 거창한 의식을 하나 더, 다시 말하면, 거두고 다시 덮는 두 번의 순서를 더 첨가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흰 보자기로 덮인 성찬상을 보는 것보다는 성찬의 기명을 직접 보는 것이 미적인 시각을 위해서나 신학적인 의믈 위하여 더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한다. 식탁을 흰 보자기로 덮어두는 경우는 별로 없는 법이다. 교회가 자주 성찬을 행한다면, 덮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은 물론이다. 혹자는 성찬상을 덮은 모습이 주님의 시신처럼 보여야 한다고 신경을 쓴다는데, 그것은 덮는 것을 가지고 신학화하려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끔찍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7) 강단에서 신을 벗는 경우, 설교할 때는 신을 벗고 하다가 성례를 집례할 때는 아래로 내려오면서 신을 신으며, 마치고는 다시 신을 벗고 강단으로 올라가는 일 등은 불합리할뿐더러 아주 어색하게 보인다. 둘 다 거룩한 예식인데 그럴 수가 없다. 성찬식에 일부러 가운을 입는 것과는 정반대 행위여서 더 맞지 않는다. 집례자가 슬립퍼를 신은 채 내려올 경우가 있는데, 회중이 신을 신고 있는 장소에 슬립퍼를 신는 것은 맨발이나 다름없이 예의에 어긋나는 행위이다. 한국의 보수적인 교회가 얼른 두 문화의 사이에서 엉거주춤하는 촌스러움을 탈피할 수 있었으면 한다.

 

(8) 성찬식에 집례자가 흰 장갑을 끼는 관례는 신구교를 막론하고 서양 교회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예식을 성스럽게 집례하느라고 흰 장갑을 끼는 것으로 아는데, 식사할 때에는 끼었던 장갑도 벗는 법이어서 이치에 맞지 않다. 성찬이나 세례를 거룩하게 집례하느라고 지나치게 의식을 갖추는 것은 중세 교회가 범한 오류를 되풀이하는 것이 된다. 중세 말기의 교회는 성찬식에서, 한가지 순서를 위하여 이중 삼중으로 기도하면서 너무 거룩하게 진행함으로써 신자들로 하여금 지나친 경외와 소외감을 가져 성찬을 기피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9) 흰 장갑을 낄 경우 집례자와 배찬을 돕는 이들은 예배 전에 미리 나누어 가져야 하고, 앉은 자리에서 장갑을 미리 끼고 성찬상에 다가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성찬 상 앞에서 장갑을 나누어 가지면 그것도 의식의 한 순서가 된다.

 

(11) 배찬을 돕는 장로들은 제일 앞자리에 자리를 같이하여 앉았다가 규모 있게 성찬상으로 나오는 것이 바람직하다.

 

6) 예배자의 예배 참석

 

우리의 예배자들은 예배 시간에 지각하기를 예사로 한다. 시간을 잘 지키지 않는 문화에 살기 때문일 것이다 오랜 기독교 문화를 가진 유럽과 미국에서는 예배자들이 늦어도 예배 시작 10분전에는 예배당에 나와 자리에 앉는다. 예배가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양하는 축제임을 인식하면, 시간을 어겨 늦게 참석할 수가 없는 일이다. 예배자는 참관자가 아니고, 왕에게 배알하는 백성이요,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잔치에 참여하는 신부임을 자각해야 한다. 시간 전에 미리 와서 자리에 앉아 예배가 시작되기를 감격과 기대를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이러한 기다림이 없이 시작하는 예배는 옳은 예배가 될 수 없다. 자리에 앉으면 예배자는 우리가 예배하려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생각해야 한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 영물들과 천사들과 온 피조물로부터 영광과 존귀와 감사와 찬양을 받으시는 하나님이심을 생각해야 한다. 자신은 그 하나님 앞에 얼마나 미천한 자이며 부정(不淨)한 자임을 새삼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지난 한 주일 동안 살게 하시며, 주일에 안식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할 수 있도록 은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 앞에 잘못한 죄를 회개하며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어 주께로 향하도록 해야 한다.

 

성가대는 모두가 유니폼 격인 가운을 입으며, 회중이 보는 앞자리에 앉아, 지휘자를 따라 일사 분란하게 합창을 하는 사람들이므로, 개별적으로 한 사람씩 들어와 앉는 것보다는 모두가 함께 질서 있게 들어와서 앉는 것이 좋다. 성가대는 예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임무를 맡고 있으므로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와 성가대가 준비를 마친 자리에서 기도하고 함께 입장하면 좋은 줄 안다. 그러면 예배 시간이 되었는데도 아직 입장하지 않는 성가대를 기다려야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7) 성찬식을 더 자주 가져야 한다.

 

한국 교회는 일년에 두 번 성찬식을 거행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다. 이것이 관례가 된 것은, 아직 한인 목사가 없던 시절에, 선교사들이 지방 교회를 일년에 두어 차례씩 순방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말이 있다. 미국의 교회들도 개척 시대에는 성찬을 일년에 한두 번만 행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근래에 와서는 예전의 회복 운동도 있으며, 성찬에 대한 인식도 새로워져서, 매달 한번씩 행하는 경향이다.

 

교회가 성찬식을 자주 행하면서 예배와 설교가 그리스도 중심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성찬을 자주 행하면 우리의 예배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중심하는 것이 될 뿐 아니라. 보다 엄숙하고 차분한 예배가 될 것이다. 칼빈이 말한 바와 같이, 성찬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으로 약속하시는 구원을 확인하는 은혜의 방편이라면, 우리의 주관적인 종교적인 만족감을 따라서만 빈도 수를 줄이거나 늘일 수는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성찬을 자주 행하지 않는 것은 권징 없는 교회가 되게 하는 요인의 하나가 될 수 있다. 수찬 정지라는 중한 징계가 유명무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5. 예배와 설교

 

1) 예배 인도와 설교

 

예배를 인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은 목사 고유의 직무이다. 전도사가 목회하는 교회에서는 물론 전도사가 한다. 서양에서는 독일의 경건주의자나, 영국의 퀘이커, 플리머스 브레드런 등과 같이 교직제도에 대하여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그룹 혹은 교회의 모임에서는 특정한 예배 인도자를 두지 않거나 혹은 지도자 격인 몇몇 신도들이 예배를 인도한다. 그러나 교직제도를 인정하는 제도적인 교회에서 목사 아닌 신도나 장로가 주일 예배를 인도하는 일은 거의 볼 수 없다. 목회자의 유고 시에 설교를 위하여 청함을 받은 손님 목사는 설교만 하는 것이 아니고, 예배 인도 전부를 맡아 한다. 우리의 경우 손님 설교자를 맞이하였을 때 부목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로가 예배 인도를 맡는 일은 옳지 않다. 손님 목사를 맞이하여 장로가 예배 인도를 하는 현실은 한국 교회가 그만큼 개교회주의적임을 대변하는 것이다. 감독 교회나 장로회의 지역교회는 감독의 관할 아래 있거나 노회에 속해 있으며, 영적인 의미에서도 지역 교회는 보다 넓은 의미의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교회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헌신 예배는 예전을 따르는 공적인 예배이기보다는 다락방식 예배로 간주한다. 헌신 예배를 청년회 혹은 여전도회의 회원이 인도하든, 목사가 인도하든, 예배를 인도하는 것 그 자체가 귀한 일이다.

 

예배는 강연회가 아니다. 강연회에서는 모든 순서가 강사의 강연을 듣기 위하여 진행된다. 사회자는 연사를 위한 보조적인 진행자일 뿐이다. 그러나 예배에서는 모든 순서가 설교와 마찬가지로 의미를 가진다. 설교가 예배의 중요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예배 순서의 한 부분이므로, 설교하는 일 보다 예배 전체를 인도하는 일을 더 중요한 일로 보아야 한다. 구약적인 개념으로 말하자면 예배 인도는 제사장의 몫이다. 그렇다면, 예배를 인도하는 이가 직분이나 신분 때문에 설교자와 동등하게 강단에 서지 않고 소위 아랫 강단을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한 일은 유독 이중 강단을 가진 한국 교회에서만 볼 수 있는 기이한 광경이다.

 

예배를 인도하는 책무는 회중을 대표하여 하는 것이므로 인도자가 직분이나 신분을 따라 차별될 수 없다. 예배가 존귀하므로 예배를 인도하는 책무 역시 존귀하다. 헌신 예배를 위하여 평신도에게 예배를 인도하도록 권한을 부여했으면, 그는 그 시간에 설교자와 더불어, 그리고 설교자에 못지않게 귀한 직임을 수행하는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굳이 차별할 수밖에 없다면 차라리 예배 인도를 맡기지 않아야 한다.

 

2) 녹화 설교의 폐단

 

설교자의 말이 서툴다거나 설교가 신통치 않다는 이유에서 보다 훌륭한 설교자의 녹음 설교를 듣거나 녹화된 비디오 테이프를 보고 들으며 예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예배는 레코드 음악 감상회와 같은 것이 아이다. 음악을 두고 말하더라도, 레코드 음악 감상회는 옳은 음악회가 못된다. 녹화나 녹음을 통하여 아무리 유명한 가수나 연주자의 음악을 보고 듣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무명의 음악인들이 벌이는 조촐한 음악회의 음악에 비할 수가 없다. 비록 수준에 못 미치는 시골 음악회라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연주자와 청중의 만남이 있으며 호흡을 같이 하는 분위기가 있어서 살아 있는 음악이 창출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기계로 재생한 음악을 흥겨움이나 서로 나누는 정감이나 박수갈채도 없이 그냥 들어보는 감상회와는 차원이 다르다.

 

음악을 두고도 그러하거든 하물며 살아 계신 하나님과 한몸을 이룬 지체들 간에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 예배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예배에서 성가대의 찬양을 녹음된 노래로 대신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설교 역시 녹음이나 녹화로 대신하는 일은 불가함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설교나 찬양을 감상거리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목회자가 엄연히 예배를 인도하면서 녹화를 통하여 특정한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듣게 하는 것은 한국의 몇몇 교회에서만 볼 수 있는 부조리한 현상이다. 그것은 특정한 설교자를 교주로 만드는 비전통적이며 비정상적인 행위이다.

 

3) 예배 안에서의 설교의 중요성

 

설교는 예배의 한 부분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예배 밖에서의 설교는 설교라기보다는 강연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거리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우리는 그냥 노방 전도라거나 전도강연이라고 한다. 요즈음 사람들은 테이프에 녹음한 설교를 즐겨 듣는다. 성경 말씀을 늘 읽어야 하는 사람들로서 설교를 수시로 들음으로써 유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많은 문제점이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설교는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을 알현하는 예배에서 옷깃을 여미고 하나님을 알현하는 예배에서 옷깃을 여미고 하나님께서 그 시간에 우리에게 필요한 영적 양식을 주시는 말씀으로 알고 경청하는 자세로 들어야 한다. 그러나 녹음 테이프에서는 설교자와 청중이 함께 하는 공동체도 없으며 의식해야 할 주변 상황도 없다. 그런 상황에서 갖는 설교 감상은 신자들로 하여금 더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교인이 되게 만든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자세를 취하여 마치 레코드 음악을 감상하거나 소설이나 드라마 낭독을 즐기듯이 설교를 듣는다. 설교 테이프를 마음 내키는 대로 골라 담소를 나누며듣다가는 중단하기를 예사로 한다. 설교를 이런 식으로 감상하듯 듣는 자세는 하나님을 거룩히 여기는 자세일 수 가 없다. 설교를 통하여 전달되는 성경 말씀은 듣고 순종하라고 주시는 말씀이지 감상하라고 주시는 말씀이 아니다.

 

좀 더 덧붙여 말하자면, 신자들은 신학적으로 색깔이 다른 설교자들의 설교테이프를 가리지 않고 들음으로써 신앙적인 분별력을 상실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자신들의 교회 목회자의 설교를 테이프로 듣는 다른 설교자의 설교와 쉽게 비교함으로써 목회자에게 부담을 안겨 주며 신앙적인 교육을 하기 어렵게 만든다. 텔레비전에 방영하는 예배나 설교는 병자나 노약자를 위하여 필요하며 유익한 일이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은 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회중에 참여하여 함께 하나님께 예배하고 그 예배에서 설교하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예배를 드라마로 혹은 영상 매체로 대치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예배에서 즉 메시지 전달을 예배의 전부로 생각하는 데서 오는 발상이다. 특별한 경우, 전도를 위한 특별한 경우, 메시지를 설교 대신 그런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상적이거나 바람직한 것으로 결코 아닌 줄 안다. 사상이나 예술성을 표현하는 형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기획, 연출, 출연자의 협조와 오랜 준비와 연습을 필요로 하는 드라마 놀이(Play)가 보편화될 수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그러한 표현 형식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를 대신할 수는 없다. 설교는 예배에서 불가시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진리를 전달하는 수단이다. 설교에는 가르치는 요소가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이성과 지각을 초월하는 것이므로 설교는 이성을 초월하는 진리에 대한 일방적인 선포이다. 우리의 합리적인 이해나 경험적인 감성을 암시적으로 호소하는 드라마로는 불가시적인 진리의 메시지를 다 전할 수 없다. 구약의 예언서에서 선지자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구체적인 행위로 전달한 경우가 있었으나, 그런 경우에는 언제든지 말씀으로 하는 설명이 따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4) 설교는 예배 갱신의 열쇠

 

설교는 예배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구약 종교와 기독교 종교는 백성들의 제사 드림과 분위기 조성에 좌우되는 종교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는 계시 종교이므로 그러하다. 설교는 설법하듯 설교자 자신이 깨달은 도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설교는 본래 백성에게 주시기 위하여 기록케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다. 하나님게서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말씀을 주신 것은 그들 자신들을 위하여서가 아니고 백성들을 위하여 그들에게 전하도록 주신 말씀이다. 칼빈이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 사람을 찾으시고 말씀하시므로 교회가 있게 되었으며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어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 경배와 찬양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면서 말씀을 청종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며 자비를 간구하는, 드리는 부분이므로 중요하다. 그런데 사람들의 새로운 삶에 대한 경고나 지침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오며, 새롭게 하시는 역사도 말씀을 동반한 성령의 일하심을 통하여 온다. 그러므로 예배에 생동성을 주는 결정적인 요소는 설교이다. 설교는 곧 예배 갱신의 열쇠이다. 예배자는 설교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여 예배하는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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