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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개혁사상과 오늘의 교훈

                                                                                    김재성 교수 (조직신학, 국제신학대학원 대학원장)

 

시작하는 말

 

유럽의 16세기, 종교개혁이라는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격동기를 살았던 한 사람의 개혁사상에 대해서, 그리고 그가 있었던 시대와 현장에 대해서 정확하게 파악하고 남겨진 교훈을 찾는다는 것은 지금 우리 시대의 문제를 풀어보는 지혜를 찾으려는 것이다. 대세를 이루면서 유럽에 영향을 미치던 기독교 종교만이 아니라 국가 권력의 핵심부를 차지하고 있던 중세 로마 가톨릭을 개혁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건 모험이었다. 이 글에서 칼빈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과 주제들을 종합적으로 조명해보면서 전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칼빈의 교훈을 정확히 제시하고자 한다.

 

1. 휴머니즘에서 개신교의 개척자로

 

칼빈은 프랑스에서 16세기 초반 휴머니즘에 기초한 법학을 수업하고 난 후에 개신교의 신학체계를 종합적으로 제시하면서 개혁교회를 세운 지도자였다. 칼빈은 16세기를 새로 정립한 개혁사상으로 지배했고 성경적으로 교회의 제도와 예배와 사역을 새롭게 설계하였고, 결국 개신교가 이룩한 종교개혁을 지켜냈다.

1509년에 평범한 프랑스의 가정에서 출생하여 파리에 유학을 가서 인문학을 마치고 오를레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프랑스 최고 귀족층의 자녀들과 함께 어울려서 당대 최고의 휴머니즘을 교육을 받았지만, 그에게서 뿜어 나온 것은 개혁신학이었다. 언제 어떻게 해서 종교개혁의 격동기를 충격적으로 체험하고 회심하였는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칼빈이 확실하게 개혁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기독교 역사와 세계 지성사에서 손꼽히고 있는 가장 걸출한 신학적인 저술, 「기독교강요」을 27세에 출판하기까지 점진적인 변화의 과정을 거쳤다. 개신교 신학의 주춧돌이 된 이 책은 그의 나머지 인생동안 15배나 확장 증보되었고 지금까지도 거의 대부분의 신학대학원에서 가장 중요한 정통신학의 보고로 읽혀지고 있다. 1536년부터 1538년까지 그리고 다시 부름을 받아서 1541년부터 1564년까지 일생을 제네바를 기독교공동체의 모델로 만드는데 열정과 노력을 기울였는데, 칼빈과 함께 동시대를 살아가던 경건한 사람들에 의하면 아주 예외적으로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였다.

칼빈은 당대 종교개혁자들과 자주 회합을 같이하였는데, 때로는 마틴 루터와 마틴 부써를 포함하였고, 하인리히 불링거, 필립 멜랑톤, 피터 마터 버미글리, 볼프강 무스쿨루스, 기룜 파렐, 시몬 그레네우스, 삐에르 비레, 바디안, 요한 케슬러, 쟝 스트룸 등과 같이 토론과 회합의 자리에 참석하여 좀 더 정확한 성경 해석에 주력하였다. 종교개혁 2세대 신학자에 속했던 칼빈의 사상은 낙스와 베자, 존 라스코를 통해서 계승되었고, 19세기에는 흐룬 반 프린스터,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에 의해서 ‘신칼빈주의’로 발전되어서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프랑스 남동부 국경지대에 위치한 제네바로부터 스위스 동맹에 속한 여러 자치도시들로 확산된 영향력은 아메리카, 아프리카와 아시아에까지 미치고 있다. 칼빈이 모든 노력을 바쳤음에도 제네바의 온전한 교회 개혁을 이룩하지는 못하였으나, 그의 교회론과 신학사상, 예배의식들은 프랑스 개신교회를 비롯하여 네델란드와 저지대 국가들, 스코틀랜드와 영국, 폴란드, 헝가리, 독일의 여러 지역들, 미국을 비롯하여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영향을 미쳤다. 개혁주의 교회의 등대와 같이 빛을 발휘하던 칼빈의 주제들과 사상들은 지난 오백년 동안 훨씬 더 확장되고 포괄적으로 체계화되어졌다.

칼빈의 영향력을 추정해 나가다보면, 그의 인격과 저술들의 힘이 발휘되고 있음에 주목하게 된다. 그의 개인적인 성품과 자세, 그의 사역, 사상과 저술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큰 영향을 발휘하였으니 근대 민주주의 정착과 자본주의 형성에도 결정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가 원하지도 않았던 칼빈주의, 칼빈주의자라는 이름이 여러 곳에서 사용되어졌는데, 칼빈이 1548년 6월 26일 하인리히 불링거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면, 쯔빙글리의 기념설 혹은 상징설을 따르는 자들과 대립하던 베른의 지도자들은 “칼빈주의자와 부써주의를 가지고 있어서”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를 주장하였다고 되어있다. 또한 16세기부터 “칼빈주의자들”은 “개혁주의” (Reformed)라는 명칭으로 로마 가톨릭과의 차이를 드러내고자 하였고, 이들 용어들은 개신교의 정통신학과 복음적 정체성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칭호가 되어졌다.

종교개혁으로 완전히 돌아선 이후에 칼빈은 강직하게 성경적인 교회의 확립을 위해서 교리의 기초를 세우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참된 성도들은 로마 교회의 오염되고 타락한 예배 방식인 미사에 참석해서는 결코 안된다고 주장하였고, 교회론을 정립하여 복음적인 교회가 지켜 나가야할 청사진을 제시하였다. 귀족들과 권력층에 속한 자들도 하나님이 명령한 예배방법을 지키기 위해서는 적대적인 권세들과 맞서서 싸워야한다는 주장을 폈다. 교회에 난무하던 오염을 제거하고, 교회에 가해진 모든 공격으로부터 교회를 방어하기 위해서 정교한 논지를 제시하는 칼빈의 사상을 따르는 자들이 점차 늘어났다. 원리적으로 변혁을 시도하고, 혁명적으로 개혁하는 작업을 전개했다.

 

“요한 칼빈은 16세기에 가장 영특하고 뛰어나며 확신에 차 있던 개신교 지도자였다.

그의 마음에 있던 탁월한 힘은 그가 이루어낸 모든 일들 가운데서 증명되었다. 그는

냉정한 사람이었고, 뛰어난 증오자였다. 그가 증오했던 일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

재세례파, 단지 거짓된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우상숭배에 빠져서 자신들을 타락하게 만든 자들이 했던 일들이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도구이자, 교회의 선지자로 생각하였는데, 초기와 달리 나중에는 적수가 없는 채로 견뎌야만 했었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 지식적인 능력을 충분하게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정당할 것이라고는 확신하였다. 그래서 그가 옳다고 믿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신체적으로는 강하지 못했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을 압도하였고 어떻게 해야 관계를 유지해 나갈 수 있는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친구들을 살려내기 위해서는 협박도 하고, 들볶기도 하고, 겸손해 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침상에 앓아눕게 되었을 때에 그의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은 깊은 슬픔에 잠겼다. 그를 좋아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칼빈의 감화력은 당대의 사람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호소력을 발휘케 하였다. 칼빈의 제네바는 순례자들이 “거룩한 땅”에 도착한 것으로 생각할 만큼 유럽인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여, 6천명 내외이던 곳이 두 배로, 네 배로 계속해서 늘어나자 시당국에서는 복층 구조의 주택증축을 지속적으로 권장하게 되었다.

제네바의 도시 개혁자로서 집중하던 칼빈의 영향력은 선교적인 감각을 가진 선지자의 역량을 보여주게 된다. 특히 저술을 통해서 거의 모든 유럽에 확산되었다. 칼빈의 저술이 남긴 영향력은 얼굴을 대하여 본 일이 없는 사람들의 가슴에 남았다. 최근에 칼빈을 재평가하는 저술들이 쏟아져 출판되었는데, 2009년도가 칼빈 탄생 오백주년이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학술대회, 집회, 기념행사가 전 세계에서 개최된 것은 그의 영향력에 대해서 다시금 확인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학자 칼빈의 모습이 너무나 강하게 각인되어서, 사람들은 다방면에 미친 진정한 칼빈의 영향력을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칼빈의 기여는 제네바의 각 분야에 광범위하게 퍼졌는데, 특히 제네바의 시민사회 형성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주교를 중심으로 형성되어졌던 법률을 개정하여 진정한 근대사회로의 전개를 가능하도록 자문하고 영향을 발휘한 ‘법률가’이자 ‘변호사’였다. 칼빈이 프랑스에서 제네바로 올 때에 그는 법학박사의 지식을 소유했던 최고의 법학자였다. 루터나 쯔빙글리와 달리, 제도적인 로마 가톨릭 신학교에서 신학수업을 전혀 받지 않았던 칼빈은 오직 성경으로만 해석하는 것을 신학자의 임무로 여겼다. 그가 다녔던 파리의 예비학교에서는 주로 철학과 문학을 중점적으로 공부하였고, 오를레앙에서의 법학수업은 이탈리아에서 퍼지던 ‘인문주의’와 기독교 휴머니즘을 호흡한 시간들이었다. 프랑스 휴머니즘은 당대 최고의 철학자 에라스무스에게서 최고에 달했고, 기룜 브리쏘넷과 르페브르를 통해서 영향을 크게 끼쳤으나, 칼빈에게 들어간 후에는 개혁신학으로 재생산되었다.

 

2. 성경적 신학과 살아있는 경건

칼빈 신학의 특징은 성경적인 근거에 충실하고자 하는 것이다. 칼빈의 신학은 “겸손함과 진지함이라는 규범”을 지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1959년에 「기독교강요」를 새로 번역하여 출판한 배틀즈 박사는 “경건의 신학”(theologia pietatis)이라고 명명하였다. 칼빈에게서는 교리와 윤리가 결코 분리되지 않고, 서로 긴밀하게 관련되어 녹아있는 경건의 신학을 보게 되는 것이다. 교리와 삶이 따로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다. 칼빈은 헬라철학자들의 영향으로 세워진 중세 말기의 스콜라주의 신학,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따라서 체계적이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학문적 설명을 위해서 신학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헛된 가설을 세우거나 공허한 사색으로 빠지는 것에 대해서 경계한다. 칼빈의 관심은 송영, 찬송, 감사에 관한 것이지 어떤 주제에 대해서 따져서 원인과 결과를 규명하려는 일련의 수평적 전개가 아니다. 그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쓸데없는 추론이나 상상을 하지 않는다. 건실한 교리와 건실한 행동이 떨어져서 따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중세말기의 스콜라주의 신학은 객관적인 근거를 만들어서 추상적인 정의와 교리를 작성하고 그를 따르지 않으면 신랄한 비판과 공격적인 추정을 강요하였다. 예를 들면, 루터의 95개조문을 반박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트렌트 종교회의 선언문은 대표적인 로마 가톨릭의 구원론인데,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에 대해서 저주를 선언하였다. 중세 시대에는 ‘수호천사’에 대한 강조와 호기심이 대단했다. 그러나 칼빈은 천사들의 본성이나 숫자나 위계질서 등에 대해서 성경을 벗어나서 공허한 사변에 빠지지 말라고 촉구하였다.

 

“.... 성경을 읽을 때에, 우리는 덕을 위하여 주어진 것을 찾고 묵상하기를 끊임없이 힘써야 하며, 호기심에 빠져서 무익한 것들을 탐구하는 데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될 것이다. 주께서는 열매없는 질문들에 빠지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건전한 경건과 그의 이름을 경외하는 것과 참된 신뢰와 거룩한 의무들에 관하여 우리를 가르치기를 원하시므로, 우리는 그런 것들에 대한 지식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신학자의 임무는 사람들의 귀를 긁어주는 것이 아니라, 참되고, 확실하고, 유익한 것들을 가르쳐 주므로써 양심을 강화시켜주는 것이다... 따라서, 어리석은 지혜로부터 벗어나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것이 무엇인가를 성경의 단순한 가르침에서 찾아나가도록 하자“

 

또한 칼빈은 자신에 대해서 대체적인 것만을 남겼다. 결코 자신의 자랑이 될만한 것을 언급한 적이 없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자신의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그쳤다. 물론, 그의 지침들은 성경으로 돌아가려는 것이 분명하였다. 하지만, 그가 남겨둔 해석의 여지라거나 재해석의 가능성으로 인해서 끊임없는 대립의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그가 너무나 간단하게 끝내고 말았던 것은 성경자체의 방법론을 따르고자 했기 때문이다.

법학도이자, 인문주의 연구가였던 칼빈이 전혀 공부하지 않았던 신학을 연구하여 새로 세운다는 것은 많은 제약이 있었다. 칼빈이 정리하고 제시한 개혁주의 신학은 중세 말기 로마 가톨릭이 지향하던 ‘스콜라주의’와는 완전히 달랐다. 칼빈의 특징은 스스로 신학을 연구하면서, 철저히 “고전 원본으로 돌아가자”(ad fontes)는 휴머니즘의 방법론을 갖고 있었다. 칼빈의 원천은 오직 성경이었다. 법학도 칼빈은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 학파, 세네카 등에게서 영향을 받았지만, 오히려 전혀 다른 책, 「기독교강요」를 제시했다.

1536년에 나온 초판에서 1559년 마지막 다섯 번 째 증보판이 나왔고, 프랑스어판은 1560년에 출판했는데, “교훈집” “기초교리서”등으로 사용되기를 바랬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개혁주의 신학의 교과서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토록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칼빈은 당대 최고의 인문주의 학자였던 데시데라스 에라스무스와 유사한 점이 많지만, 오히려 루터와 쯔빙글리, 부써와 피터마터 버미글리 등 당대 종교개혁자들의 저술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칼빈은 당대 이모든 사람들의 영향을 뛰어넘었다. “칼빈주의자들”이 생겨났고, “칼빈주의”라는 용어가 탄생되었다.

젊고 참신하던 칼빈은 수많은 기독교적 질문들을 스콜라주의가 아닌 방법론으로 접근하여 구조적이며 체계적으로 제시하고자 하였다. 가장 일관되고 탁월한 방법론을 갖추게 된 것은 순수하게 성경을 근거로 하여서 기독교 신앙의 주요 주제들을 정리하고자 하였다. 루터가 “대 소요리문답”에서 취급했던 십계명, 주기도문, 사도신경, 성례 등에 대한 해석을 근간으로 삼았다. 그러나 사도신경의 내용과 유사하게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체계적인 설명을 구성하였다. 칼빈의 신학적 배경은 암브로스, 제롬, 어거스틴, 그레고리 등 초대교부들이고, 그 중에서도 어거스틴에 크게 의존하여 무려 1708번이나 인용한다. 칼빈은 어거스틴, 크리소스톰, 터툴리안, 갑바도기아의 초대교부들의 신앙을 물려받았다는 말이다.

칼빈의 신학사상이 응축된 「기독교 강요」는 지금까지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바, 다음 몇 가지로 그 독특성을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성경 본문에 충실한 해설에만 집중적으로 일관하는 계시의존적 사색,

둘째, 간결 명료한 해석으로 핵심을 진술하는 표현방법,

셋째, 주제별 핵심사항에 초점을 맞추는 항목별 체계화 작업,

넷째, 당대 현장의 실제적인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조언과 비판 등이다.

이상의 중요성 때문에, 칼빈의 책은 불후의 명저가 되었고, 지금도 녹슬지 않고 빛을 발휘하고 있다.

 

3. 제2차 종교개혁

 

칼빈이 제네바에서 시도한 첫 개혁은 혼돈과 무질서의 시행정을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추진하다가 좌초되어서 2년 만에 추방당했다. 수 백년 동안 로마 가톨릭을 따르던 제네바가 종교개혁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은 주변 환경의 변화에 따른 것으로, 먼저 베른시 당국이 1533년에 종교개혁을 받아들이면서 크게 격동하게 된다. 제네바시는 1527년부터 200인 의회가 입법과 사법권을 가진 최종 결정기관으로 부상하게 되었고, 군사적으로 이웃에 있던 큰 도시의 보호를 받았던 까닭에 제네바에서도 베른의 영향을 받아서 1536년 5월 21일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안건이 투표로 통과되었다. 이 날 즉각, 주교를 포함하여 무려 400여명에 달하던 신부들이 사라지고, 단 열 명의 개신교 설교자들만 두게 되었다.

제네바 종교개혁의 첫 사령탑으로 초빙된 기룜 파렐은 혼자서 감당하기에 역부족이었음을 느끼고 있던 차에, 그곳을 지나가기 위해 여관에 머물고 있던 칼빈을 찾아가서 함께 일하자고 간청하였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도시에 머물게 된 칼빈은 제네바에서 개혁신앙을 정착시키기 위해서 첫 단계의 사역들을 추진했는데 한 마디로 혼란의 연속이었다. 종교개혁으로 나가는 과정은 너무나 힘들고 어려웠다. 로마 가톨릭으로 그냥 살기를 바라는 주민들, 더 급진적으로 개혁을 해야 한다는 재세례파들, 그 누구의 간섭도 받기를 싫어하는 무정부주의자들, 기존의 권세를 유지하려하는 토후세력들이 그대로 뒤섞여 있었다.

 

1541년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돌아온 서른 두 살의 칼빈은 혼란에 빠진 제네바 교회를 위해서 제일 먼저 교회 제도의 정비에 착수하여 “교회 법령집”(Ecclesiastical Ordinances)을 제정한다. 이것이 칼빈의 교회 개혁의 결정적인 강수이자 절묘한 승부수였다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칼빈과 파렐이 제네바에서 쫓겨났던 1538년 이후로 제네바 교회는 시의 정치적인 지도층의 교체로 인해서 가히 제멋대로 방치된 혼돈과 무정부 상태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칼빈 지지파가 줄어들고, 반대파가 득세하였지만, 제네바 교회를 수습하여나갈 강력한 목회자가 없었다. 너무나 느슨하고 방만해져버린 교회의 구조적 약점을 고치기 위해서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돌아오자마자 가장 먼저 교회의 안정된 체제를 확정하였다. 칼빈은 전통적이면서도 안정적인 체제를 정착시키고자 했다. 1564년 병으로 일생을 마감하기까지 칼빈은 이 도시를 완전히 바꾸게 하는 결정적인 지도력을 발휘하게 된다. 무조건 핏줄로 세습되는 왕정체제와 귀족정치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모든 사람의 인격과 존엄성을 존중하는 근대 시민사회로의 변화과정에 칼빈이 서 있었던 것이다.

도시의 종교개혁자로서 칼빈은 계속해서 시정부의 제도적 법제화를 위해서 자문하고 간여하여 마침내 그가 염원하던 제네바 시의회 권력구조에 관한 규칙제정을 거의 죽을 무렵에 완성하게 된다. 제네바는 14세기 이후로 최고 권력자 주교의 독점적인 지배체제로 굳어져 있었다. 주교와 그에게 아부하는 귀족들이 사법권과 치안권을 전횡하고 있었다. 이것을 먼저 4인의 시장대행 대표 최고위원제로 전환했다. 각각 3달 동안 시정의 대표자가 된다. 이것은 한 사람이 독재하는 것을 막아준다. 또한 이들 네 사람은 결코 다음 해에 연속적으로 시 대표위원이 될 수 없게 했다. 이 네 사람은 중요한 결정을 하려면 60인 의회의 결의를 존중해야 한다. 보다 일반적인 문제는 200인 의회로 회부되었다. 이처럼 3단계의 시 권력체계를 정착시켜서 정치적인 안정과 “권력남용”을 방지하게 된다.

칼빈은 제네바 교회에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당회제도를 정착시켰다. 스트라스부르그에서 하듯이, 일주일에 한번 씩 모든 성직자들이 의무적으로 모임을 갖도록 정례화 하였다. 석달에 한번은 서로 간에 행동을 심의하도록 하였다. 칼빈이 시의회와 가장 심각하게 충돌한 것은 교회의 권징을 목사 전원과 장로 12인으로 구성된 당회의 권한 하에 두도록 한 것이다. 당회는 정통교리나 도덕규범들을 위반한 구성원들을 견책하거나 출교할 권한을 갖도록 하였다. 당회는 세속적인 사법권과 견줄만한 “영적인 재판권”을 행사하였다. 시의회에서는 영적인 당회의 권한이 정치적인 사법권을 침해한다고 생각하였다. 교회 생활의 거룩성을 훼손하는 자들에게는 성찬정지, 심각한 위반자들에 대해서는 출교의 명령을 내렸다. 간음, 불법적인 결혼, 저주와 욕설, 호화생활, 교회와 전통에 대해서 존중하지 않는 자들이 이에 해당된다.

칼빈의 가장 두드러진 승리는 당회 권한에 출교권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교회의 치리권이 독립적으로 확고히 영향을 발휘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바젤에서 요한네스 외콜람파디우스와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마틴 부써가 아직 채 성공하지 못한 것을 이루어낸 쾌거였다. 거의 이십 여년 동안 권세자들과 대립적인 시의회와의 투쟁 끝에 성취하게 된 놀라운 업적이다.

당회의 독립적인 치리권과 함께 네 가지 직분론이 핵심조항으로 들어가 있는 새로운 준칙은 약간의 수정을 거쳐서 1541년 11월 20일, 시 대표들의 의회에서 통과하게 되어 “교회법령”이 발표되었다. 여기에 칼빈이 가졌던 교회론과 교회조직, 교회정치에 대한 구상이 들어있다. 에베소서 4장 11,12절에 근거하여, 목사, 교사 (즉, 신학교수), 장로, 집사 등 4 직분론을 제정하였고, 오늘까지 각각 지켜 내려오고 있다. 목사는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를 집행한다. 교사들은 교리의 순수성을 지키는 일에 담당한다. 장로는 도덕적이고 신앙적인 문제에 대해서 권징의 책임을 감당한다. 집사는 교회 재정 출납을 담당하고 구제하며 봉사의 임무를 관장한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단선적 상하구조의 감독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제네바에 돌아온 후에, 칼빈은 시 의회의 권위와 권위를 존중하고 따라가고자 하는 성숙한 자세를 견지하였는데, 특히 목사의 안수에 있어서 최종 결정권을 인정하였다. 예배에 있어서, 특히 성만찬에 관련된 세부사항에 대해서 자신이 주장하던 것을 양보하였다. 제네바에는 칼빈에게 반항하는 권세가의 자녀들, 귀족들의 자식들 (“Les enfants de Geneve)이 많았다. 이들은 제네바의 치안총장, 시의원, 시장 등을 역임하면서 오랫동안 실권자로 아미 뻬렝을 수장으로 삼고 칼빈에게 즉각 반격을 개시했다. 이들은 제네바 목회자들이 집안의 호화로운 결혼식이나 음주행동 등 가정생활을 문제 삼아서 간섭하려하자 반발하였다. 제네바에는 각처에서 미사강요를 피해서 들어오는 피난민들이 급증해서 빵 값이 치솟고 말았는데, 더구나 새로 들어온 자들은 제네바의 원래 시민들의 도덕적인 수준과 사회적인 질서가형편 없다고 비판하자 분노가 끓어오르고 말았다. 대부분 새로 들어온 자들은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온 귀족집안이거나 지식인들, 전문인들, 갖가지 세공기술과 출판업을 하던 신흥 재산가들이 많았다. 그들의 우월감과 원래 살고 있던 자들의 열등감이 충돌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불평과 욕설, 거리 시위까지도 난무해서, 칼빈은 1553년 1월에 며칠 동안 시골에서 거행되는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면서, 도시 전체가 아직도 ‘무질서’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잠시라도 이 골치아픈 도시를 떠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제 2의 종교개혁이 이루어지기 직전의 제네바는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만큼 절망적이었다. 여기에 오기까지 칼빈이 겪어야했던 고초는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다. 가정적으로는 칼빈이 의지하면서 사랑하던 아내가 병으로 하나님 나라에 부름을 받았다. 제 2의 제네바 종교개혁은 위기의 시기를 통과하면서 이룩되었다. 칼빈의 우려하면서 걱정하던 바와 같이, 1553년 2월 선거에서 “제네바의 아들들”이라고 자처하는 자들 가운데 세 명이 시의회 의원으로 선출되고, 아미 뻬렝이 네 명의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자 기어코 벌어지고 말았다. 시의원은 아니었지만, 또 다른 “제네바의 아들” 중에 ‘삐에르 베뜰리에’ 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지속적으로 방탕한 생활로 인해서 당회로부터 성만찬 참여를 금지당했다. 이에 불만은 품은 그는 지속적으로 칼빈의 면전에서 저항하였고, 시의회에 성만찬 조항을 수정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당회가 결정한 수찬금지 조항을 철회하지 않으려면, 칼빈이 제네바를 떠나야 한다고 협박을 가했다. 베뜰리에는 수찬금지를 형식적으로는 받아들였지만, 칼빈의 충고를 따른 것은 아니었다. 칼빈은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으면서 굴욕을 참고 인내하였다. 1555년, 칼빈의 지지자들이 시의회 선거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승리의 날이 왔다. 마침내, 칼빈은 지도력을 회복하게 되었다. “제네바의 아들들” 약 30여명이 200인 의회 선거에서 낙선했는데, 새로 들어온 프랑스 피난민들이 중에 귀족들이 신분과 지위가 인정을 받아서 선거에 참여했던 것이다. “제네바의 아들들”은 1555년 5월 16일에 도시에서 여러 차례 항의하면서 폭동을 주도하였다. 새로 들어온 많은 난민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행사가 있었다. 로버트 킹던 교수는 바로 이때가 제네바의 두 번 째 종교개혁이라고 하였다.

칼빈은 일체의 동정심을 베풀지 않았으니, “교회의 질서와 거룩한 종교개혁”을 뒤집으려는 자들이요, 음모를 꾀한 자들이라고 규정하였다. 주모자들 12명이 체포되었고, 관련자들에 대해서 심문을 받았다. 시의 치안질서에 대한 반역죄가 확정되어서 열 두 명 모두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그 중에 주모자 네 명은 처형되었고, 아미 뻬렝을 포함한 나머지 여덟 명은 베른 지역으로 추방되었다. 그와 연관된 열 다섯 명은 몰래 도망을 갔다. 그 후로 제네바 교회의 당회가 가지는 치리권이 확보되어서, 수찬정지를 당한 자들은 시 당국자들 앞에서 회개한 증거를 입증해야만 시민으로 거주할 수 있었고, 주어진 기간 내에 교회와 화해할 방안을 찾도록 의무화되었다. 그러한 조치를 이해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다 추방되었다. 이로 인해서 도시의 도덕적 질서가 한층 강화되었다. 이제, 제네바 시의 모든 사람들은 설교를 들으러 교회에 출석해야만 하였다. 심지어 거짓 교인이라 하더라도, 교회에서는 출석부를 기록하고 있었다.

칼빈이 가졌던 종교개혁의 무기는 설교였다. 25년 동안 약 4천 번이 넘는 설교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잘못을 지적하고, 때로는 더 나은 시의회를 선출하도록 촉구하였다. 그는 모든 시의회 지도자들에게 설교를 통해서 영향을 미치고, 여론이 형성되도록 하였고, 때로는 중한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그는 잘못된 행동을 꾸짖는데 있어서 주저함이 없었으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지도자들을 선출하라고 시민들에게 촉구하였다. 이로 인해서 칼빈이 죽을 무렵의 제네바는 그가 처음 도착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도시가 되었다.

4. 개혁의 성공에 기여한 여러 요소들

 

칼빈의 개혁운동과 신학적 성취가 성공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어떻게 해서 당대 수많은 개혁자들 가운데 그의 사상과 영향이 그토록 탁월했으며, 오래동안 광범위하게 미치게되었던가? 칼빈의 제네바 사역과 그 후 지속적인 성공 요인은 여러 요소들이 함께 건설적으로 상승작용을 했기 때문이다.

첫 번 째, 칼빈을 지지하는 새로운 지도자들이 확보되었기 때문이다. 먼저 제네바라는 특수 도시의 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새로 들어온 피난민들 중에는 뛰어난 학자들과 귀족들, 지식인들이 많았다. 1547년 프랑스 왕 앙리 2세가 박해를 가자하 수 천명의 난민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제네바로 몰려들었다. 빠리, 노르망디, 오를레앙 등 프랑스는 말할 필요가 없고, 이탈리아, 스페인,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에서 찾아왔다. 그들은 제네바 경제를 활기차게 만들었다. 제한된 좁은 면적에서 건축업이 성행하였다. 이층을 오층이나 육층으로 개축하게 되었다. 도시의 성장은 모든 시도를 가능하게 하였다.

1555년 5월에 60명의 부르죠아를 시민으로 인정하였고, 1559년까지는 300 명을 더 받아들였다. 변호사, 의사, 출판업자, 학자들이 많았고, 포도주 생산업자도 새로 들어왔는데 장 자크 루쏘의 선조인 디디에르 루쏘가 이 때에 프랑스에서 이민을 왔다. 이들 상인들은 진실된 신앙인들이었기에 하나님의 교회가 든든히 서게 되는데 큰 일조를 하였던 것이다.

제네바는 독립된 도시 국가로서 어떤 다른 유럽의 도시보다 앞서 나갔다. 19세기나 20세기에 체험할 수 있었던 시민 사회의 자유를 이미 칼빈의 시대에 향유하고 있었다. 칼빈과 함께 하던 지식인들은 신앙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제네바의 중요한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되었다.

두 번째, 저술과 서적으로 지식인들을 향해 메시지를 던졌고, 후계 세대를 교육했다. 당시 모든 지식의 최고는 성경이었고, 대중들이 가질 있는 영어 번역본인 “제네바 바이블”이 인쇄되어서 “킹 제임스 번역본”이 나오기 이전까지 엄청나게 출판되었다. 칼빈의 저술을 비롯해서 수많은 책을 출판하는 인쇄소가 제네바에서 크게 성행하였다. 1549년에 다섯 개에 불과하던 출판사가 1563년경에는 34개로 늘어났다. 칼빈의 저술은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여 엄청나게 팔려나갔고, 시편찬송가와 성경 등이 인쇄되어서 1570년에는 한해에 모두 35,000권이 인쇄되었다. 칼빈의 영향력은 책을 통해서 대학의 확장과 함께 새로운 지식층이 형성되면서 널리 퍼져나갔다. 유럽 근대 사회의 지도자들은 거의 모두 다 칼빈의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통치시대에 칼빈의 책보다 더 많이 출판된 책은 영국내에서 없었다.

1559년에 설립된 제네바 아카데미의 성장과 부흥이야말로 칼빈의 지도력이 빛을 발하던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이 학교에는 프랑스, 이탈리아, 스코틀랜드, 네델란드, 폴란드, 베니스, 나폴리 등에서 젊은이들이 몰려왔다. 이들은 모두 다 칼빈이 제네바에 심은 영향력을 목격하고 체험한 자들로서 훗날 각각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가서 교회와 정치의 중요한 지도자들이 되었다. 런던, 브라질, 삐드몽, 주로 프랑스에 파송된 선교사들이나 다를 바 없었다. 칼빈이 죽던 해에 입학생들은 300여명을 넘어섰다. 이 학교에서 배출된 인재들은 유럽 곳곳에 파송된 최고 수준의 고전학자들이자 선교사들이었다. 매주 수요일 아침과 주일 날 드리는 세 번의 예배에 참석하도록 했다. 여름에는 오전 6시에, 겨울에는 오전 7시에 기상하고 오후 4시에 수업이 종결되었다.

칼빈이 길러낸 학생들과 성도들이 교회의 지도자들이 되면서, 시 당국은 우호적으로협조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1534년생 마이클 로제이다. 그는 불과 스물 두 살때에 시의외 의원이자 장로로 선출되었고, 1560년에는 최고의회 의장이 되어서 1612년까지 시의 모든 행정책임자로 헌신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세로 노력해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셋째, 열린 세계적 안목 (global perspectives)을 가지고 복음적인 신학을 가진 주변의 사람들과 서로 긴밀히 협조하였다. 칼빈은 단순히 제네바 내에서만 사역하고 결정하는 것으로 한정되지 않았다. 그는 세계교회를 항상 인식하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제네바 시민권을 받은 것도 1559년이었다. 사실 그는 항상 자신을 프랑스 난민으로 생각하였고, 신앙적으로 왜곡되고 불행한 나라를 마음 속에서 결코 잊지 않았다.

그는 1538년부터 1541년까지 스트라스부르그에서 프랑스 난민교회를 섬겼는데, 마틴 부써의 강권으로 프랑크푸르트, 하게나우, 보름스, 레겐스부르그 등 여러 종교회의에 참석하여 당대 종교지도자들과 서로 만나서 협의하였었다. 이런 초기 모임은 “화해의 신학자”로 알려진 마틴 부써의 주선과 강권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레겐스부르그에서는 로마 가톨릭에서 나온 추기경들 (Antoine Perrenot de Granvelle, Gasparo Contarini) 등과 격돌하면서 부써와 멜랑톤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였다. 이들 각종 회의에서 칼빈의 총명함과 박식함이 돋보였는데, 특히 멜랑톤은 칼빈의 영특함에 찬사를 보냈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칼빈은 세계적인 안목을 갖추게 되었고, 그 시대에 논쟁되어지고 있던 교회와 관련된 논쟁들에 대해서 답변하고자 하는 의욕과 동기를 갖게 되어졌다. 그리하여 후에 쓴 논문들에서 당시 챨스 5세에게 교회의 개혁의 필요성을 촉구하였고, 트렌트 종교회의에 대해서 반박문을 발표했으며, 쉬말칼틱 전쟁이 벌어지자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에게 비판서를 제출하였다. 페라라의 공작부인과 잉글랜드의 귀족들, 폴란드, 프랑스, 사보이, 저지대 국가들에게도 편지로 조언과 자문을 보냈다. 칼빈은 세계적인 안목의 사람이었다.

넷째, 타협과 포용의 지도력이 빛을 발휘하였다.

칼빈의 안목과 저술과 활동에서 가장 오해를 받는 부분은 엄격하고 딱딱하게 굳은 초상화로부터 나온 이미지이다. 그러나 이것은 로마 카톨릭 측에서 나온 비판자들이 남긴 곡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수많은 역사가들이 이런 천편일률적인 곡해를 교정하기 위해서 글을 남겼으니, 포용성과 넉넉함과 교회 일치를 위해서 수고한 노력을 확인해 찾아볼 수 있다. 특히 16세기 성만찬 신학은 개신교진영이 첨예하고 서로 달라서 어려움을 겪었던 주제였다. 그 유명한 1529년 말부르그 종교회합에서 루터파와 쯔빙글리파가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그 후로 스위스 자치 도시마다 각각 역사적인 전통에 따라서 다른 해석을 채택하고 있었는데, 그들과 제네바 시와의 군사동맹이라든가 교회적인 교류 때문에, 칼빈은 각각의 차이점을 묵인하였다. 칼빈은 쯔빙글리의 상징설에서 성만찬의 신비로운 부분이 약화되고 있음을 우려하였지만, 루터의 공재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있던 쮜리히 신학자들의 표현들도 받아들이는 융통성을 발휘하였다. 사실 칼빈은 두 신학자 사이에서 중간 입장을 취했지만, 1541년 쯔빙글리와 외콜람파디우스가 루터를 정당하게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쉬워했고, 좋은 교리를 세우기 보다는 나쁜 교리를 파괴하는데 치중하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자신의 성만찬 신학을 충분히 발표하면서도 칼빈은 꾸준히 연합된 합의서를 만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였다. 칼빈이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은 성령께서 성만찬에 기여하시는 역할과 교회를 위해서 주시는 영적인 영양분이 된다는 사실이었다.

칼빈은 성만찬 신학을 공개적으로 토론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항상 바쁜 사역에 매달려 있어서 도무지 제네바를 떠날 형편이 아니었지만, 1543년 7월 스트라스부르그를 다시 방문하여 상의하였다. 1544년 9월에 루터는 「성만찬에 대한 간략한 신앙고백」 (Kurzes Bekenntnis vom Abendmahl)을 발표하여 점점 더 공개적으로 쯔빙글리의 성찬론을 비판하였으나, 칼빈은 곧바로 11월 25일 불링거에게 편지를 보내서 루터의 성품을 이해하고 용납하라고 부탁하였다. 루터는 “하나님의 뛰어난 종”이라고 칼빈은 언급하면서, “적그리스도의 규칙을 깨트리고 구원의 교리를 전파하고자 지금까지 수고하는 분”이라고 하였다. 양측이 서로 충돌하게 되면 일반적인 난파선이 되고 말 것이라고까지 호소하였다. 그러나 쮜리히 교회의 반격이 몇 달 뒤에 나왔고, 다시 루터가 이를 반박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이번에는 칼빈이 멜랑톤에게 1545년 6월 28일자로 편지를 보내어서 자신이 발견한 루터파의 약점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1545년 5월에는 베른, 바젤, 콘스탄스, 스트라스부르그를 다시 방문하여 프랑스에서 박해를 당하고 있던 ‘왈덴시언들’에 대한 지원을 얻어내었고 개신교 진영의 지속적인 연합을 도모하였다.

1546년 9월에는 뇌샤텔에서 파렐과 협의하고, 1547년 1월에는 쮜리히를 방문하였으며, 1548년 11월, 불링거와 다시 만나서 “티그리누스 합의서” 작성과정을 협의했다. 루터는 이미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후였으므로, 함부르크의 목회자 베스트팔이 전면에 서서 1552년과 1553년에 칼빈은 “암소”(cow)로 불링거는 “황소” (bull)라고 호칭하면서 극렬히 비판하였다. 쮜리히의 교회와 베른과 제네바가 동시에 연대적으로 지지하려는 과정에서 칼빈은 사실상 많은 양보를 하였고 중간 입장을 취했다. 그런가 하면, 스위스 내부적으로도 일치가 어려웠다. 베른 교회 지도자들은 칼빈이 주장하던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설”에 대해서 강렬히 저항하였고, 그가 죽은 후에까지도 비판하였다. 성만찬 신학의 최고학설로 평가를 받는 칼빈이었지만, 포용하고 양보하였다. 1549년 5월, 칼빈은 기룜 파렐을 만나서 협의했고, 쮜리히에서 불링거를 만나서 최종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문서로 만들기 위해서 다시 세 가지 부분을 수정해서 1551년 제네바와 쮜리히에서 동시에 출판하였다. 이 두 도시의 교회가 서명한다는 것은 진보적인 “쯔빙글리파”와 “칼빈주의자들”이 서로 동지적인 결속을 시도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그 반대편에는 로마 카톨릭의 화채설 (transubstantiation)이 있었으며, 다소 떨어진 곳에 루터의 공재설 (sacramental union, consubstantiation)이 자리하고 있었다. 여러 스위스 도시들이 (Zurich, Geneva, Saint Gall, Schaffhausen, the Grisons, Neuchâtel, and Basel) 결국 이 문서에 화답하였다. 프랑스, 영국, 독일지역에서도 환영하였다. 독일 루터파의 멜랑톤마저도 역시 처음으로 이 문서에 대해서 이해한다고 하였다. 칼빈은 1555년에 피터 마터 버미글리와 접촉한 후에 “변증서” (Defensio)를 발표했고, 1556년에는 “2차 변증서”를, 1557년에는 “최종 변증서”를 통해서 스위스 교회들과 루터파 교회들 사이의 이해를 도모하고자 노력하였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칼빈은 이처럼 첨예하게 나뉘어진 상황 속에서 교회의 일체성과 평화를 위해서 지도자들의 힘을 사용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1556년 1월 26일자로 서문이 기록된 “2차 변증서”에는 빗텐베르그 지도자들에게 보내는 요청이 담겨있다: “연합을 위해서 제시된 것이 무엇이든지간에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기꺼이 그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따를 것입니다.”

성만찬 논쟁이 격렬해져서 더 이상 합의가 불가능해져버린 상황에서 발표한 “최종변증서”에서도 칼빈은 루터와 합의했던 아우구스부르크 고백서를 확고하게 지지한다고 언급하였다.

“조금이라도 화해의 희망이 남아있다면, 만일 상호간에 선한 의지가 유지되고 있지 않아도 나의 허물이 아닐 것입니다. 이 글에서 내가 제시하는 것이 지나치게 격렬한 것인데도 아무런 가치가 없다하여도, 친밀한 토론을 위해서 지정해야할 시간과 장소는 있을 것입니다. 나는 이미 그곳에 참석하겠다고 약속했고 선언했고, 자비의 정신을 보일 것이며, 거룩하고 거룩한 협약의 바람직한 성공을 지체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내부의 불화 속에서 즐거워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계속적으로 멜랑톤에게 “성만찬 논쟁”에서 자신의 입장을 개진하였다. 1560년에는 루터파의 옹호자라고 자처하는 신학자들 (Tilemann Heshusius and Mattias Flacius) 등이 칼빈을 공격하였다. 그 이전에 1557년과 1559년에 베자는 여러 가지 화해의 임무를 띄고 독일을 방문하였다. 엄격한 루터파 신학자들에게는 쮜리히 신앙고백서 (Consensus Tigninus) 가 루터와 쯔빙글리 사이의 논쟁을 되살려내는 망령과 같이 생각될 것이고, 독일 땅에 칼빈주의가 광범위하게 퍼지는 것이라고 불쾌하기도 하고, 개혁주의가 참된 교리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판단할 것이며, 참된 종교를 뒤엎어버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1560년 칼빈이 아우구스부르그의 마티아스 쉔크 (Matthias Schenck)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통찰력이 담겨있다. “빗텐베르그는 경건하고 용감한 인격자들을 상당수 배출하였다고 나는 고백한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스스로 루터의 충실한 모방자가 되는 것이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그분이 가지고 계셨던 열린 마음을 갖고자 하지 않고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여 허풍스러운 건방진 자들이다.” 이런 고통의 협상 과정을 통해서 칼빈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개혁의 2세대의 주도적인 인물이 되었다.

1540년대 초반에는 루터파와의 불화가 치유될 수 있을 것이라도 희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빗텐베르그와 쮜리히와 제네바가 모두 다 함께 전폭적으로 함께 추진하였던 것이다.

그 밖에도 칼빈은 교회의 구조와 예배 방식에 있어서도 비본질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교회의 분열이 초래되는 것을 우려하여 매우 유연하게 대처하였다. 제네바에서 하는 방법만이 최고라고 하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 하였다. 칼빈은 다른 교회들에게 제네바의 예루살렘을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경고하였다.

 

5. 성경적 교리의 정립- 은혜로서의 선택과 예정

 

수많은 종교개혁 신학자들 중에서 칼빈의 신학사상이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그가 남긴 교리의 개념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성경적인 교리와 개혁사상을 제시하였다. 그런데, 성경적인 교리와 생활, 신학사상과 윤리가 따로 따로 떨어져서 정립된 것이 아니다. 칼빈의 저작전집에 “교리”(doctrina)라는 말이 무려 9500번이나 나오지만, 그냥 개념적인 논쟁에 해당하는 공허한 진술이 아니다. “교리”와 “적용”이 따로 멀리 떨어지지 않는다. 칼빈의 신학사상은 일반인들에게 하는 설교에도 들어가 있고, 종합적인 문서로 제시된 제네바 신앙 고백서에도 드러난다. 칼빈의 신앙고백이나, 신조, 신앙의 내용을 설명하는 성경주석에서나 항상 독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 어떤 교리라 하더라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의 본질을 떠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결국 겸손하고 순종하는 자세로 돌아온다. 이런 면에서 칼빈의 신학사상에서 대표적인 교리가 예정론이라고 할 수 없고, 베자를 비롯하여 후대에 논쟁이 격렬해졌기 때문이며 후대의 학자들이 풀이했을 뿐이다.

칼빈의 신학사상 중에서 가장 오해를 받고 있는 부분이 예정론과 선택에 관한교리이다. 이 교리가 칼빈에게 가장 핵심이요, 중요하였다고 강조를 한 사람은 1868년 괴팅겐 신학자 릿츌 (Albrecht Ritschl)이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과장이요, ‘중심교리’를 세워고자 했던 19세기 신학자들의 방법론으로 그대로 칼빈에게 투사해서 만들어낸 이론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칼빈이 예정론을 하나의 항목으로 취급한 것은 1537년이었는데, 아주 간략하게 만들어진 “제네바 요리문답”에 집어넣어다는 것 외에는 따로 큰 의미를 두기가 어렵다. 프랑소와 방델은 「기독교강요」에서 점차 예정론이 비중있게 다루어졌지만, 칼빈의 핵심교리라고 하기에는 어렵다고 평가하였다. 그 어떤 하나의 주제와 중심 교리에 근거해서 전개한 것이 아니라, 성경의 여러 가지 가르침을 종합적으로 제시하고자 정리했던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적어도 26가지 이상의 핵심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오히려 예정론은 중심교리로 다룬 사람은 독일 루터파 신학의 필립 멜랑톤이었다. 예정론이 칼빈주의 신학의 대명사가 된 것은 알미니우스와 논쟁하게 된 베자와 그 후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다. 1618년 돌트 신경에 담긴 5대 교리가 바로 예정론을 핵심주제로 다루고 집약한 정통 개혁주의 구원론의 재구성이었던 것이다.

예정론이 마치 칼빈의 대표적인 신학사상이라고 거론되는 이유는 칼빈이 휘말린 논쟁으로 인해서 빚어진 결과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함을 높이려는 그의 신학에 저항하면서 직접적으로 비난하고 공격해오는 경우에는 단호히 대처하였다. 카스텔리오와는 정경에 대해서 논쟁하여 추방시켰고, 아모 (Ameaux)와는 개인적인 권징에 대해서, 피기우스와 볼섹과는 예정에 대해서, 베르틀리에는 성만찬에 관련된 권징으로, 세르베투스와는 삼위일체에 대해서 논쟁하면서 잘못된 교리를 철저히 추방하려고 하였다. 로마 가톨릭의 교리들과 전통에 대해서, 루터파와 제세례파의 급진성에 대해서도 끊임없는 논쟁을 벌였다.

칼빈 신학의 대명사처럼 인용되고 있는 예정론은 너무나 왜곡되게 알려지고 말았다. 특히 그 역사적 맥락과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몇 구절을 인용하는 자들로 인해서 이 교리의 순수성과 진정성이 크게 훼손되고 말았다. 선택에 관한 가르침은 성경 전체에 걸쳐 나타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교회를 택하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셔서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 (눅 3:22, 눅 9:35, 사 42:1, 마 27:43, 롬 9:11,13).

첫째, 예정론 논쟁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은 로마 가톨릭 교리에 따라서 자유의지와 인간의 결단에 의해서 형성되는 믿음을 주장하던 제롬 볼섹이었다. 시대의 혼란과 사상적인 충돌이 불가피하던 종교개혁의 시대에 누구도 정돈된 교리를 완전히 제시하지 못하고 논쟁에 빠져있었다. 제롬 볼섹은 프랑스 출신으로 베른시 당국이 지배하던 곳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가끔 제네바와 들어와서 성경공부와 강해시간에 참석하던 회중교인이었다. 정식으로 제네바 교회의 회원은 아니었다. 1551년 5월, 그는 칼빈의 예정론 교리에 대해서 비판했다. 이 날은 다른 목사가 이 교리를 설명하였는데, 볼섹이 나서서 개인적으로 질책을 하면서 교정하고자 했다. 그로부터 5개월 후에 다시 회중모임에서 자신의 견해를 반복하면서 확산시키고자 했다. 칼빈이 격렬하게 볼섹을 논박하자, 그 자리에 입회하고 있었던 시청 사법부의 관리가 즉각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되었다. 죄목은 칼빈과 파렐의 가르침에 대해서 비난하므로 교회의 질서를 파괴하는 자이므로 당회의 기준에서 볼 때에 용납될 수 없었다. 주변 도시의 여론은 볼섹에게 호의적이었다. 칼빈은 이 문제를 잘못처리하다가는 개신교 전체의 교리가 위험에 빠져들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점차 인식하게 되었다. 제네바 시의회의 실권자들도 칼빈을 꺾으려 기회를 노리고 있던 중 칼빈에게 반대하는 자가 나타나면 동지의식을 발휘하였다.

칼빈은 구원에 이르도록 선택을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시종일관 하나님의 은혜를 근거로 한다. 인간의 믿음을 원인으로 삼아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제롬 볼섹이 최종적인 구원의 확신에 있어서 믿음이 보장한다는 주장을 펴자 도리어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예지(prescience)를 더욱 더 강조하였다. 로마서 8장 29-3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가지게 될 자들을 미리 알고 계시고, 그리하여 그 선택하시거나 저주하시는 일을 하신다. 훗날 베자가 정리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 (eternal decree)에서부터 시작하는 체계화 작업은 칼빈의 저작에서는 발견하기 어렵다. 마치 하나님을 영원하신 독재자이자 전제군주로 만들어버리는 딱딱하고 무미 건조한 해석은 칼빈의 글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1551년 “볼섹에 대한 반박 설교”에서, 칼빈은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믿음보다 앞선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볼섹은 로마 가톨릭의 해석을 근거로 해서 선행과 자유의지의 기여를 주장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가볍게 취급하는 가르침이 퍼져나가게 된다면 제네바 성도들이 혼란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래서 칼빈은 철저하게 차단해 버린 것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구원에 책임을 져야 하거나 협력해야 한다면, 위로와 확신과 소망이란 있을 수 없다. 우리의 위로는 궁극적으로 구원의 최종 목표가 되는 최후 부활로써 실현된다. 선택의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과 영원한 생명과 불멸을 얻는데 있다 (「기독교강요」, III.24.5). 칼빈의 선택과 예정에 대한 강조는 당대 종교개혁자들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진 것들이지만, 그 강조와 적용에 있어서는 가히 독창적이다. 1525년에 나온 루터의 「의지의 노예」 (Bondage of the Will)라든가, 부써와 버미글리의 글에서 강조되던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들이다.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강렬하게 이 가르침이 성도들의 마음 속에 빛을 발휘하도록 열정적으로 다루었다. 칼빈이 볼섹을 배척하는 것은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를 반대하던 것과 같은 강렬함이 느껴진다.

제네바에서 참담한 실패를 한 뒤, 칼빈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다시 로마 가톨릭의 품으로 돌아간 볼섹은 “칼빈의 생애” (Life of Calvin)를 1577년에 출판하여, 가장 불신앙적인 이단이요 독재자라서 두려움과 불안 속에 죽어갔다고 써 놓았다. 가능하면 더 많은 칼빈주의자들의 실수와 오류를 지적해서 사람들을 로마 가톨릭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려는 의도에서다. 칼빈을 양심도 없는 이단자로 규정하였고, 이단사냥꾼이라고 하는 등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근거없는 비난으로 일관했다. 당대에 누구도 이런 책에 대해서 동조하는 신학자들은 없었다.

둘째, 예정으로서의 선택은 구원에 관계된 마지막 주제로 정리되어 있고 (「기독교강요」, 제 3권 21장-24장)에서 성령의 내적 사역에 관한 교리로서 구원의 확신을 다루면서 중점적으로 취급하였다. 칼빈은 이 교리의 일부를 하나님의 섭리 (1권 16-18장, 4권 18-20장)를 설명하면서 로마 가톨릭의 7성례를 비판하는 부분에서도 언급하였다.

하나님의 선택을 강조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공로가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III.22.2) 선택은 인간 밖에서 일어나는 구별이며, 선별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양자들로 삼으신 자들을 가리켜 그들 자신들 속에 무슨 가치가 있어서 선택되었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다고 한다” (III.23.8). 창세 전에 선택하셨다는 말은 조건이나 규정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에 근거한 것이다. 칼빈은 예정교리가 하나님의 단독사역 (monergistic)이지만, 선험적이며 사색적인 신학체계로 규정하지 않고, 구원사의 경험을 포함하는 것으로 본다. 칭의와 성화는 예정으로 인해서 확신을 갖게 된다. 그 반대 방향으로 전개하지 않는다. 선택의 원천은 열매들로서 나타난다. 예정을 구원의 출발점이나 기초로 삼지를 않았다.

에베소서 1장 5절 이하의 성경주석에서도 「기독교강요」에서 사용된 용어를 그대로 풀이하였다. 예정을 설명하면서 유념해야할 네 가지 원인들을 구분한다. 충분한 원인 (the efficient causes)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다. 물질적인 원인 (the material causes)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최종 원인 (the final causes)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이다. 구성적인 원인 (formal causes)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흘러넘치게 하는 복음 전파이다. 앞에 두 주제는 「기독교강요」의 처음 두 권에서 설명되어지고 있고, 나중 두 주제는 제 3권 예정을 다루는 항목에서 풀이된다. 제 3권의 배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을 이루는 성령의 적용사역인데, 믿음, 회개, 성화, 칭의, 선행과 확신, 그리스도인의 자유, 기도, 선택이 주는 위로, 최후부활이다.

선택에 관한 설명 다음은 3권 25장 불멸과 부활로 이어진다. 구원론에서 20장 기도와 21장 선택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것은 선택의 목적에 관계된다. 성도의 성화와 기도에 관한 설명 이후에 선택을 다루는 이유는 “거룩하고 흠이 없이 살도록” 선택되었기 때문이다 (「기독교강요」 III.23.12). 성도는 선택의 교리를 배우면서 구원의 위로와 확신을 얻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의 구원에 책임이 있거나 공동책임을 져야 하다면 위로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기도로써 우리가 하나님께 철저히 의존해 있다는 것, 더욱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다짐을 하면서 겸손하게 되고, 경건하고자 하며, 한걸음 더 나아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소원을 가지게 된다. “비록 만물이 우리를 저버려도 자기 백성의 기대와 인내를 저버리실 수 없는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버리시지 않을 것이다” (III.20.52).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택의 목적은 우리 하나님께서 양자로 삼으신 우리에게 은혜로 구원의 불멸을 얻도록 하시는 것이 아니면 다른 무엇이 있겠는가?” (III.24.5). 우리의 위로는 궁극적으로 최후 부활로써 실현된다. 선택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과 불멸을 얻는데 있다. “예정을 올바로 이해하면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매우 든든히 서게 된다” (III.24.9).

셋째,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을 크게 강조하였다. 칼빈에 의하면, 예정이란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어떻게 대하실지를 결정하신 영원한 작정”이다 (III.21.5).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선택 (엡 1:4) 에 대해서 22장과 24장에서 성경적 해석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III.22.1, III.24.5-7). 구원의 깊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든든한 뿌리와 확실성이 보장된다. 칼빈은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영원과 시간에 관한 논리적, 추상적, 차서적 작정 논의를 일체 배척한다. “창세 전에”라는 말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먼 과거에 이루어진 구원에 관한 결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받은 구원의 깊은 차원을 의미하며, 그리스도 안에 들어있는 뿌리와 확실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선택의 방법은 그리스도와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가 이루신 일을 돌아보면, 우리의 선택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우리 가까이에 있음을 발견하고 위로와 평안과 기쁨을 얻는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사랑하실 수 있기 전에는, 그리고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그 나라를 상속할 자가 되어있지 않으면 그들에게 그 나라를 유업으로 물려주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다면 우리 자신에게서 선택의 확신을 찾아서는 안된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을 그 아들과 단절하여 생각한다면 심지어 성부 하나님 안에서도 선택의 확신을 찾을 수 없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우리가 스스로 속지 않고서 우리의 선택을 비춰보아야 할 거울이다” (III.24.5).

넷째, 칼빈이 선택에서 강조하는 것은 찬송과 영광과 감사를 하나님께 돌리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지와 권능을 생각할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선하신 뜻과 자비하신 의지와 신실성을 생각해야 한다. 선택은 은혜에 관련하는 조항이고, 유기는 완고한 사람의 죄와 관련된다. “정죄는 그 원인이 하나님께 있지 않고, 그 사람 자신에게 있다. 왜냐 하면 사람이 멸망하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순수한 창조에서 악과 부패로 떨어진 데에 있기 때문이다.” (III.23.9). 하나님의 자신의 죄에 책임이 있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각자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불신앙의 죄를 직접 하나님의 작정과 연관시킴으로써 이성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인과율에 빠진 것이다. 하나님은 무법자가 아니시다. 교회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지만, 동시에 진정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도 함께 포함되어있는 혼합된 조직이라는 것이 기본적인 개념이다.

다섯 째, 칼빈이 선택에 관한 교리를 구원론의 결론으로 설정한 이유는 로마서 9장 11절에 따르고자 함이다. 즉, 성경에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는 판단에서 나왔다. 칼빈에게는 특히 로마서 9장이 선택을 이해하는 성경적인 근거이자 배경이다. 여기에는 구원론과 송영이 예정을 논하는 배경이 되고 있다. 칼빈이 스트라스부르그에 있던 1539년 처음으로 성경 주석을 펴냈는데 바로 로마서 주석이었고, 그가 얻은 로마서의 가르침을 근간으로 하여 2판 「기독교강요」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보강되어진다. 칼빈은 로마서 9장11절 주석에서 하나님이 ‘토기장이’로서 질그릇을 빚어내는 분이시며,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개개인을 결정하시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는 설명에 주목한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왕에게 남다른 역할을 맡기셨으니,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섭리라는 근거에서부터 선택이 출발했다. 태어나기도 전에 “에서는 미워하시고, 야곱은 사랑했다” (롬 9:13). 사람의 공로와 업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순수하게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하며, 선택의 과정과 섭리의 진행을 통해서 밝히 드러난다. 칼빈은 섭리와 선택을 아주 긴밀하게 연결시켰다. 초판 「기독교강요」에서는 섭리와 예정이 함께 다루어졌지만, 곧바로 이 순서를 대폭 수정했다. 그리고 그 순서는 그대로 확정되어서 1559년 최종판 제 1권 16-18장에서는 피조물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설명하고자 섭리를 다루었다. 제 3권 21장 이후에 구원론의 마지막에서 예정을 다루는 것은 피조물을 향하신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의 위치를 파악하도록 하되, ‘코람 데오’ (하나님 앞에서)의 상황을 풀이한다.

여섯 째, 칼빈은 모든 사람을 향한 전도와 선교사역을 매우 중요시 하였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시며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신다. 칼빈의 신학에서 선택교리는 선교의 당위성을 강조하게 된다. 유기된 자들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아시며, 따라서 우리는 그 어느 누구도 유기된 자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III.23,13-14). “만일 사람들에게 ‘당신이 믿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당신이 이미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멸망 받기로 작정되었기 때문이다’라는 식으로 말한다면, 그는 나태를 조장할 뿐만 아니라, 악한 마음까지도 일으키는 것이다. 듣는 자들이 이미 정죄 받았기 때문에 믿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미래에까지 확대하는 것은 가르침이 아니라 저주가 될 것이다” (III.23.14). 칼빈은 숙명론과 결정론을 구체적으로 모두 배척한다. 과거의 작정에 기초하여 포기하지도 않으며, 미래의 위협을 내세우는 공허한 추상적 교리도 원치 않았다. 현재의 순간에 문을 열어 놓은 선택 교리를 가르치고자 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의 평화에 참여하는 자로 만들려고 노력해야 한다” (III.23.14) 하나님의 일반적인 부르심, 즉 외적인 부르심은 복음전파를 통해서 모든 사람들이 차별없이 자기에게로 초대하시는 것이다 (III.24.8). 복음으로의 부르심은 멸망 받을 자들에게는 죽음의 냄새요 두려운 정죄의 원인이다. 선택을 올바로 전하고 믿을 경우에 사람이 비로소 겸손해지고 교만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아래 겸손히 믿음을 고백하게 되며, 무릎을 꿇는 자세를 갖게 된다. 우리가 선택되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행동이다.

볼섹과 칼빈의 논쟁이 끝난 후에, 1555년 피터마터 버미글리는 칼빈의 예정론이 무엇이냐의 질문을 보내왔다. 이에 베자가 「예정표」 (Tabula Praedestinationis)를 발표하였고, 1582년에 다시 「예정론에 관하여」로 개정판을 냈다. 칼빈은 베자가 자신의 교리를 보충해 주었다고 생각하여 베자의 저술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베자에게서 나온 타락전 선택설은 최근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작정을 전면에 내세우게 되면서, 예정과 타락과의 관계를 다루게 되어진 것이다. 이 문제는 1618-9년 돌트 신경을 작성하면서 “칼빈주의 5대교리”가 가장 뜨거운 쟁점이 되었고, 고마루스, 마코비우스, 보에티우스, 튜레틴, 카이퍼, 바빙크, 훅스마, 벌코프, 반틸 등으로 이어진 개혁주의 정통신학은 온건하든 강경하든 작정신학을 지켜오고 있다. 1690년대에는 루터파 신학자 하노버와 개혁파에서는 베자와 잔키우스가 만나서 연합방안을 모색하였는데, 여전히 작정교회에 대한 이견차이가 컸지만, 예정론에 대해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 칼빈 사후에 백년이 지나는 어간에, “칼빈과 칼빈주의자들” 사이의 차이점이 바로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이냐 예정론 중심의 신학이냐로 나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그러나 이것은 칼빈과 칼빈의 후계자들과의 사이를 지나치게 격리시키고 있는 해석이다.

 

6. 기독교 정통신앙의 수호자

 

칼빈이 제네바라는 특수한 도시의 종교개혁자의 위치를 넘어서서 전 유럽 교회가 지켜온 정통신앙의 수호자로 각인된 사건이 세르베투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처형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어졌다. 로마 가톨릭에 맞서는 대표적인 개혁자가 된 것은 이 사건을 처리하고 난 후 1555년 경에 확고한 지도력을 확보하여 제네바에서의 지도력을 갖게 된 이후부터이다. 이 과정에서 칼빈의 신학사상이 우뚝 서게 된 것은 1553년 초에 벌어진 세르베투스 사건이었다. 제네바의 정치상황이 요동치던 상황에서 이 폭풍과 같은 사건에서 이겼기 때문에 칼빈은 오늘날까지 역사에 남는 승리자의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만일 칼빈이 패배했다면, 그의 모든 영향력은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칼빈은 정통 기독교가 지녀온 칼세돈 신앙고백을 지켜내는 대표적인 학자로 모든 유럽인들의 마음에 각인되었다.

칼빈과 동료 목사들이 세르베투스의 죽음에 관련된 것은 사실이지만, 16세기에는 어느 교회에서나 부드럽고 관용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루터는 독일 농부들에게 공격할 것을 촉구하였고, “유대인들과 그들의 거짓말에 대해서”라는 글을 써서 반유대주의를 부추겼다. 쯔빙글리는 재세례파와 격돌하는 일이 많았는데 그들의 지도자 중에 펠릭스 만즈를 익사시켜서 출교하는 것에 대해서 지지하였다. 헨리 8세 치하에서 영국 카톨릭의 최고 성직자이던 토마스 모어 경은 “이단자들”로 간주되던 자들의 사형식에서 사회를 보았다. 신앙과 교리의 차이로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대였기에 관용과 용납은 기대할 수 없었다.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한번도 사용하지를 않았다. 따라서 성경을 읽었다고는 하지만 정통기독교 신앙의 수호자들에게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에 세르베투스가 처음으로 언급된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천사”로서 영광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불신앙”이다고 설명하는 대목에서다. 세르베투스는 한분 하나님 안에는 단 하나의 인격 뿐이다고 주장했다. 삼위의 인격들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고자 하실 때 취하는 형식일 뿐이다고 생각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한 사람일 뿐이요, 그의 인간으로서 본성이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되는 것과 하나님의 영원한 성질 안에 참여하는 것을 방해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하나님은 영원하시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에게서 낳은 아들이므로 영원하지 않다고 하였다. 삼위일체의 교리를 정통 신앙으로 지켜온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회에서는 다같이 세르베투스를 감옥에 보냈고, 사형을 선고하였으며, 그의 모든 저술을 파괴하였다.

1553년 10월 27일, 마이클 세르베투스가 삼위일체를 반대하는 설교를 하였고, 유아세례를 거부하는 가르침을 베푼 죄목으로 화형에 처해졌다. 「기독교강요」 (IV.16.31.32)에서 칼빈은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세르베투스에 대해서 20가지로 논박을 하였다. 칼빈은 세르베투스가 재세례파와 연계되어 있다고 보았다. 칼빈이 그토록 주의를 주고 회개할 것은 권고하였지만, 스페인 출신으로 의사로서 명성이 있던 세르베투스는 결코 자신의 신학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완고함을 바꾸려하지 않았다. 도리어 칼빈 반대파의 사주를 받아서 시의회에서 자신이 이길 것이라고 착각하였다.

칼빈이 세르베투스의 신학사상에 대해서 죽음으로까지 내몰아야 했느냐하는 것은 크게 비판받고 있는 부분이다. 이 사건은 16세기라는 시대의 정황 속에서 이해해야할 성격을 가지고 있다. 오늘의 기준에서 볼 때에는, 이처럼 서로 신학적인 의견이 다르다하여 이단을 처벌한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미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저주선언과 이단척결을 너무나 잔인하게 시행해 오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미사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죄목으로 얼마나 많은 개신교 성도들이 피를 흘렸는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미사참석을 거부하는 자는 반정부주의자로 간주되었고, 무조건 발견하는 즉시 감옥행이었다. “성 바돌로매의 날”, 1572년 8월 23일부터 삼일 동안 프랑스 전역에서는 휴그노, 즉 칼빈주의 신앙을 가진 개신교인들을 대대적으로 살해했는데, 재판도 없고 권고도 없이 무작정 살해당한 사람들이 무려 5 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앙리 2세의 반정체제 하에 놓여있던 비엔나에서 이미 세르베투스의 재판과 화형은 결정된 사안이었다. 그 시대는 로마 가톨릭이든지, 루터파이든지, 개혁주의 교회이든지, 제세례파에서든지 자신들의 입장을 거부하는 자들을 철저히 비판하여 이단을 처리하 정죄하는 엄격한 시대였다. 만일 칼빈이 프랑스나 스페인에 들어가서 체포되었다면, 분명 화형을 당했을 것이다. 이미 칼빈의 모든 책은 로마 가톨릭에서 금서목록으로 공표하였고, 저주가 선언되어 있었다. 삼위일체 교리를 위배한 세르베투스의 처형은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당시 제네바는 기독교 도시국가였기에 신앙적인 위배는 곧 도시 질서의 파괴와 같이 취급되었다. 로마 가톨릭에서도 이미 세르베투스를 이단으로 정죄하여 이미 사형판결을 내렸다. 비엔나에서 체포되어 감옥에 있던 중에 간수를 매수해서 도망쳐 나온 죄인이었다. 이런 죄목으로 사람을 처형하는 것은 그 시대의 보편적인 문화이자 정서였다. 단지 칼빈 자신만의 죄라고 치부하는 것은 너무나 가혹한 평가이다. 그도 시대의 아들이었다.

제네바 시의 미래 방향이 걸린 사건으로 급속히 부상한 세르베투스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자리로 칼빈을 내몰았던 것이다. 시의회에서는 이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동안 정치세력으로 볼 때, 칼빈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소수였다. 1553년 10월 27일 시의회의 명령으로 세르베투스는 화형을 당했다. 그에게 신성모독, 삼위일체 부정, 동정녀 탄생과 기적에 대한 부정, 고위 성직자 모독죄 등 도합 39가지 죄목이 고소장에 기록되었다. 제네바 시당국에서는 중요사안에 대해서 쮜리히, 베른, 바젤, 샤프하우젠 등 주변 독립도시에 문의하였는데, 이번 사건에서는 모두 다 칼빈의 입장을 지지하였고 세르베투스의 사형을 주장하였다. 세르베투스의 재판과 죽음은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이 사건을 계기로 해서 칼빈을 무너뜨리고자 함정을 숨겨놓았던 자들이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다. 자신들의 음모대로 일이 진행되기를 기대했던 반대파들은 시민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말았다. 결과는 그들의 참패였다. 그들은 시민들의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리어 칼빈은 일관성있는 지도자이자 책임감 있는 선생으로 보호를 받게 되었다.

 

7. 근대 시민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경제체제

 

16세기 종교개혁의 신앙이 형성되기까지, 그리고 그 정착과정에서, 칼빈의 공헌과 노력이 크나큰 영향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칼빈의 교회론은 모든 장로교회와 개혁주의 교회가 따르는 체제이다. 칼빈의 구원론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연합으로 정리되었다. 인간의 공로와 협력은 전혀 근거가 없다. 칼빈이 제창한 교회 제도와 단호한 이단 제재 조치들은 지금까지도 지켜져 오고 있다.

칼빈주의라는 새로운 신앙형태가 불러일으킨 개혁의 영향은 각 방면으로 확산되었다. 근대 시민 민주주의 형성과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압축되고 있다. 칼빈의 정치적 영향력은 프랑스에서 크게 발휘되었다. 세속 군주가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는 잘못된 결정을 내릴 때에, 기독교 신자들은 제한된 범위 안에서 불복종할 권리가 있음을 옹호하였다. 이런 정부제도에 관한 가르침은 1600년 전후의 유럽에서는 최초의 혁신이었다. 로마 가톨릭 국가에서나 루터파 독일 영주들에게는 상상도 하지 못할 엄청난 파장을 미치게 되었다.

“제네바 바이블”을 통해서 드러난 칼빈의 가르침이 널피 퍼지게 되었다. 칼빈의 격려로 1557년 제네바에서 처음 발간된 이 영어번역은 휫팅햄 (Whittingham)이 신약을, 길비 (Gilby)가 구약을 맡았다. 이 “제네바 성경”의 각주 란에 보면, 칼빈이 주장하던 시민권리에 대한 해설이 들어있는데, 국왕이나 군주들이 보면 소름이 끼칠 내용들이다. 예를 들면, 출애굽기 1장 17절에 유대 산파들이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려냈다. “제네바 성경”은 이 구절의 해설 부분에 왕의 부당한 명령은 복종할 의무가 없다는 요지의 개혁사상을 강하게 피력하였다. 이처럼 많은 해설 부분에서 왕권신수설에 도전하는 개혁주의 정치사상들이 제시된 것이다. 영국 왕 제임스 1세는 이런 시민적인 인권사상이 확산되면 절대적인 왕권통치가 유지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새로운 해설 성경을 제작하여 51년 후에 1611년 “킹 제임스 영역성경”을 발간하게 된다. 그리고 “제네바 바이블”은 더 이상 읽을 수 없게 금서조처 되었다. 하지만, 이미 이런 주권적인 부분을 배우고 터득하여 미국으로 건너가던 청교도들이 가지고 갔던 성경이었다. 알라바마 대학교 미국헌법학 교수 죤 에이드스모이 (John Eidsmoe)는 칼빈이야말로 죠지 와싱턴이나 새뮤얼 아담스와 같은 영향을 끼친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평가하였다. 칼빈주의 신앙으로 형성된 뉴잉글랜드는 요나단 에드워즈의 대각성 운동 이후에 유럽의 예속에서 벗어나서 하나의 시민국가로 독립선언 (1776)을 하게 된다.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공화국 체제하에서 인권과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려던 칼빈의 노력은 시장경제의 영역에서도 “경건한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형성하는데 기여하였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1904)은 경제적 역동성을 만들어낸 프랑스와 산업혁명에 대한 해석으로 유명하다. 근대 자본주의가 발전되어 나온 정신적인 배경에는 근면, 금욕적인 절약과 저축, 직업의 소명의식, 노동의 가치를 중요시 여긴 칼빈의 신학적 유산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에른스트 트뢸취의 「기독교 교회의 사회적 교훈」 (1911)에서도 칼빈주의는 새로운 이론적 정립과 경험적인 보충과 학문적인 정당화 작업을 통해서 근대 시민사회의 형성에 근간이 되었다고 평가하였다. 베버와 트뢸취의 이론에 대해서 지금까지 수없는 논쟁이 일어났다. 특히 ‘자본주의’와 칼빈주의가 연관이 있느냐의 여부에 대해서 역사학자, 철학자, 사회학자, 경제학자들이 숱하게 많은 논문과 저술을 발표하였다.

종교개혁 첫 세대에 칼빈주의는 공화정부를 지지하는 자들의 대명사가 되었고, 가톨릭이나 루터파에서 볼 때에는 반란분자들이나 다름없었다. 1561년경에 프랑스에서 개혁주의 교회들이 매우 빠르게 확산되었는데, 군주제도를 폐지하고 스위스 독립도시 연합과 같은 체제로 바꾸고자 하는 자들이라고 취급되었다. 단일 군주가 나라를 지배하고 다스리던 것이 보편적이던 시대에 개혁교회의 입장은 신앙의 모욕과 같은 것이라고 정죄 하였다. 이런 것은 칼빈이 「기독교 강요」 제 4권에서 합법적으로 구성된 권세에 대해서는 순종할 의무가 있다고 제시한 것보다는 훨씬 앞서 나가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칼빈주의자들은 로마 가톨릭의 반대파에 대해서 소요를 일으키는 불순분자가 아니라는 것을 역설하였는데, 군주들의 건강과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느냐고 반문하였다. 도리어 교황주의자들이 단일 군주론을 입으로만 주장하고 있을 뿐 (Juan de Mariana & Francisco Suarez) 국가에 충성하지 않고 있으니, 교황이 임시적인 세속 권세를 지도하고 관찰하는 권세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더 위험한 발상이라고 하였다.

교황주의자들은 그들의 독재적인 교황의 깃발 아래서 노예처럼 복종하는 체제를 지향하였고, 루터파에서는 그들의 군주들을 위해서 싸웠으나, 칼빈주의자들은 시민들의 자유를 위해서 일한다고 볼테르는 평가하였다. 미국의 독립선언과 프랑스 혁명 (1789)이 일어난 후에, 미국의 민주주의가 급속히 발전되면서 퓨리턴들이 남긴 유산이 크게 발휘되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Francois Guizot, James Froude, Charles Bancroft) 미국에서 칼빈주의와 민주정치체제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해석하였다. 칼빈주의 신학이 가르쳐지는 곳에서는 항상 시민의 자유가 함께 강조되었다. 16세기에 칼빈이 제네바에서 세우고자 했던 시민들의 권위와 인권의식은 18세기에 미국의 독립과정에 영향을 미쳐서 전체 국가제도 형성에 그대로 구현되도록 법과 제도적 장치가 만들어졌다. 개인의 인권과 가치와 책임을 존중하고 국가의 권력을 최소화하는데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적 칼빈주의는 근대 사회의 발전과정에서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이자를 가급적이면 적게 받도록 하는 것을 권장하였다. 정당한 이자는 허용하지만, 고리대금은 금지되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 국가에서는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상업적인 거래와 산업경제, 물자 생산에의 열정이 제네바의 시장경제를 윤택하게 만들었다. 반면에 로마 가톨릭에서는 게으른 성직자들과 예수회파의 지도자들이 전혀 시민들을 깨우지 못하고 있었다. 각종 축일제도를 준수하는 동안에 게으르게 지내야만 적응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 교회가 경제 성장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개혁교회에서는 이런 게으름을 두렵게 생각하였고, 스마트하게 대처하였다. 하지만 칼빈 자신은 현대 탐욕스런 자본주의 발전의 시조라거나 옹호자라고 간주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앙드레 비엘레의 박사학위 논문 “칼빈의 경제 사회 사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칼빈은 이익금이나 부유한 자들의 재물을 재분배하도록 강조하였기 때문에, 오늘날 산업자본주의에는 전혀 연계되는 사상을 주장한 적이 없으므로 최근의 탐욕적인 자본주의 논쟁과는 전혀 해당사항이 없다.

II. 오늘의 갱신과 지속적인 개혁의 과제

 

개혁주의 신학은 칼빈에게서 물려받은 유산과 전통을 가지고 있다. 칼빈의 후예들은 “더 개혁된 교회”를 세우고자 했고, “항상 개혁하는 교회”가 되려고 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루터와 칼빈의 차이점을 알았다. 루터의 후계자들은 개혁을 원하고 있었는데, 칼빈의 추종자들은 “더욱 개혁된” 교회를 세우고자 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중단없는 갱신과 개혁”이 바로 칼빈이 남긴 교훈이자 개혁주의 전통이 되었다. 칼빈과 그 후의 다양한 사상들이 종합된 칼빈주의가 기여한 종교개혁의 사상은 새로운 한국이라는 환경에서 더욱 정착하기가 어렵고 복합적이다. 한국교회는 다시 한번 종교개혁과 같은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다. 칼빈의 신학을 따르고 있는 한국 장로교회의 총회만 보더라도, 매년 반복되는 혼란과 분열, 대립과 충돌하는 안타까운 일들이 2012년도에도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칼빈과 제네바 교회의 개혁을 잘 알고 있는 한국교회라고 한다면 성경으로 돌아가서 완전히 청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신학적인 분별력과 윤리적인 열매를 함께 세우고자 하는 자성이 있어야 하는 바, 담임목사직 세습, 불건전한 이단들의 분별, 깨끗하고 건전한 회의진행, 금권시비가 없는 총회운영 등이 하루속히 정립되어야만 한다.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연합기관들은 지금 정통기독교가 무엇인가를 놓고서 혼란에 빠져버렸다. 전체 한국교회를 위해서 봉사하는 단체로 출범했지만, 그 기능을 의심받는 교단이나 교회 연합단체들과 기독교 언론사들이 통제불능 상태에 빠져 버린지 오래되었다. 매년 기독교 총연합회의 회장선거가 불미스러운 추문으로 신뢰를 잃어버렸고, 상당수 기독교계 언론사들은 생계의 수단으로 전락하여 이단연루설을 떨쳐버릴 수 없게 되었다.

 

1. 기독교 복음과 정통신앙을 지키고 있는가?

정통 기독교 신앙은 성경의 권위와 영감을 중요하게 지켜왔다. 자유주의 신학에 맞서서 오직 성경을 유일한 하나님의 계시로서 지켜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강조되어진 것을 요약하자면, “sola scriptura” (오직 성경으로만)와 “tota scriptura” (전체 성경으로만) 이었다. 그런데, 이런 신앙고백의 첫째 조항을 선언하는 것으로만 그쳐서는 안된다. 실제 교회의 현장에서 성경 말씀을 높이고 순종하면서 나가야 한다.

성경을 믿는다는 것만으로는 안심하거나 만족할 수 없다. 성경에 있는 가르침보다는 전혀 근거없는 한 두 명의 해석을 절대적으로 따라간다면, 정통신앙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사도신경이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통해서 전체를 종합하는데도, 자꾸만 한 사람의 해석에 집착하는 것은 자신들이 정통신앙에서 벗어났다는 증거이다. 더구나, 성경에 대해서 존중하지 않으니, 성경의 정확무오성을 믿는다는 서약이나 서명을 했다는 목회자들마저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생각하고 결정하는 일에 있어서 성경에 근거하여 살아가야 한다.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삼고 살아가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헬라어나 히브리어를 공부하고 원어로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는데도, 불가지론에 빠져있는 현대 독일신학자들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성경에 쓰여진 기록보다는 세상에서 제공되는 자료에 더 신임을 두려 한다면, 얼마든지 성경에 대해서 의심하게 마련이다.

개혁주의 교회가 가져야할 정통신학은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헬라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과율을 따르지 않는 순수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원인과 결과를 확인하고 믿으려하는 자세를 거부한다. 성경은 우리가 질문하고, 따지려 하는 문제에 대해서 답변하는 책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지혜의 영, 진리의 영, 주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성령께서 인도하심에 따라서 의존하려 한다. 성경에서 직접 답변을 들을 수 없는 문제일수록, 더 신중하고 기도가 필요하다.

정도를 이탈하지 않도록 한국 개혁주의 교단의 주요 문제를 토론하고 결정하는 각종 모임에서 허망한 교회 정치꾼들의 허세를 분별해야만 한다. 사도행전 15장 8절 이하에 보면, 예루살렘 총회에서는 철저히 기도하면서 헛된 것들을 버리기로 결정하였다.

 

2. 하나님의 권위와 영광을 탈취하고 있지는 않는가?

지금 한국사회에서는 한마디로 줄 세우기에 대해서 반성하고 있다. 일류 명문대학교에만 매달리는 세태에 대한 반성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그동안 한국교회에서도 세속화의 영향으로 모든 기준이 변질되어 버렸다. 교회는 그저 얼마나 숫자가 많이 모이느냐, 그 목회자가 얼마 공부를 많이 했느냐, 어떤 대학교를 졸업했느냐 등 물량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한국교회는 서로 경쟁적으로 대형교단, 대형교회라는 헛된 세속주의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된다. 이제는 더 이상 목회 성장학의 물량주의에 따라서 좌우되어서는 안된다. 한국교회는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한다. 구원의 모든 결정과 집행에서 하나님의 독점적인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만이 우리의 임무이다.

하나님은 높고 영광스럽고 존귀한 분이시다. 매 주일 성도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경배를 올린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위에 있음이라”고 하셨다 (전도서 5:2). 하나님의 존귀하신 명예와 이름을 짓밟은 교회는 거짓된 집단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속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광은 성경에 나와있는 바와 같이 수 천년 인류 구원의 사건들 속에서 자세히 드러난다. 그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내셨다. 사람들은 마치 거대한 바위, 큰 나무, 거대한 산을 놓고서 경배하듯이 사람을 영웅화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옛 성도는 고백한다. 시편 115:1,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

(고후 4:4)라고 고백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광의 형상”(히 1:3)이시요, “영광의 광채”이시다.

사람이나, 어떤 교회나, 어떤 교단이 영광을 받을 수 없다. 결코, 그리스도의 영광을 탈취하는 자들은 망하게 된다. 인간은 죄인이다.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선언하였다. 구약시대의 기록으로 돌아가 보면, 엘리의 며느리가 이스라엘의 몰락을 보면서,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증거라고 하였다. 사무엘상 4:19-22절에 보면, “이가봇”이라. 영광이 떠났다. 엘리 제사장의 시대에서 사무엘 시대로 전화되는 그 시기를 통칭하는 “이가봇”은 비극의 증거다. 시아버지 엘리의 사망, 홉니와 비느하스의 죽음,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기고 말았다.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이가봇”인가, “임마누엘”인가? 독선과 분열을 일삼고 있다면, “이가봇”이다. 저들 밖에 목자들은 하나님께 목마른 자들이요 가난한 자들이었으나, “임마누엘”의 축복을 누렸다. 이미 부요하고 배부른 자들에게는 “임마누엘”보다는 “이가봇”이 선언되었다.

오늘날도 영광이 떠난 비극의 현장들이 펼쳐져 있지만, 회복과 은혜의 성령을 기대하면서 나아가야 한다. 오직 예수님만이 “살려주시는 영”이시다 (고전 15장 45절). 오늘날도 영광이 떠난 시대처럼, 예배가 하나님 중심에서 벗어난다. 교회에 모인 사람들의 기대도 역시 성공뿐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역사를 자랑한다하여도, 감각적인 자기 욕심으로 쓰러지고 만다.

 

3. 시대의 파수군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자들은 거의 다 헌신과 고난의 좁은 길을 걸어갔지만, 모두 다 시대의 파수군이었다. 졸지 않고 깨어서 거짓을 혁파하라는 나팔과 종을 울렸다. 루터는 피신과 질병의 두려움을 감당해야 했다. 마지막 10년은 질병으로 고난 속에 살다가 63세로 마쳤다. 쯔빙글리는 로마 가톨릭의 침공 현장에서 격려하며 참전하였다가 화살에 맞아서 47세로 절명했다. 칼빈은 걸어다니는 병원이라고 불리울 만큼 엄청난 업무를 감당하였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시대적 사명을 칼빈과 제네바의 종교개혁에서 배우게 되는 바, 이 시대와 현대 사회와 세계 인류를 향해서 교회가 파숫군이 되어야 한다. 로마 가톨릭의 혼란과 혼돈의 상황을 안타깝게 지켜보면서, 거듭되는 교리의 모순성과 곡해를 철저히 분별하던 칼빈의 호소를 접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려는 우리에게는 각자의 몫으로 주어진 엄청난 시대적 사명이 있다. 에스겔 33장 1-7절을 통해서 참된 신자들이 해야 할 임무가 선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말하여 이르라 가령 내가 칼을 한 땅에 임하게 한다 하자 그 땅 백성이 자기들 가운데의 하나를 택하여 파수꾼을 삼은

그 사람이 그 땅에 칼이 임함을 보고 나팔을 불어 백성에게 경고하되 그들이 나팔 소리를 듣고도 정신 차리지 아니하므로 그 임하는 칼에 제거함을 당하면 그 피가 자기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그가 경고를 받았던들 자기 생명을 보전하였을 것이나 나팔 소리를 듣고도 경고를 받지 아니하였으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러나 칼이 임함을 파수꾼이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하지 아니하므로 그 중의 한 사람이 그 임하는 칼에 제거 당하면 그는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제거되려니와 그 죄는 내가 파수꾼의 손에서 찾으리라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지어다“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칼빈은 탁월한 분별력과 출중한 성경 지식을 갖추고, 깨어서 파수군의 역할을 감당해야만 하였다. 믿음의 분량을 남달리 주신 사역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새벽기도를 중심으로 신앙훈련을 하고 있는 한국교회가 깨어있지 못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냥 바리새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지도하여 구원의 길로 이끌었다.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사명이 남겨져 있다. 모세의 임무와 당시 백성들의 신앙의 정도 혹은 인식수준을 오늘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모세의 가나안 여정은 기적의 연속이었다. 죽음의 공포와 미래에의 불안과 함께 하였고, 생소한 광야의 불편함이 가로막았다. 하지만, 자유의 가치와 더없이 소중한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적인 기쁨과 감격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모세의 사명은 우리가 감당해야할 시대적 소명과 무관하지 않다. 여전히 우리 한국교회 성도들도 광야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물과 떡과 고기가 있는 현장에서도 여전히 불평하면서 방황하고 있다.

가나안 여정에 나서기 전에 유대인들은 처참한 상태에서 하나님께 간구하며 부르짖었다. 그들의 현실은 참담하였고,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그들은 어떤 댓가를 지불하고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하나님의 은혜로 출발한 것이다. 어떤 결사항전의 각오가 있었던가? 그저 지속되는 노역과 압박 속에서 무작정 죽겠습니다는 탄식 이외에 어떤 신앙적인 행동도 없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은 고역을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출 2:23-25).

출애굽 구원역사의 기적은 하나님의 약속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당장 직면한 현실은 물도 없고, 음식도 없고, 그저 보이는 것은 바위뿐이었다. 그곳에 정말 하나님이 아니 계셨던가? 그곳에는 하나님이 살아계셨고, 즉각 개입하셨다. 그러나 인생들은 하나님을 마치 없는 분을 취급했다. 불순종과 불복종으로 망한 것이다. 전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고쳐지고, 훈련받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를 정도였다. 모세와 아론을 겁박하고, 죽이려고 했으며, 오히려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속박과 우상숭배의 애굽으로, 과거로 다시 돌아가려고 획책했다.

 

4.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개혁해야 할 내용과 방법의 선정은 무엇을 향한 개혁인가를 분명히 하는데서 정당한 안목으로 파악될 수 있다. 교회가 개혁해나가야 한다는 말은 공로를 자랑할 만한 사람의 업적이 칭송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경건의 회복에 있어야만 개혁의 참된 내용이 유지될 수 있다. 현대 개혁주의 교회들은 급속한 문명의 세속화와 학문의 변질 속에서 큰 위협을 받고 있다. 지금 세계교회는 세속화와 세속주의라는 엄청난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개혁주의 교회는 로마서 12장 1-2절을 가장 많이 암송하면서 신앙생활을 지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오직 너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어떤 형태의 예배라 하더라도, 교회에 일단 출석하면 다 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겉으로 보여지는 참석자 수가 많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주일 성수를 한다고 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한국교회가 지금 가장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건한 순종이 후퇴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기독교의 표현적 본질 중에 하나인 예배가 자꾸만 상업화된 어떤 대형집회처럼 흉내를 내려고만 한다. 모든 집회들의 내용이 성경을 중심적으로 증거하고 전파하기 보다는 모여든 사람들의 감정적 반응에 초점을 모으고 있다. 현대적인 모든 방식을 거부하자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저 손을 들고 춤추고 노래하는 집회가 되어야만 은혜가 넘치는 것은 아닐 터이다.

세계교회의 최근 변화를 잘 기술한 책이 나왔다. 콜린 헨슨이 저술한 최근의 지적을 보면, 변화되고 흐름을 집약했다고 말할 수 있다. 요즘 수정주의 노선을 채택한 목회자들은 신앙고백서에 근거를 둔 역사적인 칼빈주의는 무겁고, 두렵고, 엄숙하다고 판정을 내리고, 대부분 대형집회에서 젊은이들이 손을 들고 대중음악처럼 흘러나오는 감정주의적 복음송에 휩쓸리는 현상을 매우 긍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서 핸슨은 미국에서의 칼빈주의는 19세기 말로 끝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별로 근거가 없어 보인다. 20세기에는 과연 칼빈주의가 죽어버렸던가? 칼빈의 주석과 루이스 벌코프의 조직신학은 모든 신학교의 교재로 읽혀졌었다. 성경을 수호하려던 일단의 신학자들이 메이첸 박사와 함께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을 창설한 것이 1929년이다. 대부분의 알미니안주의 교회와 미국 척 스미스의 갈보리 채플, 은사운동을 하는 집회처럼 흔들거리는 몸짓으로 참여하는 것이 새로운 칼빈주의라는 말은 동의할 수 없는 개념이다.

핸슨의 책에 등장하는 새로운 칼빈주의자들은 청교도 신앙을 완전히 거부하고 있다. 그들은 종전의 예배를 그대로 답습하려고 하지 않는다. 존 파이퍼 목사가 그 전형적인 모델이다. 열정으로 집약되는 것이 칼빈주의라고 한다면, 우리에게는 그 열정을 다시 불태울 사명이 주어져 있다.

최근에 “새로운 칼빈주의”를 내세우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지도자들을 볼 수 있는데 ( John Piper, John MacAthur, Mark Dever, Al Molher 등) 대다수가 대중집회를 잘 인도하는 칼빈주의적 침례교회 목회자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존 맥아더 목사의 “단호한” (Resolved) 집회도 역시 극단적인 오순절 은사집회의 방식과 칼빈주의가 혼합되어 있다. 음악적인 특징을 보면 세속적인 풍경과 전혀 다르지 않고, 팝 콘서트와 다를 바 없다. 거의 현대인들의 취향에 맞춰서 몸짓으로 예배하는 것이라고 한다. 과연 그런 예배가 가능한지 우리는 묻고 싶다.

최근에 오순절 은사운동의 영향력이 크고, 대중집회를 주도하는 현상들이 나타났었다. 일부에서는 오순절파 은사주의자들의 행태와 칼빈주의를 함께 혼합시키고 있다. 마하니 ( C. J. Mahaney)는 대중집회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강사인데, 소위 새로운 칼빈주의자들이야말로 마땅히 사도적 은사 종결론의 입장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씨애틀 마스 힐 교회의 드리스콜 (Mark Driscoll)이 새로운 칼빈주의 교회의 모델이라고 한다면 걱정과 우려는 더욱 심각해진다. 그는 모든 현대적인 최첨단의 방식으로 준비하고 계획된 집회와 예배를 주도하고 있다. 지금 그의 교회는 자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대립과 갈등이 심각해서 앞으로 과여 그가 진실한 지도자로서 인정을 받게 될지 우려된다. 미국에서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집회의 인도자들은 대중 콘서트와 다를 바 없다. 그들이 젊은이들의 열열한 인기를 유지하고 있는 방식은 전통적인 기독교와 세속주의 대중집회의 ‘역동성’과 혼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리스 (Joshua Harris)가 주도하는 “새로운 태도” (New Attitude)에서도 역시 젊은이들을 위한 집회가 거대한 음악 밴드와 호흡하면서 세속적인 콘서트와 유사한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위해서 찬양한다고 말한다.

첫째, 헤비 메탈 악기를 포함해서 오순절 은사파 예배의 흐름을 그대로 채용하고 있다. 둘째, 세속주의와 구분하지 않고 오히려 전통진리와 혼합하고 있다.

셋째, 이들 소위 새로운 칼빈주의자들은 기독교인의 주요 결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격적인 인도하심을 근간으로 삼지 않는다. 그들은 전심으로 부르짖고 마음을 찢는 기도가 필요하지도 않다는 듯이 그저 대중적인 집회에 열광할 뿐이다.

넷째, 십계명 중에서 제 사계명의 우상숭배를 매우 경솔하게 취급한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보내야한다는 것을 전혀 거론하지도 않는다. 이미 세속적인 문화의 힘이 엄청나게 강력하기 때문에 제대로 대처하지도 못한 채 전통적인 가치규범들이 모두 다 무너지고 말았다. 이미 서양의 기독교가 몰락하고 있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들이다. 세속주의는 매우 성공한 듯 보인다. 기독교인들마저도 따라가지 않을 수 없을만큼 매혹적이다. 일부 교회들은 적당한 세속화를 아주 탁월한 감각을 가지고 받아들였다. 기독교적인 훈련과 진지한 반성보다는 그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생활방식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하는 현대인들을 부추기고 있다. 기독교가 세상과 구별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거룩한 윤리를 건설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잊혀져 버렸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돈과 세상과 이별해야만 한다는 생각은 거의 없다. 결국, 하나님의 주권을 존중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없다는 말이다.

여러분이 청교도들의 거룩한 생활을 실천하기는 불편해 하고 싫어하면서, 청교도들이 가졌던 구원론을 강단에서 설교할 때만 인용한다면 과연 한국교회가 거룩한 공동체가 될 수 있겠는가? 기독교의 기본 신학을 제대로 정립하지도 못하였으면서 정통 보수신앙의 소유자라고 자처하고자 소속교단이나 학력이나 경력을 내세워서 남들에게서 인정받으려 하는가? 오랫동안 특정 소수의 인사들이 결정권을 좌우하면서도 아무런 이권이나 명예욕이 없이 사명감에 충실하였다는 식으로 호도하는 태도를 하나님 앞에서 반성을 하지 않으려 하는가? 지극히 소수의 대형교회가 한국교회를 이끌고 있다고 해야 하는가? 그런 세속화된 물량주의에 속아서 한국과 세계 선교의 중대한 임무를 제대로 감당하고자 하는 작은 노력들을 무시하고 외면할 것인가? 기독교 언론의 부패와 오염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으며, 떠돌아다니는 보도들을 분별하고 있는가? 역사적 신앙고백들과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으면서 새로운 형태의 칼빈주의가 다시 나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열심과 열정이 넘치는 칼빈주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세속주의와 감정주의와 직통계시파의 은사주의자들이 하는 것과 유사한 혼란을 빚어내자는 것이 아닌가?

끝으로 한국교회는 더 큰 안목으로 사회와 가정의 변화를 이끌고 나가야 할 처지에 놓여있다. 한국사회는 해외에서 결혼의 기회와 직업을 얻기 위해서 찾아온 많은 이민자들로 인해서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문화적 다양성과 인종의 다양화가 밀려들어왔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이들을 맞이할 준비가 부족하고, 인권의식이 향상되지 못하였다. 여성의 인권과 어린 아이들의 취약성은 여전히 후진국 상태에 놓였고, 시민사회의 포용력이 부족하다. 해외에서 들어온 이주자들과 함께 종교적 다양성을 허용해야할 처지인데, 선진국에 비하면 이론도 실제도 넉넉하지 못하다. 인종적 편견의식을 벗어나야 하고, 단선적인 민족주의에 대한 대안을 배워야 할 때이다.

한국교회는 기독교신학의 다원주의가 퍼트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주의에 제대로 직면하여 기독교적인 신앙을 세워야할 중대한 시점에 처해있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사상적 위기는 결코 16세기 칼빈과 종교개혁자들의 문제에 비해서 작지 않다. 성경적 절대가치가 훼손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모든 성도들과 교회의 지도자들이 힘을 합하여 중단없는 갱신과 지속적인 쇄신의 역할을 감당해야만 할 때이다.


일반신학자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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