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교회와 한국 장로교회(허순길 박사)

by 손재호 on Oct 11,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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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회와 한국 장로교회

허순길 목사(전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1. 유럽개혁교회와 한국교회의 신앙고백

 

유럽이 종교 개혁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을 때, 루터파 교회는 로마 교회의 화체설 입장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고, 그리고 주변의 다른 영주들도 루터가 만든 요리문답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래서 경건한 사람이었던 프레드릭 영주가 당시 학식이 뛰어났던 학자 두 사람을 동원하여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만들었다. 자기가 다스리는 주에서는 이것을 가르치게 했다. (당시 독일은 6개의 주로 나뉘어져서 각기 영주들이 다스렸어요.)

 

그런데 나중에 이것이 문제가 되어 독일 황제 칼의 소환을 받아 재판이 열렸을 때(칼빈의 색채가 있다고 해서 루터파 쪽에서 제소했기에 열린 재판), 황제 앞에서 프레드릭은 단호하게 자신의 신앙이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과 같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자신은 칼빈을 알지도 못하고, 다만 성경의 가르침을 따랐을 뿐이라고 했다.(하지만 사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작성한 두 사람의 신학자는 칼빈에게서 배운 사람들이죠.)

 

그래서 프레드릭은 황제로부터 '경건한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요리문답은 이후 서서히 주변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후 알미니우스 문제로 열린 화란의 돌트 회의에서 칼빈주의 5대 교리를 더더욱 천명하고, 알미니우스를 정죄하고, 내친 김에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도 개혁파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개혁교회라고 하면 주로 돌트신조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따르고 있다.

 

장로교회의 경우, 칼빈에게서 배운 존 낙스가 스코틀랜드로 돌아가서 세운 교회이다. 그래서 장로교회의 시조는 존 낙스라고 볼 수 있다. 이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문서들이 형성되자, 아니 좀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회의에 참석한 주된 학자들이 스코틀랜드 교회 출신들이었다. 그래서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채택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물론 1967년도에 미국 장로교회는 이 신앙고백서에 2가지 항목을 더해서 총 35장으로 확장시켰다.

 

개혁교회와 장로교회는 같은 신앙노선에 있다. 다 칼빈주의의 입장을 취하기 때문이다. 유럽의 개혁교회와 영, 미를 거쳐 온 한국 장로교회는 본질적으로 같은 내용의 개혁주의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으며 칼빈에게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런데 유럽 개혁교회 신앙고백은 상당 부분 칼빈의 직접적 영향 아래 작성되었고, 그 대부분이 종교개혁의 뜨거운 열기가 아직 식지 않았을 때 작성되었다(벨직신앙고백=Belgic Confession 1561,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Heidelberg Catechism 1563, 돌트신경=Canons of Dort 1618,9). 그래서 그 내용자체에 성경적인 직설적 표현이 많이 사용되고 있고, 단순한 면이 나타나고 있다. 이에 비해 장로교의 신앙고백은 이보다 약 1세기 후 웨스트민스터 총회(Westminster Assembly)에서 영국의 청교도적 개혁신앙을 가진 신학자들과 스코틀랜드(Scottland)신학자들의 협력으로 작성되었다.(1643-46). 이때는 이미 알미니안 주의가 화란 돌트레흐트에서 열린 국제적 개혁주의 신학자 대회에서 정죄를 받은 후요, 칼빈주의가 유럽대륙에서 제세례파와 루터파와의 구별이 분명하게 드러난 뒤였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총회(Westminster Assembly)에서 1646년에 작성 완료된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의 신앙고백서의 내용은 매우 조직적이고 세밀하여 신앙고백서 중에서 가장 완벽한 것으로 간주되어 오고 있다.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앙고백이 작성된 때는 칼빈이 서거한지 이미 1세기도 넘은 때였기 때문에 그의 영향은 매우 간접적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화란에서 일어난 알미니안(Arminian)주의를 정죄한 후였기 때문에 돌트신경의 내용인 소위 칼빈주의의 5대 교리의 내용이 함축되어 있었다. 그런데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앙고백의 내용은 유럽의 개혁교회가 받은 직설적이고 단순한 벨직(Belgic)신앙고백에 비해 매우 스콜라틱(scholastic)한 면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벨직(Belgic) 신앙고백은 체제상 매우 개인과 직결되어 매 장이 "우리는 중심으로 .... 믿는다. (We all believe with the heart....." "우리는... 고백한다"(We congess...)로 되어 있어 친근감을 느끼게 하나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앙고백은 객관적으로 교리를 진술함으로 친밀감을 덜 느끼게 하는 면이 있다.

 

그런데 신학과 교리면에서 다 같은 칼빈을 좇으면서 유럽 대륙의 교회와 영미의 교회는 각기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유럽의 교회들은 개혁교회(Reformed Church)로, 스코틀랜드(Scotland), 아일랜드(Ireland) 등의 영연방의 것은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로 불리어 왔다. 대륙의 교회를 "개혁교회"라 부르게된 것은 신학, 교회, 정치 모든 면에서 변질된 로마교회에서 개혁된 교회라는 의미에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불려졌고, 스코틀랜드(Scotland)를 위시한 영연방에서 "장로교회"라 부르게 된 것은 교회 정치에 있어서 로마교회와 영국교회의 감독정치와는 다른 장로회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다는데서 온 것으로 보인다.

 

한국장로교회는 영연방인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등으로부터 미국을 거쳐 온 장로교회의 신학, 신앙, 생활의 전통을 이어 받았다. 그것은 한국에 선교를 시작하고 교회의 터를 놓은 분들이 주로 미국 장로교회의 선교사들이었기 때문이다. 한국 장로교는 장로교의 모교회라 할 수 있는 스코틀랜드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지 못했다. 미 장로교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기 전 만주에서 선교하던 스코틀랜드 선교사들(John Ross, John MacIntire등)이, 한국 서북 지방에서 만주를 드나드는 한인들을 접촉, 전도하고, 이들과 함께 성경을 번역하여 한국에 보급함으로 한국선교에 큰 공헌을 했지만, 한국 땅 밖에서 봉사했을 뿐 한국교회에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신학과 신앙고백적 생활에 대한 어떤 전통도 남기지는 못했다.

 

한국의 장로교 최초 복음선교사인 언더우드(H. G. Underwood)는 영국태생이었지만 미국에 이주한 후 그의 부모들이 화란계 개혁교회에 가담했고, 그는 뉴 브라운슈바이크(New Brunswick)에 있는 화란 개혁신학교(The Dutch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을 수학했었다. 그러기에 그는 어느 정도 대륙의 개혁교회 전통의 신학과 교회생활에 접하였었다. 그러나 그가 대륙 개혁교회의 신학적, 신앙고백적 전통을 한국에 소개하거나 심어준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당시 미국의 주도적 장로교 신학교인 멕코믹(McCormick)이나 프린스톤(Princeton)신학교 출신들 보다도 훨씬 미국의 복음주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여진다. 그래서 그는 한국 선교의 개척자로 큰 봉사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륙의 개혁교회 전통도, 미국의 장로교 전통도 남겨주지 못했다. 단지 넓은 복음주의적 신앙과 생활의 영향을 남겼을 뿐이다.

 

2. 양 교회의 신앙고백에 대한 관점

 

한국 장로교회는 한국 교회의 터를 놓은 미국, 캐나다, 호주의 장로교회 전통의 영향을 받았다. 그 가운데 미 남북 장로교회의 영향이 거의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초기 한국 장로교 선교사들은 장로교의 교리와 생활의 기반이 되는 신앙고백 문제에 대하여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 방면에서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첫째는, 한국 장로교회 독노회를 조직할 때(1907), 한국 장로교회의 터를 놓으면서 선교사들은 역사적 장로교회의 신앙고백 내용인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을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채용을 하지 않고, 1904년 인도의 장로교회가 채용한 간단한 소위 "12신조"를 채용한 것이다, 아직 교회역사가 짧아 어린 형편에 있음으로 감당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미 선교가 시작된 지 23년이 되었고 비교적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동안 하나님의 축복으로 교세는 세계 어느 나라 장로교회 공동체에 뒤지지 않을 만큼 큰 집단을 이루었었다.

 

당시 교회수(지교회, 회당)가 1,472교회요, 성찬에 참여하는 교인수가 18.061명, 원입교인이 19,791명, 교회지도자인 조사가 160명, 전도인이 330명이나 되었다. 독노회는 12신조를 "대한장로교회신경"으로 채용하면서 그 서문에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앙고백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특별히 웨스트민스터 신경과성경요리문답 대소 책자는 성경을 밝히 해석한 책인즉 우리교회와 신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칠 것으로 알며"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을 끄는 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서 내용을 교회와 신학교에서 가르칠 것으로만 알고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신앙고백 내용을 신앙고백으로 보기보다는 단순히 "성경을 밝히 해석한 책'으로만 보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교회와 신앙고백의 관계에 대한 매우 소극적 관계의 표현을 보게 된다. 신앙고백을 교회의 고백으로 보지 않은 것이다. 물론 신앙고백의 내용은 성경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성경은 절대 무오하고 신앙과 생활에 절대 규범이 된다. 그러나 신앙고백은 인간이 성경으로부터 가져온 것이요. 교정을 요하는 오류도 포함될 수 있다. 그렇다고 신앙고백을 "성경을 밝히 해석한 책'으로만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는 교회사를 이끌어 가시는 교회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섭리적 역사를 간과하는 일이고, 지난날 주의 교회가 받아 고백해 온 역사적 유산을 등한 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 고백내용에서 오류가 발견되기 전에는 그것을 그대로 고백하고, 그대로 사는 것이 교회의 의무이다. 이런 초대 선교사들의 신앙고백에 대한 소극적 접근을 볼 때, 한국교회 초대 선교사들이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이었음은 틀림없으나 개혁주의 신앙고백을 귀중히 여기고 장로교회의 정체를 뚜렷하게 하는데는 매우 약했었다. 곧 저들이 개혁주의 신앙고백을 터로 하고 장로교회를 세운 "개혁신앙고백교회"의 건설자들이었다고는 보기 어려운 것이다.

 

둘째로, 한국 장로교회 초대선교사들 대부분은 전형적인 미국적 복음주의자들로 알미니안 주의를 경계하지 않는 교회일치주의자들이었다. 1905년 재한 서울 장로회 일치 위원회(The Seoul Presbyterian Committee on Union=선교사 단체임)는 "대한예수교회(혹은 대한 그리스도교회=the Church of Christ in Korea)를 설립할 때가 무르익었다고 보고, 그 해 9월에 장, 감 선교사 150명이 함께 조직한 "재한 복음주의 선교회 총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 in Kroea)에 한국에 하나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울 것을 제의하여 수용하게 했다. 이 총공의회의 목적은 "선교활동의 협력과 단 하나의 원주민 복음주의 교회의 조직(Cooperation in missionary drrorts and eventually the organization of but one native evangelical Church)이었다. 이런 하나의 교회운동은 곧 같은 때에 캐나다에서 일어난 장로교, 감리교, 회중교회의 일치운동의 소식에 고무되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 하나의 교회운동은 그 결실을 쉽게 보지 못했다. 그들을 파송한 본국 교회가수용을 하지 않았고 한국장로교회 안에서도 이를 반대하는 분들의 수가 차츰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감리교회와 합해서 하나의 교회를 이루고자 하는 희망은 1920년대 말까지도 계속되었다. 1925년 캐나다의 일치운동이 결실을 맺어 "캐나다 연합교회(The Uniting Church in Canada)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1929년 개신교 기관지인 "기독신문"이 당시 교회지도자들에게 교회통합에 대한 의견을 질문지를 내어 물어보았다. 답을 준 36명 가운데 대부분이 찬성을 보였다. (이때 신학면에서 어느 정도 진보적 경향을 가졌던 남궁혁, 백낙준, 부산의 김길창 등). 그러나 초대 한국 교회의 목사인 선천의 양전백이나 임택권 목사 같은 분은 교리와 정치가 다름으로 불가하다고 했었다.

 

한국 초대 선교사들의 대부분은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이었지만 철저한 칼빈주의적 개혁주의자들은 아니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19세기 하반기에 북미를 휩쓴 피니(Charles Gl. Finney, 1892~1875)의 부흥 운동과 이어 나타난 무디(Dwight, L. Moody, 1837~1899)로부터 직간접영향을 받은 전형적인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이었고 철저한 개혁신학과 교리를 옹호하는 자들은 아니었다. 그 가운데 특별히 언더우드가 선두 역할을 했다. 그는 한국 선교사로 지원하여 이것이 수락되었을 때, 당시 북장로교 선교국 총무인 엘링우드(Ellingwood)에게 "장로교를 전하기 위해 나를 한국에 보낸다면, 나는 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그의 복음을 공표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가겠습니다"라고 했었다. 그는 처음부터 교파라는 것을 싫어했던 일치주의자(unionist)였다.

 

초대 선교사인 소안론 (W. L. Swallon)같은 분도 성경의 완전영감은 철저히 믿었으나 교리 문제에 있어서는 "한국에서 감리교회와 장로교가 그 교리의 조화를 찾는데 어려움이 개재한다고 보지 않는다"고 했다. 1925년부터 평양신학교 교장으로 봉사한 라부열(S. L. Roberts)같은 분도 장, 감 양 교회의 일치문제에 있어서 양 교회가 다 한국교회이니 한국교회의 의견을 듣기 원한다는 중립태도를 취했었다.

 

감리교는 그들 독특한 신학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있다면 인본주의적, 체험주의적 부흥신학이고, 일반적으로 알미니안 신학을 좇고 있다. 이 신학은 화란의 돌트레흐트 대회(1618~19)에서 칼빈주의자들에 의해 정죄를 받았었다. 그런데 한국 초대 선교사들에게는 알미니안 주의가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이런 태도는 선교구역을 분할할 때에도 나타났다. 장, 감 선교회의 선교구역이 확정되자 어떤 장로교 선교지역에 세워진 기성교회를 감리교에 넘겨주게 되었다. 이때 갑자기 장로교에서 감리교로 넘어가도록 강요를 당한 장로교인들이 항거함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된 일도 있게 되었다. 이런 일들은 선교사들이 신학과 신앙고백(교리)을 간과한 데서 온 사건들이었다.

 

결과적으로 한국 초대 미 장로교 선교사들은 신앙고백 문제에 있어서 해이한 교회생활의 전통을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한국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1960년대가 이를 때까지 자기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이지를 않았다. 한국 대부분의 장로교 교파들은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이를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였다. 이를 볼 때 한국장로교회를 개혁신앙을 고백하는 고백교회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유럽의 개혁교회는 신앙고백관이 한국의 장로교회와는 매우 다름을 보게 된다. 그들이 가진 소위 일치신조(The Three Forms of Unity)를 교회의 신학적, 교리적 기반으로 삼고, 이를 교회의 가치(Symbolun)로 내세우며, 거기서 개혁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찾는다.

 

한국교회는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앙고백서를 교회적인 공식신앙고백문서로 채용했으나, 이를 참고서 정도로 여기고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목사와 장로 등 직분자들까지도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목사가 임직시에 이 신앙고백 내용을 "성실한 마음으로 믿고 따릅니까?"라는 물음을 받고 "예"라 답함으로 서약을 한다. 그러면 그가 가르치는 내용이나 설교의 내용은 이 신앙고백에 나타난 교리에 의한 검정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한국 장로교회 목사 상당수의 설교들은 장로교 설교로서의 정체성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설교의 내용이, 개혁주의적이라기보다 아르미니안적 경향을 띄고 있음을 보게 된다. 개혁교회는 이와는 달리 목사의 교육과 설교에서 신학과 교리의 정체성이 뚜렷이 드러난다. 그래서 유럽의 개혁교회는 고백교회로서의 면모를 뚜렷하게 나타내는 편이다.

 

3. 신앙고백과 신앙고백서

 

한국 장로교회와 유럽 개혁교회는 누가 신앙고백을 하며, 그 신앙고백을 따라 살 것을 서약하는가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한국장로교회는 직분자들만이 장로교 신앙고백을 수락하고, 서약할 뿐이고, 일반교인들은 제외된다. 그러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직분자들만의 신앙고백일 뿐이고, 일반 교인들의 신앙고백은 아니다.

 

원래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앙고백은 전체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작성되었었다. 대요리문답은 강단에서 교리적 해설과 설교를 하기 위함이었고, 소요리문답은 소년들의 교육을 위해서였다. 그래서 원래 장로교인들은 이 신앙고백문서로 교리교육을 받고 당회 앞에서 이 신앙고백내용으로 문답시험을 거쳐 신앙고백(입교시)에 "이것을 성실한 마음으로 고백하고 믿고 따르겠느냐?"는 물음에 "예" 서약함으로 장로교회 신앙고백을 하는 고백교회 교인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었다. 장로교의 모교회라 할 수 있는 스코틀랜드(Scotland) 자유 장로교회는 지금도 그 전통을 지켜오고 있다.

 

신앙고백(입교)을 할 때,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앙고백으로 서약을 하게 된다. 그런데 한국 장로교회는 초대 선교사들로부터 이런 전통을 받지 못했다. 목사 장로만이 장립 혹은 취임시에 "신앙고백, 대, 소요리문답은 구약과 신약 성경에서 교훈한 도리를 총괄한 것으로 알고 성실한 마음으로 믿고 따릅니까?"묻고 서약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일반 신자들에게는 신앙고백(입교시)시 교회의 공식적인 신앙고백에 관하여는 묻지 않는다. 단지, "교인인줄 알며" "예수가 구주임을 믿으며" "교회의 치리에 복종하겠느냐?"는 아주 초보적이고 보편적인 것만을 묻고 서약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고백(한국교회는 이를 세례문답이라 부른다.)을 한 분은 이런 과정을 통해 교적에 오름으로 장로교회의 교인이 될 뿐이지, 장로교회가 믿는 바를 믿고 고백함으로 장로교회 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 한국장로교회의 문제가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목사, 장로, 안수 집사들만이 장로교인이요, 일반 다른 교인들은 정체성이 없이 어느 교회라도 넘나들 수 있는 보편교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현재 일반교인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장로교회에서 감리교회로, 혹은 침례교회로 드나들게 된다. 이런 신앙고백에 대한 접근생활은 교회의 권징 문제에 있어서도 관계가 된다. 교리적으로 크게 탈선하였을 때에도 신앙고백을 두고 서약한 직분자들에게는 징계를 가할 수 있지만, 일반 신자들에게는 가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직분자들은 신앙고백을 두고 서약을 했지만, 일반교인들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개혁교회가 언급하는 참교회의 표지중 하나인 권징 문제에 있어서도 윤리적인 권징만 할 수 있고 교리적인 면에서의 권징은 불가능한 것이다.

 

유럽의 개혁교회는 교회 직분자 뿐만 아니라 모든 교인이 다 교회의 공식적인 신앙고백문서 내용을 자기의 신앙고백의 내용으로 수용하고 고백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회에서 신앙고백내용에 대한 철저한 교육이 뒷받침된다. 일단 교회청소년들이 10세가 되면 매주 한 시간씩 목사로부터 직접 교리교육(Catechetics)을 받기 시작하여 18세 안팎이 되어 신앙고백을 할 때까지 계속하게 된다. 신앙고백을 할 때쯤이면 청소년들은 일치신조(The Three Forms of Unity)에 대한 내용을 거의 익히게 된다.

 

그 결과, 이들은 교리 교육을 통해 개혁교회가 얼마나 역사적으로 참된 교회이며, 성경적인 가르침을 좇는 교회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신앙고백시에 묻는 물음가운데 첫째물음이 "신앙고백서에 요약되고 이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가르침을 받은 하나님의 말씀의 교리를 전심으로 믿습니까? " "또 하나님의 말씀과 충돌되는 이단과 모든 오류를 거절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생사간 이 교리를 계속 굳게 붙들고 살기를 약속합니까?"이다.

 

이는 개혁교회 안에서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은 철두철미 신앙고백 내용을 그대로 믿고 고백하고 사는 개혁교인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기에 개혁교회에 속한 신자들은 거의 다른 교파 교회를 옮기는 일이 없다. 자기 교회에 대한 큰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들은 칼빈주의 개혁교회와 아르미니안주의 교회를 분명히 구별할 줄 안다. 이들은 어느 지역, 어느 나라로 이동을 해도 개혁교회를 찾아간다. 개혁교회는 이렇게 교리문제에 강하기 때문에 교리적인 문제 외에는 분열이 거의 생기지 않는다. 모든 교인이 공식적인 신앙고백내용을 받고 서약하는 고백교회이기 때문이다.

 

4. 신앙고백관에 대한 차이의 근거

 

장로교회와 유럽의 개혁교회가 신앙고백을 접근하는 것이 이렇게 다른 이유는 신앙고백서 내용에 나타난 교회관에서 오게 되는 것으로 보여진다. 장로교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앙고백은 25장에서 교회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 고백에 나타난 교회관은 매우 현실적이면서도 교회에 대한 매우 상대적인 사고를 쉽게 갖게 한다. "복음의 교리를 가르침과 받아들임, 규례의 집행, 그리고 공적 예배가 행해지는 순수의 정도에 따라 혹은 더 순수하기도 하고 혹은 덜 순수하기도 하다"로 함으로 더 순수하고 덜 순수한 교회를 구별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라 하기 보다 사단의 회가 될 정도로 타락했다"라고 한다. 이런 교회에 관한 내용은 매우 현실적이라 볼 수 있다. 이 교회관에 따라 물론 신자들은 더 순수한 교회에 가담하고, 사단의 회가 될 정도로 타락한 교회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게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단순히 교회의 순수성의 차이를 언급하게 될 때,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에 대한 상대주의적 사고를 쉽게 가지고 어느 교회에든지 안주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할 위험이 있다.

 

그런데 개혁교회의 벨직 신앙고백 제29장은 참교회(The true Church)와 거짓(The false Church)을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이 참 교회의 표지로 순수한 복음설교(the pure Peraching of the gospel), 순수한 성례의 집행(the pure administration of the sacraments), 교회권징(Church discipline)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제 28장에는 "누구든지 교회의 일치를 지탱하고 이 교회에 속하고 연합할 의무가 있다"(But all and everyone are oblized to join it and unite with it, maintaining the unity of the Church)고 한다.

 

유럽의 개혁교회 신자들은 이런 교회관을 가진 신앙고백을 수용하고 서약했기 때문에 참 교회의 표지를 따라 참교회를 분별하는데 노력한다. 물론 세상에는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없는 것처럼 완전한 참교회도 없다. 그러나 개혁교회 신자들은 참교회 표지를 따라 교회 중에 가장 참된 교회로 판정되는 교회를 택하여 속해야한다는 신자의 의무감을 가지고 교회생활을 하게 된다. 이런 신앙고백에 나타난 교회관이 유럽 개혁교회의 신자들로 하여금 신앙고백 내용을 귀중하게 생각하도록 하고, 유럽 개혁교회가 명실공히 고백교회로 자리를 잡게 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맺는말

 

한국 장로교회 초대 선교사들은 성경을 영감된 절대무오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보수주의, 근본주의 신학을 좇는 분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대부분은 그 시대의 부흥운동에 영향을 받은 복음주의자들로 순수한 개혁주의 신앙고백을 따른 교회건설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일반적으로 아르미니안 주의에 대한 경계심을 갖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은 교회일치주의(Unionists)자들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이들은 한국장로교회를 장로교의 역사적 기반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터로 하는 개혁신앙 고백교회를 건설하지 못했다. 한국장로교회는 지난날 성경관에 있어서는 매우 강한 입장을 취해 왔지만 다른 교리문제에 있어서는 같은 강조를 하지 않았다. 결국 한국 장로교회는 하나의 복음주의교회로 성장해 왔지 색깔이 선명한 장로교회로 성장해 오지 않았었다고 보게 된다. 한국 장로교회의 많은 분열에는 교리가 아닌 다른 것이 요인이 되어 왔었다. 이는 교회가 선명한 신앙고백내용 위에 굳건히 서 있지 못한데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한국 장로교회가 개혁신앙고백 교회가 되지 못함으로 현재 중대한 도전을 받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오늘 소위 보수 장로교회들 안에서 지난 날 초대 선교사들이 하나의 "대한 그리스도교회"를 세우자고 했던 이상을 극찬하면서 한국에 모든 교파를 망라한 하나의 교회를 세우자는 운동이 일고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교회일치운동, 나아가 종교다원화 운동이 거세어질 앞날을 내다보며, 주께서 기뻐하실 교회운동이 오늘 무엇인지를 알고 우리들의 역사적 위치를 한 번 더 점검할 필요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지난날 한국교회 초대 복음주의 선교사들의 희망대로 하나의 "대한 그리스도교회"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 주님의 은혜로운 섭리적 간섭이었다고 보게 된다. 한국교회가 지난날 놀라운 성장의 축복을 받은 것도 거기서 찾게 된다. 같은 때에 장로교, 감리교, 회중교회가 하나의 교회를 이룬 캐나다 연합교회는 오늘날 세계에서 속화된 교회 중에서도 가장 속화된 교회가 되어버린 것이 우리들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역사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신앙과 교리면에 순수성을 확보해야만 한다. 그런 교회로부터 생명력이 있는 메시지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 장로교회는 성경의 무오 교리를 견지하는 동시에, 범위를 더욱 넓혀 개혁신앙고백교회 건설에 관심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장로교회에 속한 모든 분들, 직분자들이나 평신도들이 왜 내가 장로교인인지 누구 앞에서나 그 이유를 당당히 밝힐 수 있고, 장로교인 된 것을 감사하며 자부심을 가질 때 한국교회는 더욱 복 받는 교회가 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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