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재호 목사 Pro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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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봄학기 특강

성령의 친교란 무엇인가?

 

기독교인들의 진정한 친교(코이노니아)라고 하는 것은 성령이 교회에 주신 은사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제도화된 교회의 대다수에는 이 친교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의 교회는 친교 때문에 위기에 봉착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조직은 성령의 친교를 원활히 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새 포도주의 맛」(The Taste of New Wine)이라는 책에서 저자인 케이쓰 밀러(Keith Miller)는 교회에 친교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교회들은 외적으로 보기에는 평화와 만족으로 충만한 듯한 신자들로 넘쳐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내적으로는 그들이 심지어 가정에서 조차도 종종 의사소통이 완전히 막히는 어려움을 겪음으로 자주 정신 상태에 혼란과 좌절을 일으키고, 죄책감을 느끼며 종종 공포에 질려 있기 때문에, 그들은 누구에겐가 좀더 자신들을 사랑하여 주기를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서로가 보기에는 모두가 행복하고 만족스런 듯이 여겨지므로, 자신의 깊은 내면적 필요성을 이렇게 자기만족에 차 있는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어 놓을 용기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지도 못했던 앞과 뒤가 다른 이중성은 교회 조직의 기구적 형태에서 생기는 불가피한 결과입니다. 친교(사귐, 코이노니아)없는 교회란 다 이런 것입니다. 친교는 교회의 존재 이유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제시된 교회는 증거(witness)와 봉사와 친교(service and fellowship)에 의해 운영되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진정한 교회가 되기 위한 필수 요건입니다. 교회는 설교하고 가르쳐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모범을 따라서 봉사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친교는 효과적인 복음 선포와 적절한 봉사를 위한 필수 요건입니다. 코이노니아는 포도원에서 많은 열매를 맺으며 영속(永續)하는 교회입니다. 코이노니아는 ‘연결하고 상합하여’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세움으로 성령이 주신 개인적 은사를 이 땅 위에서 나타내는 몸입니다(엡 4:16).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에 진정한 코이노니아가 결여됨으로서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는 설교와 봉사도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성령의 사귐의 특성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에 대하여 무엇을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까?

 

1. ‘성령의 친교’란 무엇인가?

 

고린도후서 13:13절에서 바울은 ‘성령의 친교’(성령의 교통하심)가 고린도에 있는 신자들과 함께 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그리고 빌립보서 2:1절에서 바울은 ‘성령 안에서의 교제’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빌 2:1). 이 성경 구절들 속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는데, 하나님과 신자의 사귐이라는 수직적 차원과 성령을 통한 신자간의 사귐이라는 수평적 차원이 그것들입니다. 이들 두 차원이 하나가 되고 또 모두 이해되어야 함이 중요합니다. 코이노니아에 대한 신약성경의 사상은 우리들이 수평적 차원과 수직적 차원 모두를 이해하기 전까지는 완전히 이해 될 수 없습니다.

 

우선적으로 우리는 성령을 통한 하나님과의 사귐이라는 수직적 차원만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수평적 차원도 역시 일차적이며 대단히 현실적인데, 이것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사귐으로서 성령의 은사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3:13절에 대하여 제임스 레이드(James Reid)가 쓴 것처럼 ‘이것은 성령과의 사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성도들 속에 성령이 내주할 때에 하나님께서 성도들과 갖는 사귐입니다.’ 성령의 교통하심은 교회를 설명하는 참된 신상명세서입니다.

 

코이노니아(사귐, 친교)가 나타내는 전체적인 사상은 수직적인 차원입니다. 교회에서의 코이노니아는 성령의 사귐으로 시작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코이노니아의 의미를 희석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헨드릭 크래머(Hendrik Kraemer)가 그의 책 「평신도의 신학」에서 잘 설명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의 사귐 또 그리스도와 성령과의 사귐(코이노니아)은 신자들 서로 간의 사귐(코이노니아)의 창조적 바탕이며 기둥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교회 안에서 진정한 코이노니아라고 할 만한 영적 교통과 사귐은 성령에 의하여 수여된 것인데, 이것은 우리 인간성의 기능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이것은 초자연적인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친교(코이노니아)와 사회적인 사귐인 교제(fellowship)를 혼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대한 분명한 지식과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령의 친교를 단순한 사회적인 사귐, 곧 인간적인 사귐으로 전락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령의 친교가 아닌 것을 두 가지만 분명히 집고 가고자 합니다.

 

1) 때때로 우리들의 교회에서 피상적이고도 사회적인 사귐을 나타내는 교제( fellowship)라는 낱말은 성령의 친교가 아닙니다. 이런 피상적이고 사회적인 교제(fellowship)는 주말 산악회나 동창회의 모임보다 영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의 교제(fellowship)라고 하는 것의 대부분은 그것의 가치가 얼마나 되건 간에 성령의 친교(코이노니아)보다는 분명히 값어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훼퍼(D. Bonhoeffer)가 말한 ‘값싼 은총’(cheap grace)과 평행을 이루는 ‘값싼 교제’(cheap fellowship)입니다. 고작 해봐야 그것은 친근한 의형제를 삼는 정도, 서로 이해하는 정도인데 교회 밖에서도 그런 모임은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적 코이노니아(친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특색 있게 해주는 독특한 요소입니다.

 

코이노니아(친교)는 이해되는 것도 아니고 또 기대되는 것도, 탐구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교회의 전형적인 ‘교제’(fellowship)는 코이노니아의 수준에까지 이르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코이노니아를 대신하는 값싼 대체물인 흥미롭고 피상적인 사회성에 아주 물들어 있습니다. 곧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교제가 성령의 친교라는 이름으로 위장하여 난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2) 다른 한편으로 보면, 코이노니아는 교회의 구조와 전혀 상관성이 없는 신비스런 교통(mystical communion)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교회의 사귐’에 대하여 마치 그것이 신자들을 자동적으로 묶는 무엇이거나 한 것처럼 추상적인 용어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추상적인 개념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특수한 위치에 놓여 있는 신자들의 실제적인 모임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상에 살고 있는 한 이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말씀하실 때 함께 있어야 됨을 강조하셨습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어떤 사람이 혼자 있을 때에도 그는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현재 자기와 함께 있지 아니하는 다른 신자와는 우리에게 신비스런 언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귐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친교는 신자들이 육체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그들을 영적으로 함께 묶는 어떤 영묘(靈妙)한 능력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성도들이 함께 모였을 때 신자들이 체험하게 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깊은 영적공동체(deep spiritual community)가 성령의 친교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친교가 아닌 것에 대해서 두 가지로 생각해 봤습니다. 이제 성령의 친교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성령의 친교(코이노니아)는 성령이 주시는 신자들 사이의 사귐(fellowship)입니다. 이것은 엄격히 말해서 보다 깊은 교통(communion)의 경험이고 초자연적인 상호 교제의 체험이며, 동시에 모든 신자가 다른 신자들과 때에 따라 느껴 온 것입니다. 이 성령의 친교(코이노니아)의 기초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체험하게 되는 하나됨입니다. 함께 나눈 신앙, 함께 나눈 구원과 신적 본성(divine nature), 이것들이 성령의 친교(코이노니아)의 뿌리입니다.

 

둘째로, 성령의 친교(코이노니아)는 그의 제자들과 함께 하는 그리스도의 사귐입니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과 친밀한 사귐을 이루면서 3년 동안 함께 생활을 하였습니다. 로버트 콜먼(Robert Coleman)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그의 제자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자신의 전적인 행동적 사역을 위하여 그들과 먹고, 자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열 두 제자들은 단지 그리스도에게서 배우기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초대 교회 성령의 친교(코이노니아)의 원형이라고 할 공동체의 깊이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셋째로,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와 같이 성령의 친교(코이노니아)는 초대 교회의 사귐이었습니다.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한 일체감, 목적의 단일성, 넓은 사랑과 상호간의 관심, 다른 말로 친교(코이노니아)를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회심의 즉각적인 기쁨이나 함께 경험한 믿음의 지식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가정에서 함께 기도하고 배우고 예배할 때에, 초대 신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영적인 환경과 분위기가 곧 성령의 친교였습니다(행 2:42-46; 5:42).

 

넷째로, 성령의 친교는 하늘에서의 영원한 친교를 미리 맛보여 주는 지상에서의 모형입니다. 하늘에서의 기쁨은 지상적 제한을 받지 않는, 하나님과 동료 신자들과 함께 영원한 교통을 하는 자유입니다. 이 하늘에서의 실재를 나타내는 지상적 모형인 교회 안의 친교(코이노니아)는 하늘에서의 생활처럼 똑같은 영적 본성을 체험하게 합니다. 이 영적 본성은 질적으로는 전연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성령의 친교(코이노니아)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 그리고 육체적인 제약을 필연적으로 받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친교(코이노니아)는 우주적인 것도 또 영속적인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방해를 받고, 부분적이며 지역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의 친교(코이노니아)는 제한을 받으며, 육체적 요인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만, 그것의 본질적 실재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다섯째로, 성령의 친교(코이노니아)는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 사이의 동일성과 사귐 그리고 상호 교통하심과 흡사합니다. 신자들 사이의 교제이며, 하나님과 신자들의 사귐이라는 친교(코이노니아)와 삼위일체의 상호 교통 사이에는 대칭되는 평행선이 존재합니다. 요한복음 17장에 있는 그리스도의 기도는 특별히 이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너희도 하나가 되라”고 요청하시고 계십니다. 보다 더 일반적으로, 예수님은 미래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요 17:11, 21). 친교(코이노니아)는 예수님의 이 기도가 교회 안에서 성취된 것이며, 거룩한 삼위일체의 교통하심이 시간과 공간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친교(코이노니아)는 수직적이고 수평적인 두 차원을 분리할 수 없도록 하나로 묶으면서, 지상의 교회와 인격이신 하나님 사이에 생기는 초자연적인 공동체적 경험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추종자들이 그들의 친교(코이노니아)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곧 하나님과 하나이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른 사람들과도 하나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러한 사귐(코이노니아)은 성령의 은사입니다. 그러면 교회에는 이 사귐을 창조하거나 육성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까? 또는 교회 구조가 성령의 친교를 위한 조건들을 제공하는 것입니까? 다니엘 제이 플레밍(Daniel J. Fleming)은 그의 책 「벗으로서의 사귐」(Living as Comrades)에서 다음과 같이 견해를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 사귐(코이노니아)의 형성과 보존은…성령의 특별한 사역(Work)이다. 그러나…우리는 우리가 동료 인간들과 공동체에 들어가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얼마만큼 하느냐 하는 정도에 의하여 그 성취도를 도울 수도, 방해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각 개인의 신자들에게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적용됩니다. 성경은 교회를 위한 특별한 구조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장막의 구조’에 대한 시내산에서의 계시와 같은 내용이 전연 없습니다. 교회의 성경적 이상이라는 넓은 테두리 안에서, 우리는 자유롭게 우리 시대에 있는 교회의 임무와 필요성을 가장 잘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구조를 창조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친교라는 바로 그 사상은 이러한 구조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매우 의미 있는 무엇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2. 성령의 친교를 위한 교회 구조에 대한 제언

 

오순절에 성령께서는 다른 것들 사이에 친교(코이노니아)의 선물(은사, gifts)을 아직 어린 교회에 주셨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에 묘사되어 있는 초대 교회를 설명할 수 있는 단 한 가지의 방법입니다. 순수한 친교를 창조해 낸 것은 성령 사역의 모든 부분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신자 개개인 속에서 활동하는 성령의 역사는 교회 곧 신앙의 공동체로서의 교회 안에서 그 개인이 하고 있는 것과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의 양면성인 개인적인 면과 집단적인 면 사이의 생동력 있는 상호 관계성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개인적 신자에 대한 이해와 교회에 대한 이해가 모두 약화되고 맙니다. 먼저, 비록 신자들이 서로 독립적인 상태에서 가장 잘 성장한다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개인화되고 분리된 상태에서 신자의 영적 발전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의 구조와 사역(ministry)에 대한 의미 있는 기본적 요소를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즉 성령의 은사를 즉시 함께 나눔에 의해서 그리고 그 속에서 개인이 작용할 환경(environment)에 의해서 영적 성장을 할 상황을 교회가 마련해 준다는 요소를 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친교와 교회 구조 사이에는 이와 같이 자연적인 관계가 성립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귐(코이노니아)의 본질은 사실상 교회의 형태를 위한 몇 가지의 암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첫째로, 성령의 친교는 흩어져 있는 교회의 기능이 아니라, 함께 모여 있는 교회의 기능입니다. 이 사실은 교회 구조를 위한 분명한 암시를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교회가 친교(코이노니아)를 경험하려고 한다면 교회는 함께 모일 수 있는 충분한 준비를 해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친교(코이노니아)는 성령의 지도 하에 동시에 한 장소에서 함께 모여야 된다고 요구합니다. 우리가 시간과 공간의 한계성을 무시하고 단지 영적 실체로서만 성령의 친교에 대하여 말 할 수는 있겠지만, 이것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의 친교는 육체적으로 가까이 있을 것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합니다. 만약에 성령의 친교를 느끼게 하는 분위기 안에 함께 모이지 않는다면 교회는 성령의 친교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둘째로, 성령의 친교는 자연적으로 의사소통(communication)을 시사합니다. 의사소통이 없는 교통은 자기 당착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자들의 의사소통을 허용하고 격려하는 방향으로 함께 모여야만 합니다. 전통적인 교회 예배가 친교를 위한 상호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잘 계획된 것이 못됩니다. 어찌보면 현재 교회들은 일방적인 의사 전달 방법만을 위해서 전통적인 교회 예배가 계획된 것입니다. 알란 왈츠(Alan Watts)가 통렬히 지적하기를 ‘예배의 참석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등 뒤에서 앞 사람의 목을 보면서 앉아 있고, 오로지 예배 인도자하고만 의사를 교환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전통적인 교회 예배는 성령의 친교를 체험하기 위한 타당한 구조가 못됩니다. 그리고 교회에서의 의사소통이 인도자 대 청중이라는 도식으로 일방 통행적이라면, 그 모임이 기도회건, 성경공부 시간 이건 간에 교회의 회합은 친교(코이노니아)까지는 도달하지 못합니다. 친교(코이노니아)는 의사소통을 허용하고 격려하는 구조 안에서만 꽃피우고 열매 맺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친교를 위한 세 번째 암시되는 교회의 구조는 자유의 요소와 결부 되어 있습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고 바울은 우리에게 그 원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해방자이며, 자유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의 자유와 성령의 사귐(코이노니아)은 동행자입니다. 친교(코이노니아)가 있는 곳에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할 것’이 허용되는(엡 4:15) 분위기가 있고, 자유와 개방성이 있습니다. 진정한 친교(코이노니아)는 오로지 성령의 자유가 있는 곳에서만 경험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성령의 자유를 허용하도록 충분한 비형식적이며, 친근한 구조를 교회는 마련해야만 합니다. 신자들이 함께 모일 때에는 형태와 구조를 벗어난 자유, 예측할 수없는 흥분 등의 기대하지도, 계획하지도 못한 일이 생겨야만 합니다. 가끔 비형식적인 모임에서, 그리고 조직이 엉성한 모임에서,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는 큰 감명을 받으며, 또 성령의 친교가 경험되리라는 큰 가망성을 발견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계획이나 형식 또는 의식의 정당한 사용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신자들은 높고 거룩한 하나님이 존귀와 위엄으로 영광 받는 공예배를 필요로 합니다. 계획과 형식과 의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만 있으면 성도들 간에 진정한 친교(코이노니아)가 결핍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 간에 진정한 교제를 위해서 계획과 형식과 의식이 탈피된 곧 비형식적이고, 비계획적이고, 비의식적인 자유로운 모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교회가 그렇지 못하고 계획과 형식과 의식적인 모임만 있다면 존귀하고도 엄숙한 예배 속에서, 고독한 많은 신자들이 따뜻하게 치유하는 친교(코이노니아)와의 접촉을 갈구하면서 내적으로 부르짖고 있을 것입니다. 신자들은 가장 높이 계신 하나님께서 또한 가장 가까이 계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사 57:15). 형식과 의식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중요하지만 그것 자체만으로 존재하면 그것은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도리어 신자들은 경건의 테두리 속에서 능력 없고 생명력이 없는 형식적인 신자들로 만들어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식과 의식은 친교(코이노니아) 안에서 살면서 성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새로운 의미를 지녀야 할 것입니다.

 

로버트 레인즈(Robert Raines)는 그의 책 「교회 안에서의 삶」(New Life in the Church)에서 성도간의 진정한 교제를 위해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했습니다.

 

교회는 친교(코이노니아)가 알려질 수 있는 조건들을 육성하고 지속시켜야만 한다. 이것은 단지 아침 예배(공예배)를 드리는 것만으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이루어 질 수 없다. 예배는 기독교 공동체의 매주 모임으로써 꼭 있어야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예배)은 주일과 주일 사이에도 서로 간에 그리스도 안에서 따뜻한 우정을 교환하는 사람들의 전적인 참여로서만 그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친교는 배우는 상황을 시사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이 오실 때면 성령이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증거하고 신자들을 새로운 진리로 인도할 것입니다(요 15:26; 16:13). 성령은 가르치시고, 말씀(Word)을 나타내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성령은 성경을 통하여 호흡하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똑같은 영이시기 때문에(딤후 3:16; 벧후 1:21) 그리고 이 성경들은 스스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요 5:39) 성령의 친교는 성경연구와 자연스럽게 연관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초대 교회의 삶 속에서 이런 두 가지 관련된 사실을 발견하는데, 교회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 교제’하기에 전력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42절을 보면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교회 구조에 대해서 암시를 주는 것은 교회 구조는 공동체의 삶 속에서 성경 연구를 위한 조건을 마련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경 연구라는 객관적인 목적을 가지고 성령의 지도 아래에서 함께 모일 때에, 그들은 삶을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친교(코이노니아)를 경험합니다. 그들은 성령과 말씀을 체험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배우는 길이 성령의 가르침을 받는 성도들의 공동체라는 현장 속에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상에서 성령의 친교가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 교회의 구조가 성령의 친교가 잘 이루어질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함을 배웠습니다. 성령의 친교가 원활히 이루어지기 위해서 교회는 1) 성도들이 함께 모여야 할 장소를 마련해야 하고 2) 상호 의사소통이 원활히 진행되며 3) 비형식적인 모임을 통해서 성령의 자유를 허용하여야 하고 4) 직접적인 성경 연구가 주축이 되어야 하는 조건을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날 가장 현대화된 교회 형태와 구조는 분명히 이러한 표준을 묵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교제를 이루기 위해 교회의 구조를 개선해 나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물론 현제 형성된 교회의 구조를 하루아침에 바꾸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어려움이 따른다 할지라도 성령의 진정한 교제가 이루어지도록 힘쓰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가 조직이 잘되어 있고, 많은 사람이 모여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성도간에 진정한 교제가 없으면 그것은 죽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친교를 이루기 위한 가장 바람직한 교회의 구조는 작은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작은 교회 안에서도 특히 소그룹 형태의 모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의 친교는 그리스도인들이 소그룹에서 비형식적인 친교를 하려고 함께 모일 때에 가장 잘 경험되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소그룹은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그룹은 신자들에게 같은 시간과 장소에서 함께 접촉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이 작다는 것과 친밀성은 상호간의 의사 교환과 교통(communion)에 굉장한 성과를 이룩해 줍니다. 작은 모임은 형식적인 구조를 필요로 하지도 않으며, 또 성령의 자유를 전달하는 비공식성과 개방성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질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그룹은 보다 깊은 성경 연구를 위한 이상적인 터전을 제공해 줍니다.

 

초대 교회는 성령의 친교를 경험하였습니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가정에 있는 작은 모임에서 서로 만났다는 사실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구조가 오늘날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가 무엇일까요? 성령의 진정한 친교를 위해 교회의 구조가 어떠해야 하는 가를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고 생각하면 비약일까요? 초대 교회 구조가 성령의 진정한 친교를 이루기 위한 가장 좋은 교회의 모델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죠지 웨버(George Webber)는 「선교하는 회중」(The Congregation in Mission)이라는 책에서 소그룹에 대하여 이렇게 논하였습니다. ‘사랑의 관계는 그것이 성장할 수 있는 구조가 없으면 개발되지 않는다.’ 성령 안에서의 친교는 그것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구조가 있을 때에 성장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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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017년 예배론 특강(개혁주의 교회의 예전에 대한 이해)  file 손재호 2017.12.01 386
25 2017년 직분론 특강(권징의 대상과 그 의미)  file 손재호 2017.12.01 331
24 2017년 직분론 특강(화란개혁교회의 장로직제)  file 손재호 2017.11.23 323
23 2017년 직분론 특강(직분자를 세우기까지의 과정)  file 손재호 2017.11.18 322
22 2017년 직분론 특강(집사직에 관한 브라켈의 조언)  file 손재호 2017.11.11 272
21 2017년 직분론 특강(예배와 치리에서 장로의 역할)  file 손재호 2017.11.04 306
20 2017년 직분론 특강(그리스도의 몸을 세워라)  file 손재호 2017.10.21 488
19 칼빈이 말하는 진정한 기도란 무엇인가(기독교 강요 기도편)  file 손재호 2017.07.17 215
18 2017년 봄 사경회 특강(구원의 신앙)  file 손재호 2017.07.17 192
17 2016년 가을학기 사경회(개혁교회의 정치)  file 손재호 2017.07.17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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