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재호 목사 Pro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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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여름 사경회(개혁교회 어떻게 세울 것인가?)

하나님의 찾아오심과 장로의 심방

오늘날 한국 장로교회에서는 ‘장로의 심방’이라는 말이 이상한 말이 되어 버렸다. 심방은 부목사나 여전도사가 하고 심방하는 장로는 별로 없다. 그러나 장로의 심방은 장로교회의 헌법이나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와 임직 예식문에서 핵심적인 것이다. 장로가 심방을 하면서 교인을 영적으로 돌보는 것은 성경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가르치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방하는 장로에 대한 교회법의 규정을 살피고, 그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 필요가 있다. 우리 교회가 앞으로 장로를 세워 가야 하기 때문에 그러한 공부는 여러 면에서 유익할 것이다.

1. 장로교 교회 정치와 개혁교회 장로 임직 예식문

1) 장로교의 전통

한국에 장로교 선교사가 들어온 것은 1884년이고, 독노회를 결성한 것은 1907년, 총회를 구성한 것은 1912년이다. 독노회를 구성하기 전에 “대한 예수교 장로회 규칙”을 1904년에 작성하여 사용하였다. 여기에서는 장로가 한 지역 교회에서 목사와 함께 신령한 일을 살피면서 다스리는 사람이라고 간단하게 규정하였다.

장로는 지교회 교인들에게 택정함을 받고 또 목사에게 안수함으로 세움을 받아 목사로 더불어 지교회의 신령한 일을 살펴 다스리는 자라.

1915년부터 14인의 위원이 “웨스트민스터 장로교 교회 정치”(1645년)를 기준으로 새로운 헌법을 작성하기 시작하여 1919년에 총회에 제출하였다. 한글 맞춤법에 따라서 개정한 1934년판에서 ‘장로의 직무’로 명기한 부분을 인용하겠다.

치리 장로는 교인의 택함을 받고 대표자가 되여 목사와 협동하야 행정과 권징을 관리하며 지교회 혹 전국교회의 신령적 관계를 총찰하며 주께 부탁을 받은 양무리가 도리오해(道理誤解)나 도덕상 부패에 이르지 않키 위하여 당회로나 개인으로 선히 권면하대 회개치 아니하는 자가 있을 때에는 당회에 보고할 것이며 교우를 심방하대 특별히 병자와 조상자(遭喪者)를 위로하며 무식한 자와 교회 내 유아를 양육하고 간호할 것이니 평신도라도 애(愛)의 법칙을 행할 의무가 있거든 장로는 신분상 의무와 직무상 책임에 더욱 중하니라. 장로는 교인과 함께 기도하며 위하여 기도하고 교인 중에 강도(講道)의 결과를 찾자보며 질병과 애척(哀戚)을 당한 자와 회개하는 자와 특별히 구조 받을 자가 있을 시에는 목사에게 보고할 것이니라.

장로의 직무를 밝힌 이 부분은 대부분 장로가 어떻게 심방을 하고 영적으로 다스릴 것인가를 규정하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과 고신측이 연합하여 작성한 1962년 헌법에서는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 작은 제목으로 위의 내용을 정리하였다.

1) 교회의 신령적 관계를 총찰한다.

2) 도리오해(道理誤解)나 도덕상 부패를 방지한다.

3) 교우를 심방하여 위로, 교훈, 간호한다.

4) 교인의 신앙을 살피고 위하여 기도한다. 교인 중에 강도의 결과를 찾아본다.

5) 특별히 심방할 자를 목사에게 보고한다.

다섯 가지 제목으로 장로의 직무를 잘 요약하였는데, 교회의 신령한 면을 살피고 돌보기 위하여서 심방을 하고, 목사가 전한 말씀이 교인들 가운데서 어떻게 열매를 맺는가를 찾아보는 것이 장로의 중요한 일이었다. 복음의 도리를 순수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할 뿐 아니라 그 도리를 모르는 사람[무식자]과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일, 곧 요리문답의 교육도 장로가 사랑으로 행하여야 할 일로 지적하였다.

그런데 초기의 장로교 헌법들을 비교하면 1934년판의 처음 문장은 두 부분에서 차이가 있다. 1922년 판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치리 장로란 교인의 택함을 받고 대표자가 되여 목사와 협동하여 치리와 권징의 사(事)를 관리하며 지교회 혹 전국교회의 신령적 관계를 통솔하나니라.

1922년판에는 치리 장로가 목사와 함께 ‘치리와 권징의 일’을 담당하는 직무라고 밝힌다. 그런데 1934년에는 ‘행정과 권징’으로 바뀌었다. ‘치리와 권징’, 즉 영적인 다스림이 ‘행정’으로 바뀌어서 정착하였다.

또 하나 차이가 있는 구절이 있다. 1955년판에는 “장로는 교회의 택함을 받고 치리자가 되어 목사와 협동하여 행정과 권징을 관리하며”로 시작한다. 1955년판에는 ‘교인의 대표자’라는 말이 빠진 것이다. 첫 문장에서 이렇게 두 부분이 바뀌었다. 1919년에 새로운 헌법을 작성하면서 1645년의 “웨스트민스터 장로교 교회 정치”를 토대로 만들었다고 하였으므로 거기에 논란이 되고 있는 두 구절이 있는가를 살펴보자.

유대인 교회에서 백성의 장로들이 교회를 다스리는 데서 제사장과 레위인과 연합하였듯이, 교회에 정권(政權)을 세우시고 교회적인 치리자를 두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의 사역자 외에 그의 교회의 몇 사람에게 다스리는 은사를 주시고, 그들이 그 일로 부름을 받았을 때 교회를 다스리는 일에서 목사와 연합하여 그 일을 수행하도록 위임하셨다. 개혁교회에서는 그러한 직분자를 보통 장로라고 부른다.

“장로교 교회 정치”에서는 장로를 ‘목사와 연합하여 교회를 다스리는 직분’으로 가르치고 ‘행정’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장로를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사’ 곧 ‘선물로 주신 직분’으로 이해했지 ‘교인의 대표’로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논란이 된 두 부분 즉 장로가 행정의 일을 관리한다는 것과 교인의 대표자라는 말이 이후 한국 장로교회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장로직은 원래 심방을 하는 영적인 직무로 규정되어 있지만 후에는 행정의 일을 담당하는 직책이 되었다. 또한 교인의 대표로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직분이라는 생각이 약해지고, 목사와 함께 영적인 직책을 감당하기보다는 교인 편에서 목사를 견제하는 경우들이 많았다.

한국 장로교회의 역사를 보면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영적으로 돌보면서 심방하는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 교회에서 소요리문답을 가르쳐야 할 것을 이야기하고, 가르칠 사람으로는 부모뿐 아니라 ‘장로’와 목사를 들었다. 장로가 교리를 가르치고 영적으로 감독하고 그 목적을 위하여 심방하는 것이 헌법에는 규정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시행되지 않고 있는 셈이다. 초기에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가르치는 일이 있었지만 그 전통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사라졌고, 장로가 심방하는 것은 시행도 되지 못하고 사문화(死文化)하였다.

2) 개혁교회의 전통

개혁교회 전통에서는 장로의 직무에 관하여서 네덜란드 신앙고백서, 도르트 교회법, 장로의 임직 예식문에서 다룬다. 신앙고백서에서 원칙을 밝히고 교회법에서는 시행 원칙을, 그리고 예식문에서는 구체적인 시행의 방법을 밝혔다. 세 문서를 각각 살펴보겠다.

네덜란드 신앙고백서 30조에서는 ‘교회의 통치’에 관하여 고백하면서 목사와 장로의 사명을 이야기한다.

이 참된 교회는 우리 주께서 그의 말씀에서 가르치신 영적인 질서에 따라서 통치되어야 함을 우리는 믿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성례를 집행할 목사가 있어야 하며 또한 목사와 함께 교회의 회의를 구성할 장로와 집사가 있어야 한다.

그 신앙고백을 근거로 도르트 교회법에서는 ‘장로의 직분’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장로 직분의 특별한 의무들은 다음과 같다. 즉 모든 회원들이 복음에 따라서 교리와 생활에서 정당하게 행하도록 하기 위하여 말씀의 사역자와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를 감독하는 것, 회중의 성원들을 충실히 심방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고 교훈하고 훈계하며 부적절하게 행하는 자는 책망하는 것, 믿지 않고 불경건하며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서 기독교적 권징을 시행하는 것, 성례가 더럽혀지지 않도록 주의해서 살피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집의 청지기이므로 회중에서 모든 것이 단정하고 질서 있게 되도록 주의하며, 그들에게 맡겨진 그리스도의 양 무리를 돌보아야 한다. 끝으로, 좋은 조언과 충고로 말씀의 사역자를 돕고 그들의 교리와 생활을 감독한다.

개혁교회에서는 신앙고백서와 교회법에 근거하여서 “장로 임직 예식문”을 사용하는데, 그 예식문에서는 영적 감독과 심방을 장로의 첫째 직무로 꼽는다. 독립개신교회에서 확정하여 채택한 예식문은 장로의 직무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이 예식문은 특별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교회를 영적으로 감독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표현한다.

장로는 말씀의 사역자와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를 감독하는 과업을 맡았습니다. 모든 교우 하나하나가 복음의 말씀을 따라 교리와 생활에서 단정하게 생활하는가를 감독하여야 합니다. 이것을 위하여 그들은 회중의 집을 성실하게 방문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고 가르치고 권면하며, 단정하지 않게 행하는 사람은 책망하여야 할 것입니다. 믿지 않고 순종하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서 그리스도적인 권징을 행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례가 더럽혀지지 않도록 살펴야 합니다.

3) 종합

장로교회에서나 개혁교회에서나 장로의 주된 임무로 교회를 영적으로 감독하고 그 일환으로 회중의 집을 심방하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한국의 장로교회에서는 장로가 심방을 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지만, 외적으로만 모방하여 심방을 한다고 하여서 개혁교회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좋은 조문이 사문화한 현실에서 제도만 갖추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심방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살펴보고, 거기에서부터 메마른 땅을 기경하는 심정으로 교회의 제도를 갖추어 나아가야 할 것이다. 동토에 파종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기 때문이다.

2. 성경의 교훈

1) ‘감독’이라는 용어와 심방

장로는 성경에서 여러 용어로 불린다. 나이가 많고 지혜가 있고 권위가 있다는 의미에서 ‘장로’라고 하고, 교인들의 생활을 살핀다는 의미에서 ‘감독’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집의 살림을 돌보기 때문에 ‘청지기’라고도 하고 교인들을 인도하기 때문에 ‘인도자’라고도 한다.

2세기 이후에는 장로들 가운데서 더 뛰어난 사람을 ‘감독’으로 불렀지만, 성경에서는 장로와 감독이 같은 직분이다. 바울 사도가 에베소 ‘장로들’을 청하였는데(행 20:17) 그들을 ‘감독자들[감독들]’(행 20:28)이라고 불렀다(참조. 딛 1:5, 7). 디모데전서 5:17에서는 교회에서 ‘다스리기를 잘하는 장로’와 ‘가르치고 다스리기를 잘하는 장로’를 구분하여서 이야기한다.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에서는 이 구절에 근거하여서 ‘다스리기를 잘하는 장로’를 ‘(다스리는) 장로’라고 부르고, ‘가르치고 다스리는 장로’를 ‘목사’라고 부른다. 말씀대로 다스리는 것이 목사와 장로의 공통 직무이다.

장로를 ‘감독’이라고도 부르는데, 감독이라는 말은 우리의 주제인 심방과 연결된다. ‘감독’ 곧 ‘에피스코포스’라는 말은 ‘본다’ ‘살핀다’는 말에서부터 ‘검사한다’ ‘방문한다’는 의미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감독은 다스리는데 특별히 ‘심방하면서 살피는 사람’을 가리킨다. 장로는 ‘심방을 하면서 감독하는 직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성경 구절들을 살필 때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2) 구약의 용례 - 파카드

‘에피스코포스’(감독)라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파카드’이다. ‘파카드’는 ‘보다, 살피다, 방문하다, 군대를 소집하다’ 등과 같이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어가 될 때에는 ‘하나님께서 찾아오신다’, ‘하나님께서 돌보신다’, ‘하나님께서 임명하신다’ 하는 독특한 뜻을 갖는다.

첫째, 여호와의 방문은 언약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창세기 21:1에서는 여호와께서 사라를 권고하셨으므로 사라가 잉태하였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관심을 갖고 보살피셨다고 번역하였는데, 좀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사라를 방문하셨으므로 사라가 잉태하였다’는 말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 99세 때에 찾아오셨으나(창 17장) 사라가 여전히 믿지 않았을 때 사라를 믿게 하시려고 두 번째로 찾아오셨다(창 18장). 여호와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의 말씀을 이루셨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언약을 이루시는 또 다른 예는 요셉의 유언이다. 요셉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권고’[파카드]하실 것을 말하면서 자기의 유골을 가지고 올라갈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창 50:24-25). 여호와께서 언약의 말씀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보내어서 출애굽의 소식을 전하였을 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보시고[파카드] 그 고난을 감찰하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다(출 4:31). 출애굽의 구원은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찾아오신 일이라고 가르친다.

둘째, 여호와의 방문은 심판을 가져온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우상을 만드는 사람에 대하여서는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파카드]” 하시고(출 20:5),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파카드]”하신다(출 32:34. 참조. 사 10:3).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아말렉 사람을 치라고 하시면서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을 내가 추억[파카드]”한다고 하셨다(삼상 15:2). 여기에서는 추억(追憶)한다고 의역하였지만, 원문대로 하면 아말렉이 대적한 일에 대하여서 여호와께서 이제 친히 ‘방문하여서 심판하신다’는 뜻이다. 사울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사울은 이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여야 하였다. 하나님께서 친히 방문하시고 그들에게 승리를 주셨지만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지 않았고, 사무엘에게서 폐위의 선언을 들었다.

셋째, 여호와의 방문은 직분자를 세우는 것과 관계가 있다. 아말렉을 방문하실 때에 사울을 세워서 그 일을 하게 하신 것도 여호와께서 사람을 사용하셔서 방문하신다는 예가 된다. 좀 더 현저한 예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할 후계자를 구할 때이다.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컨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파카드]’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으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민 27:16-17).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방문하시는데, 이것은 곧 직분자를 ‘세우시는’ 것이고,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분의 백성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신다. 하나님의 심방을 대신하면서 구원과 심판의 사실을 전할 직분자를 세우신다는 것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3) 신약의 용례 - 에피스코포스

‘파카드’에 대응하는 헬라어 ‘에피스코포스’의 용례를 찾아보면 구약의 용례와 놀랍게 유사하다. 첫째, 예수님의 탄생을 ‘하나님의 돌아보심/찾아오심’으로 찬송한다. 사가랴의 찬송은 여호와의 찾아오심에 대한 찬송으로 시작하고 마무리한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에피스코포스] 속량하시며”(눅 1:6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에피스코포스]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눅 1:78-79).

예수님의 탄생을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찾아오심으로 이해하고 찬송하는 것은 구약의 뜻을 잘 깨닫고 표현한 것이다. 출애굽의 구원도 여호와의 찾아오심으로 이해하였는데 예수님께서 이루실 더 큰 구원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찾아오심을 찬송하였다. 예수님께서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다음에도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고 생각하였다(눅 7:16).

둘째, 예수님의 찾아오심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심판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그의 백성을 찾아오셨지만 그것을 거부하는 이스라엘에 대하여서는 심판을 선언하셨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할 때 그 근거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오심을 거부하는 것을 들었다.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眷顧)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눅 19:44). 여기에서 권고 받는 날은 직접적으로 심판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맥에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의 원인으로 가르친다.

셋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을 찾아오실 때에는 사람을 도구로 쓰신다.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회의에서 야고보는 고넬료의 집을 방문한 베드로 사도의 보고를 이렇게 요약한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에피스코포스]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행 15:14). 고넬료를 찾아간 것은 베드로이지만 그것은 단순히 베드로가 혼자 찾아간 것이 아니라 사도를 사용하셔서 하나님께서 찾아가신 것으로 이해하였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한 백성과 제사장 나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면(벧전 2:8-9) 이방 사람들이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에피스코포스]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 가르친다(벧전 2:12). 하나님께서는 선한 일을 하는 신약의 백성을 통하여서 다른 사람을 찾아가셔서 구원을 베푸신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도구로 쓰셔서 찾아오심은 직분자를 세우는 것과도 연결이 있다. 사도행전 6:3에서는 일곱 집사를 세워서 그들에게 봉사의 일을 맡기는 것을 ‘찾아오심’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그 집사는 성신과 지혜가 충만하여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그릇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였다.

3. 예배와 하나님의 찾아오심

신약과 구약에서 ‘하나님의 찾아오심’ 곧 ‘심방’에 대한 성경 구절을 살펴보았는데, ‘하나님의 찾아오심’은 오늘날에도 예배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우상 숭배자는 자기들이 만든 신에게 헛되게 절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구원의 진리를 계시하시는 하나님께 경배한다. 하나님께서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을 찾으시고(요 4:23-24), 우리가 구원의 진리를 깨닫고 성령 하나님 안에서 예배드리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을 만나신다. 하나님과 만남이 없는 예배는 헛된 예배이다(사 1:12-13). 따라서 우리는 예배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 제가 이 시간에 참으로 하나님께서 ‘오냐, 너는 참말로 나한테 예배를 잘한다’고 하실 만한 그러한 예배를 드리게 해 주시옵소서. 제가 스스로 하기가 어렵사오니 하나님의 성신으로 저를 이끄셔서 반드시 그것을 하게 합소서” 하고 기도드린다.

하나님께서는 성자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찾아오셨고, 임마누엘로서 이 세상에 오신 성자 하나님은 세상 끝 날까지 교회와 함께하시면서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하고 세례를 주고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을 효과가 있게 사용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마 28:18-20). 성자께서는 말씀과 성신으로 우리를 다스리는 일을 계속하시는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84문은 이 내용을 아주 잘 담아서 가르친다.

문: 거룩한 복음의 강설을 통하여 어떻게 천국이 열리고 닫힙니까?

답: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사람들이 참된 믿음으로 복음의 약속을 받아들일 때마다 참으로 그들의 모든 죄를 사하신다는 사실이 신자들 전체나 개개인에게 선포되고 공적(公的)으로 증언될 때 천국이 열립니다.

복음의 말씀이 선포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천국의 문을 여시고 우리로 하여금 말씀과 함께 우리에게 나아오신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순종하면서 나아오도록 인도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을 배우면서 주님과 언약의 교제를 누린다. 주님께서 말씀의 선포와 함께 찾아오시면 우리는 주님을 찬송하면서 주님께 나아간다. 이것이 하늘의 예루살렘에 이르러서 신약의 성도가 드리는 예배이다(히 12:22).

하나님의 찾아오심을 이야기하면서 ‘예배’를 이야기하였는데, 이것이 다음에 논의할 ‘장로의 심방’의 기초가 된다. 구원의 말씀과 함께 우리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을 예배에서 만나지 못하면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장로가 심방하는 것에 큰 열매가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 장로의 심방이 시행되지 못한 이유는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 빈약하고, 말씀과 함께 그의 백성에게 나아오시는 하나님과 언약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 매우 빈약하기 때문일 것이다. 예배에서 목사를 통하여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장로가 심방하여서 그 말씀대로 살고 있는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기초를 놓지 않으면 그 위에 건물을 세울 수 없는 것처럼, 예배에서 하나님과 언약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 약하면 장로의 심방에 대하여서는 더 이상 이야기할 수 없다.

4. 장로의 심방

1) 장로의 심방의 성격

삼위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찾아오시는 것이 과거의 일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찾아오심에 대하여서 크게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말씀의 사역자를 사용하셔서 예배 때마다 찾아오신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찾아가서 살피는 직분’ 곧 ‘감독/장로’의 직분을 더 신중하게 생각한다.

장로의 심방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찾아오시는 일의 일부이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다(마 28:20). 가르침은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지키게 하는 것’과 연결된다(딛 1:9). 따라서 전파된 말씀이 어떠한 열매를 맺는가를 살피는 것은 복음 사역에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바울 사도는 2차 전도 여행을 떠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에피스코포스]하자”(행 15:36).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 어떠한 열매를 맺는가를 살피는 것이 직분자로서 심방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공적으로 선포되면 그 결과를 살피는 것이 직분자가 반드시 행하여야 할 일이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 장로들에게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고 가르치고” 하고 말하면서 3년의 사역을 회상하였다(행 20:20). 사도는 공적인 예배에서 가르치는 것 뿐 아니라 각 가정을 심방하여서도 가르치고 말씀이 어떻게 열매를 맺고 있는가를 살폈다.

따라서 장로는 다른 사람을 찾아갈 때 개인적인 자격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백성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그 일을 감당한다. 성도의 고충을 알기 위하여서 심방한다고 말하면 이것은 부족한 것이다. 장로가 교인의 대표자로서 교인의 형편을 살피고 당회에 보고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도 역시 부족한 생각이다. 장로는 개인적인 친밀함을 이용하여서 설득하는 ‘상담자’도 아니고 ‘고충 처리 위원’도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그냥 하늘로 돌아가는 법이 없고(사 55:11), 구원의 열매를 맺든지 아니면 심판의 열매를 맺는다. 풍부한 말씀을 받았으니까 좋다고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열매를 맺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 심방의 핵심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에서 말씀과 함께 그의 백성에게 찾아오시고, 장로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각 가정을 심방하여서 그 열매를 확인한다. 1934년 장로교 헌법의 표현을 인용하면 “교인 중에 강도(講道)의 결과를 찾자보며” 심방한다.

장로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교회에서 선포된 말씀이 어떻게 열매를 맺는가를 살피는 직책이라고 하였는데, 이렇게 이해하면 장로의 직분은 교회에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교회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복음을 전파하고 세례를 주고 주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할 사명이 있다(마 28:18-20). 따라서 가르치는 것뿐 아니라 ‘지키게 하는 것’ 곧 장로가 목사와 협동하여서 심방하고 영적으로 감독하는 것은 교회에서 필수적인 일이다. 바울 사도가 디도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 대로 각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었다(딛 1:5). 장로가 없는 것은 교회의 ‘부족한 일’이고 채워져야 할 일이다. 이 직분[장로직]을 활기차게 행사하는 일이 없이는 교회가 제대로 움직이거나 꽃피울 수 없다.

2) 심방의 여러 가지 면

장로가 심방하는 것은 말씀의 열매를 확인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장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야 한다. 감독[에피스코포스]의 자격을 가르치는 성경 구절들을 보면, 감독은 “가르치기를 잘하며”(딤전 3:2),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딛 1:9) 하고 가르친다. 성령 하나님과 말씀으로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통치에서 손발 노릇을 하려면 먼저 말씀을 잘 알고 가르칠 수 있어야 감독[에피스코포스], 곧 ‘심방하는 장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찾아오심을 대리하여서 심방하는 것은 공적인 예배와 다르고 따라서 심방할 때 설교하는 것은 아니다.

둘째, 말씀에 대한 감독은 ‘목자’로서 하는 것이다. ‘감독’이라는 말이 ‘목자’라는 말과 함께 사용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목자와 감독’이시다(벧전 2:25). 그분이 직분자를 세워서 교회를 돌보고 감독하게 하신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 장로들에게 이렇게 권면하였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목양하게]’ 하셨느니라”(행 20:28). 감독과 목자라는 말이 함께 사용된 데에서 우리는 교인을 돌보는 것이 목자의 심정으로 하는 것임을 배운다. 감독의 다스림은 목자의 섬김에 의한 다스림이다. 여호와께서 목자로서 양을 안고 구원하셨다(사 40:11). 선한 목자는 양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서 인도하여 내신다(요 10:3).

셋째, 장로의 심방은 ‘신령한’ 다스림이다. 따라서 다루는 주제도 신령한 것이어야 하고 다루는 방법도 신령하여야 한다. 물론 찾아가서 심방하는 장로가 인생의 선배로서 할 이야기도 있겠지만, 심방의 목적은 교회에서 내려주신 말씀을 어떻게 받아서 열매를 맺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또한 다스리는 방법도 신령하여야 한다. 사람인 직분자가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직분자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친히 가르치시므로 직분자는 주님께 기도하면서 그 일을 감당하여야 한다.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셨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기도와 함께 갔다. 베드로가 신앙을 고백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먼저 기도하셨고(눅 9:18), 베드로가 예수님께로부터 배운 것을 고백하였지만 베드로가 깨달은 것은 혈육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배운 것이라고 하였다(마 16:17). 사람인 장로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직분자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찾아가시는 것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이 점에서 장로의 심방은 신령한 다스림의 일부이다.

넷째, 장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방문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헛되게 돌아가는 법이 없고(사 45:23), 믿는 자에게는 구원을 주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심판을 행한다. 하나님의 찾아오심에 구원과 심판이 있었던 것처럼(슥 10:3) 장로도 두 가지 목적을 위하여서 심방한다.

5. 우리의 현실과 과제

1) 우리의 현실

한국 장로교회에서는 심방하는 장로에 대한 규정은 있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장로가 없다. 이러한 현실을 목사와 장로와 교인의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겠다.

한국에서는 목사들이 바쁘다고들 한다.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발로 목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사가 말씀을 바르고 깊고 풍부하게 전파하지 않고 ‘발로 목회한다’는 심정으로 사역하는 것은 목사 직분의 타락이다. 물론 목사도 말씀을 바르게 받는가를 살피기 위하여서 심방을 하지만, 목사의 주된 임무는 말씀의 식탁에서 봉사하는 것이다. 목양(牧羊)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에 들어가고 나오는 양에게 꼴을 먹이고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는 것이다. 말씀을 풍성하게 전하지 않고 빈약한 식탁만 제공하면서 발로 목회하는 것은 양들을 돌보는 것이 아니다. 말씀이 전하여지지 않은 상태에서 심방하면 사람들 사이의 개인적인 관계만을 맺게 된다. 목사와 교인의 개인적인 관계는 반드시 교회 안에서 공적인 문제로 비화하게끔 되어 있다. 심방은 언약을 이루는 하나님의 일이지 사적인 것이 아니다.

장로가 심방하려면 먼저 말씀을 배우고 받아야 한다. 그래야 그 말씀대로 사는가를 영적으로 감독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를 ‘장로들의 교회’(elders" church)라고 이해한다고 한다. 장로가 교인의 대표로 자임하면서 교회 행정을 총괄하려고 하고 목사와 대립하는 구도를 형성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대립 구도에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교회에서도 장로로 선택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사람이 교회에 경제적으로나 여러 면으로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직분의 세속화이고 교회의 세속화이다. 불신자에게 좋은 평판을 얻지 못하는 사람은 교회의 장로가 될 수 없지만(딤전 3:7), 불신자에게 좋은 평판을 얻는다고 하여서 곧 장로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장로는 교인들을 영적으로 감독하고 은혜의 복음으로 위로하는 일을 맡는다. 따라서 교인들의 영적인 필요를 모르거나 자기의 일에 바빠서 교인들을 돌보는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은 장로의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장로교회가 취하는 헌법을 따르면 장로가 심방하도록 되어 있으나 장로교회의 현실을 보면 장로가 심방을 하지 못한다. 그것은 장로가 하나님의 찾아오심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예배에서도 맛보지 못하고, 직분적으로도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심방을 받는 교인들에게도 생각할 점이 있다.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다 꿰뚫어 보시고 드러내 보이실 때(히 4:12-13), 우리는 그 말씀과 함께 찾아오신 하나님께 정직하게 나아가야 한다.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받지 않으면서 목사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를 무시하는 일이다. 부목사나 심방 전도사의 심방보다는 담임 목사의 심방을 선호하는 그 심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여기에도 역시 직분관에 문제가 있다. 담임 목사가 전하는 말씀이나 부목사가 전하는 말씀이나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차이를 두면 안 된다. 심방을 온 목사에게 식사 대접을 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 못 되고, 촌지(寸志)를 주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사려고 하는 것과 같은 두려운 일이다(참조. 행 8:20).

목사와 장로와 교인의 관점에서 한국 교회의 문제들을 간단히 살펴보았다. 공통된 것은 ‘공적 예배에 대한 이해’가 매우 부족하고 ‘직분에 대한 이해’가 결핍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배의 개혁과 직분의 개혁이다. 예배에서 하나님의 찾아오심을 바르게 알 때 올바른 직분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2) 예배의 개혁과 직분의 개혁

종교개혁은 말씀과 예배의 개혁이고, 처음부터 직분의 개혁이었다. 성경적인 장로관이 중세에서는 잊혀졌다가 종교개혁과 함께 제네바에서 다시 시작하였다. 말씀과 예배에서 시작한 개혁은, 단순하게 말하면, 장로의 심방으로 열매를 맺고, 개혁된 장로를 통하여서 더욱 힘 있게 전진하였다. 로마 교회에서는 우상 숭배적인 미사를 드렸을 뿐 아니라 장로가 없고 성직 위계적(位階的)인 조직으로 운영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혁자들은 먼저 말씀을 전파하여서 예배를 개혁하였고 장로를 세워서 성경적인 제도를 갖추었다. 목사가 말씀을 전하고 장로가 영적인 감독을 충실히 하였다. 그때 지역 교회가 튼튼히 섰고, 로마 교회도 그러한 교회들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 교회의 목사를 투옥시키면 장로가 교인들을 돌보는 일을 계속하였고 그 장로를 가두면 다른 장로가 그 일을 계속하였기 때문이다. 막강한 조직과 힘을 갖춘 교황이지만 장로들이 돌보는 작은 교회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종교개혁의 모범을 생각할 때, 말씀과 예배에서 하나님의 찾아오심을 경험하지 못하면서 장로의 심방을 도입하는 것은 별무소용일 것이다. 예배에서 하나님의 찾아오심을 맛보지 못하면서 제도만 꾸리는 교회는 새로운 문제를 만날 것이다. 미국 정통장로교회(OPC, 1936년)의 창립 목사였던 에이레스(L. E. Eyres)는 “새로 세워져 교회의 연륜이 깊지 못하다면 회중들은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장로가 과연 누구인가가 분명히 판단될 때까지 교회의 체제를 완전히 정립하는 일을 연기해야만 할 것이다”고 말하고, 또한 “교회가 장로를 잘못 선출하게 되면 마귀가 문을 열고 들어와 교회의 모든 일에 관여하고 소란을 피우게 된다. 이렇게 되면 언제나 마귀가 승리하고 교회는 패배하게 된다”고 경고한다. ‘심방하는 장로’는 없고 대신에 ‘무임(無任) 장로’나 ‘호칭(呼稱) 장로’와 같은 모순적인 현상이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는 한국 교회사를 생각하면서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3) 개혁된 심방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신 자비로 우리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고 깊고 풍부하게 내려 주셨다. 교우들은 예배에서 선포되는 강설(講說)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열복(悅服)하며, 말씀과 함께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께 성령 하나님과 진리로 경배한다.

우리 교회도 때가 되면 곧 하나님께서 장로의 직분을 행하기에 합당한 자가 준비되면 장로를 임직하고 위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배를 통하여 찾아오시는 단계에서 직분자를 통하여 찾아오시는 단계로 나아가는 일이다. 말씀을 통한 예배의 개혁이 교회 조직의 형태로 열매를 맺는 역사적인 순간이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임 시점을 사모해야 할 것이다. 우리 교회가 이러한 일을 위해서 우리가 생각할 점이 있다. 장로로서 생각할 점이 있고, 교인으로서 생각할 점이 있다.

① 장로의 측면

장로는, 첫째, 하나님께서 성령 하나님을 통해 자기를 세우셨음을 확신하여야 한다(행 20:28). 장로 임직 예식문에서 임직자에게 첫째로 묻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친히 주님의 회중을 통하여서 이 직분으로 부르셨다고 마음으로 확신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실이 교인의 투표를 통하여 확인되었을 뿐이지, 교인이 선거로 장로를 세운 것은 아니다. 따라서 장로는 자기를 세우신 하나님께 책임을 진다. 장로는 말씀을 통하여서 그의 백성을 찾아오신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서 심방하기 때문에 먼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야 한다. 추수하는 일꾼이 먼저 곡식을 받는 것처럼(딤후 2:6)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받아야 한다. 자기의 직무를 잘 감당한 사람은 구원을 이룰 것이다(딤전 4:16).

둘째, 말씀을 바르게 받고 하나님의 찾아오심을 경험하는 장로는 목사와 동심협력(同心協力)하여야 한다. 19세기 스코틀랜드 목사인 딕슨의 말처럼, “모든 점에서 목사의 손을 붙들어 주는 것은 우리[장로]의 의무이고 특권이다. 목사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그분에 대하여서 좋은 점을 말하고 그분의 사역의 열매를 거두려고 노력하여야 한다.” 미국 남부 장로교회의 신학자 쏜웰의 말을 인용하자면, “말씀의 종은 교회의 입이요 장로는 교회의 손”이다.

셋째, 교인에 대한 생각이 성경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장로가 심방하는 것은 그가 교인들 위에 있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셨기 때문에 그 일을 하는 것이다. 또한 교인이 어리기 때문에 심방하는 것도 아니다. 교인들은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할 수 있고(골 3:16), 어떤 문제에 대하여서 교회에 이야기하기 전에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서 권고할 수 있고 두세 증인을 데리고 가서 이야기할 수 있다(마 18:15-16). 모든 교인이 그렇게 신령하게 행동할 때에 교회에서 권징의 일을 바르게 시행할 수 있는 것이다(마 18:17-18). 성도들도 서로 ‘돌아보아서’[에피스코포스]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이 없는가를 살펴야 한다(히 12:14-15).

가정을 방문하여 이야기할 때 경우에 맞게 지혜롭게 이야기하여야 한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의 금 사과’와 같다(잠 25:11). 나단이 범죄한 다윗을 심방하여 지혜롭게 이야기한 것은 좋은 모범이다. 그 심방의 결과로 다윗은 회개하였다. 다윗이 나단에게 죄를 고백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만 죄를 범했다고 고백하도록 인도한 점에서 나단의 심방은 성공이었다(시 51:4).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심방한다고 하였는데, 잘못하면 심방하는 사람이 자기의 주장을 강요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쌍방 간의 다툼으로 나아갈 수 있다. 어떤 사람에 대하여서 하나님께서 인내하시면, 장로도 기다려야 한다. 어느 때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와 같이 떠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돌아올 때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 떠나보내야 하는 경우도 있다.

② 교인의 측면

교인들은 예배에서 말씀을 바르게 받고 말씀 앞에서 정직하게 자기를 내어 놓고, 심방하는 장로에게 집안 문을 열어 주면서 그를 하나님의 직분자로 환영하여야 한다. 장로를 개인적으로 대하여도 안 되고, 나이나 사회적인 지위를 마음에 두고 대하여도 안 된다.

교우들은 심방하는 장로에게 자기의 잘못한 것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야고보 선생은 교회의 장로를 청하라고 하고, “너희 죄를 서로 고하라”고 가르친다(약 5:14-16). 제가 목사이지만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에서 자랐기 때문에 정직하게 말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경험한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교제 속에서도 늘 경험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심방하여 질문하면 ‘모범 답안’만을 이야기 하기 쉽다. 집안의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가 그 밑에서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개혁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큰 노력이 필요하고 어느 경우는 몇 세대의 시간이 걸리는 일이 될 것이다.

4) 새로운 일과 선한 일

심방하는 장로, 이것은 한국 교회에서는 ‘새로운 일’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영광스러움을 잘 나타내는 일이다. 목자의 심정으로 교인을 돌보고 말씀으로 권고하고 기도하면서 붙들어 주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다.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는 말씀처럼(딤전 3:1), ‘선한 일’이기도 하다.

우리 가운데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 일을 온전하게 이루시기를 소망하며 기대해 본다.

# 이 글은 김헌수(대전 성은교회-독립개혁교단) 목사의 글을 조금 수정하고 편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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