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재호 목사 Pro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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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개혁 498주년 기념 특강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 칭의와 성화의 한 가지 은혜

 

“구원(救援)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롭고 자유로운 선택(選擇)에 의존하는 것”

 

16-17세기 종교개혁의 역사를 잇는 개신교회의 장로교인이라면, 자신의 신학적 정체성과 역사적 전통이 개혁신학에 있으며, 특히 개혁자들 중에서도 칼빈의 신학에 많은 부분 의지하고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 이유는 개혁신앙의 이론적인 신학적 주제로부터 실천적인 삶과 개혁의 방식까지 칼빈의 가르침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시대에는 칼빈의 사상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인용이나 비판에 대한 문제의 심각성을 나타내곤 하는데, 즉 칼빈이 말한 것의 일면(一面)을 부각하여 그의 사상 전체를 오해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특별히 ‘칭의 구원 완성론’이라는 용어는 칼빈이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으며, 그런 식의 구원론 또한 그의 어떤 글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용어인데, 마치 개혁신앙에서는 예정론(선택과 유기)과 함께 구원의 은혜인 칭의에 대한 부정적인 면들을 문제 제기하는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시대의 개신교회 안에 나름 개혁신앙과 칼빈의 가르침을 말하면서도, 잘못된 용어로서 구원관과 교회론을 가르치는 것인데, 특히, 작금(昨今)에 유행하여 기독교계와 신학계에 인기를 얻는 “바울에 대한 새관점(톰 라이트)”, “김세윤 교수(풀러 신학교)의 칭의유보론”에 대한 신학적 문제들이다. 이에 우리 교회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여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인 이신칭의와 성화의 하나의 은혜에 대한 개혁 신앙의 교리”에 대해 살핌으로서, 종교개혁의 바른 정신을 천명하고자 한다.

 

I. 구원(救援)의 서정과 칭의(稱義)

 

사실 기독교 역사상 그 어떤 정통 신학자도 ‘칭의 구원이 구원의 완성이라’고 말한 사람이 없다. 왜냐하면 구원에서 ‘칭의(稱義)’는 영원한 ‘구원의 서정(The order of salvation)’에서 한 단계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타난 구원의 서정에 대한 바울의 증거 구절 로마서 8:29-30절을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했다. 성경의 증거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하나님의 ‘미리 아심’, ‘미리 정하심’, ‘부르심’, ‘의롭다 하심’ 그리고 ‘영화롭게 하심’의 구원의 과정, 혹은 구원의 여러 측면을 선포한다. 중요한 것은 이 구절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해 이루시는 구원의 영원한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 전의 예정에서 시작하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영화로움이 종착지가 되는 순서 또는 서정’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청교도 칼빈주의 학자, 윌리암 퍼킨스는 이 구원의 여정을 ‘황금 사슬’이라고 불렀다.

 

칼빈에게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한다(기독교강요 III.21.1-4). 즉 ‘구원의 결정권과 과정과 모든 성취(완성)’는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칼빈은 ‘인간’의 그 어떤 공로(행위)라도 높여지기를 원치 않았다. 곧 믿음도, 칭의도, 성화도, 영화롭게 됨까지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택의 결과일 뿐이지, 인간의 선택(의지, 행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따라서 바울의 위 구절 곧 로마서 8:29-30절에 의해서도 분명 “모든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이 분명하며, 여기에 대해서 초대 교부인 어거스틴에서부터 종교개혁자 칼빈에 이르기까지 정통 개혁신학이 지켜온, ‘구원의 영원성’ 혹은 ‘성도의 구원으로의 견인’ 교리의 근거가 된다. 이처럼 ‘삼위 하나님의 영원 전 예정, 그리고 그분의 주권과 섭리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자유롭고 은혜로운 선택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것이요, 한번 하나님이 아시고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자들은 분명 영원한 영광의 구원에 참예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칼빈의 말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에 진정으로 속하는 사람이 마지막에 멸망하거나 버림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의 구원은 확실하고 견고하게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이라는 기계 전체가 무너진다 해도 구원은 떨어지지 않는다. 이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을 의지하고 있으며...”라고 했다(기독교강요, OS 1. 87). 따라서 칭의가 우리 구원의 보장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선택과 은혜가 구원의 보장인 것이다. 그러기에 칭의이든, 성화이든, 사람에게 구원의 결정권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요, 이에 칼빈은 “구원의 모든 원인을 하나님께 두지 않는 것을 인간의 무지라”고 공박한 것이다. 그러기에 이제 칼빈이 가르친 구원론에는 결코 ‘칭의 구원 완성론’이나 ‘칭의 구원 보장론’과 같은 말은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요, 단지 칭의는 구원의 특징적인 한 부분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가운데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칭의를 포함한 전 구원이 흔들릴 수 없고 실패할 수 없는 이유는 어거스틴과 개혁자들 그리고 이후 칼빈주의자들 모두는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선택에 기초하며,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을 아무도 깨뜨릴 수 없다는 확고한 믿음에 기초”하는 것이라고 고백하였다.

 

II.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恩惠)의 두 가지 모습: “칭의와 성화”

 

종교개혁 시대의 어떤 개혁가도 ‘칭의와 성화’를 다른 차원의 은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신칭의’의 교리를 종교개혁의 뿌리로 놓은 마틴 루터까지도(“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은혜인 이신칭의”), 성화(선한 행위)에 관한한 누구보다 강하게 역설했다. 루터는 “행위에 의한 칭의는 가장 악독한 성경의 왜곡이요, 교황주의의 폐해이지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한 신자들은 거룩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참조. 루터의 갈라디아서 5장 주석). 특히 칼빈은 루터의 주장을 더욱 섬세히 다듬어서 ‘칭의와 성화’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한 가지 은혜의 두 측면이라고 했다(참고. 기독교강요, III.11.6.). 예수 그리스도를 분리해 나눌 수 없듯이 이 두 가지도 떼어 놓을 수가 없다는 것은 우리가 그 둘을 함께 받기 때문이다. 곧 그 분 안에서 ‘칭의와 성화’를 한꺼번에 받기 때문이다.

 

물론 칼빈은 자신의 <기독교강요>에서 ‘성화와 칭의’를 각각 중요한 장으로 할애하여 설명한다. 이것은 각각의 독특한 구속사적 특징이 있기 때문이며, 구원의 여정(서정)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코 다른 차원의 논의(‘칭의’의 은혜와 ‘성화’의 행위 구원으로)를 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칼빈은 “칭의만 있으면 된다”라든지, “성화(선행 행위) 없는 칭의는 구원 받지 못한다”는 논의에 대해서 구분지어 설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참된 믿음으로 칭의의 은혜를 받은 자가 어찌 성화의 은혜가 없을 수가 있단 말인가?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의롭다 함과 거룩하심을 은혜로 모두 받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칭의와 성화’를 그리스도 안에서 한 은혜로 보는 칼빈의 특징 때문에 때때로 그의 구원론은 ‘칭의’보다 ‘성화’에 더 강조점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된 사람은 성화를 통해 그 은혜의 선택 가운데 있음을 입증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참고. 기독교강요, III.14.18).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게 하신 선한 일들 곧 성화의 열매들은 양자의 영(성령)이 우리에게 허락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또한 놀라운 것은 칼빈이 (기독교강요, III.3.1.)에서 ‘성화’(sanctification)를 ‘칭의’(justification)보다 앞서(구원론 제일 서두에) 논의하고 있기 때문이다(참고. “… 내가 이렇게 성화(회개, 거듭남, 그리스도인의 삶)를 칭의에 앞서 논의한 이유는 칭의가 선한 행위들(성화의 그리스도인의 삶)과 분리되거나 결핍되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사실 칼빈의 가르침만큼 “그리스도인의 성화와 선한 행실, 그리고 경건과 사랑에 대해서” 신학적이며, 목회적으로 심혈을 기울였던 사람도 드물다(이는 칼빈주의에서 화란의 경건주의와 청교도들이 파생했다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장로교 표준 신조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가장 칼빈주의적인 고백으로 평가를 받고, 실제로 이 고백서의 저자들(Westminster Divines)은 칼빈주의의 ‘예정과 구원론’을 강력히 따르던 목회자들이었다. 특히 칼빈 당대에도 개혁가들의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교리”는 로마 교황주의자들에 의해 ‘믿음만 있고 사랑이 없는 이단’, ‘칭의만 있고 성화가 없는 이단(분파)’ 등으로 매도 되었지만, 실상 칼빈은 “오직 성경과 전 성경으로 돌아가서, ‘칭의와 성화’의 떼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성경적이며, 신학적으로 재정립하여 제시한 개혁가였던 것이다.

 

III. 몇 가지 고려점들

 

다시 한 번, 어거스틴 이래로 종교개혁자들과 칼빈(정통 개신교 내에서) 그 누구도 칭의 구원만을 구원이라고 얘기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칭의와 성화’는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 여정 중의 한 가지 은혜의 특징적인 두 측면을 보여주는 것뿐이다.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롭고 자유로운 선택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원하신 구원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 그와 연합하였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과 섭리를 따라 ‘칭의와 성화와 영화의 은혜 가운데서 구원의 날’을 반드시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칭의와 성화’를 가지고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식의 논쟁’을 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의롭다 칭해지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즉 성경과 칼빈의 개혁신앙의 가르침은 분명하니, “하나님의 뜻을 높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의지하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믿음으로 받은 칭의에 감사하며, 믿음으로 성화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 질문: “칭의와 성화 모두가 은혜라”고 할 때에, 그렇다면 성화는 인간의 노력과 의지로서 구원의 완성을 이룰 수 있는가? 성화란 죄 없는 거룩함을 말하는데, 이 땅에서 죄 없는 완전한 삶이 인간 스스로의 행위로서 가능한가?, 스스로 얼마나 선한 행위를 이루어야 구원의 확신과 완성을 이루어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인가?)

 

먼저 칼빈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할 수 있는 새로운 마음이 주어지며,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말한다. 이것은 전적으로 어거스틴의 생각과 동일한데, 타락 전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있는 상태(posse peccare)’였고, 타락 후 인간은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상태(non posse non peccare)’였지만, 그리스도의 구속 후 인간은 ‘죄를 안 지을 수도 있는 상태’(posse non peccare)가 되고, 이후 영화롭게 된 후에는 ‘죄를 결코 범하지 않는 상태’(non posse peccare)가 된다고 하였다. 칼빈은 칭의 이후, 신자는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새로운 마음을 따라 하나님의 법대로 순종할 은혜가 주어졌으며, 원하는 선을 행함으로 성화의 삶으로 나아간다’고 본다(기독교강요, II.3.10).

 

성경에 나타난 많은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신자들이 능히 기뻐하고 지키고자 노력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은혜의 증거이다. 하지만 로마서 7장의 “고뇌하는 바울의 모습”에 대해서 칼빈은 ‘모든 중생자의 모습으로 투영’한다. 비록 우리가 선을 행할 마음과 힘은 생겼지만, 여전히 지체 속에 남아있는 죄성으로 말미암아 죄의 소욕에 굴복하는 모습이 우리 신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참고. 루터의 유명한 말-‘의인이지만 죄인’인 상태가 바로 이런 신자들의 모습이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며 선한 것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성화의 삶을 시작하지만,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완전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할 수 없으며, 죄로부터 완전히 떠나 성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여전히 죄악 된 우리가 성화의 은혜를 받았다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칭의’의 은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서 전가(轉嫁)되는 의 때문이다. 비록 이생에서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허물지고 부족하지만,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여전히 허물지고 죄악된 우리의 행위를 거룩하게 여겨주신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은 “우리가 행한 행위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를 보시고 우리의 행위까지 의롭고 거룩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결국 ‘칭의와 성화’ 모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전가해 주시는 “하나님의 이중의 의(double righteousness of God)”인 것이다. 결국 ‘성화’에는 새로운 피조물인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부어주시는 은혜로서 죄악된 옛 삶과는 다른 모습, 즉 더욱더 그리스도의 형상에 닮은 모습으로 회복되어지는 것이다. 웨슬리주의 곧 알미니안 신학은 바로 이 측면을 강조하는 것인데, 신자가 이 땅에서도 완전 성화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구원의 완성의 날까지는 죄성에 갇힌 한계를 지니기 때문에, 여전히 완전한 성화의 삶을 살 수는 없다.

 

칼빈주의 곧 개혁신앙은 이 부분에 주의한다. 그러함으로 끝까지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며 붙드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진 행위에도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하셔서, 하나님 앞에 거룩한 행위로 삼아주시고 받아 주심으로 “우리를 거룩하다고(성화 되었다고)” 인정해 주신다. 물론 이생에서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신자는 구원의 궁극적 완성의 날까지 이러한 성화의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며, 점점 더 그리스도의 형상에 닮아가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처럼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은 이미 단번에 이루어진 “칭의와 영화(성화)”로 묘사된다.

 

정리하면, 개혁주의 곧 칼빈주의 구원관은 결코 ‘거룩함을 열망하지 않고 성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을 수 없다.’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곧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참되게 믿음으로 고백하는 자는 구원의 처음과 완성에 대한 은혜를 하나님께 두는 것이요,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의지하는 자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 바로 이들은 이미 하나님 앞에 거룩한 자들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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