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전 박사 교회에 관하여-교회의 거룩함(1)

by 손재호 on Apr 23,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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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에 관하여

교회의 거룩함(1)

말씀:사도행전 5:1-11

 

교회의 본질

 

개혁교회가 역사적으로 늘 천명하는 교회의 중요한 속성은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와 일체성입니다(unity). 이 단일성의 문제를 상고해 나가려면 필연적으로 신비한 일치성 혹은 일체성이라는 ‘우니오 미스티가’(unio mystica)를 먼저 고찰해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말하는 교회의 속성은 거룩하다 혹은 신성하다는 ‘홀리니스’(holi­ness)이며, 셋째의 속성은 보편성(catholicity)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개혁교회에서 전통적으로 늘 강조하는 점인데 그것은 개혁교회가 그렇게 마음대로 규정한 것이 아니고 성경을 고찰 할 때 교회의 속성을 말할 때 두드러지게 세 가지를 강조해 가면서 늘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것을 간추려 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이란 복합적인 성격을 띤 것이므로 간단히 이것 하나이다 하고 얼른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고로 교회론이라는 것은 지금도 더욱 연구를 요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통해서 계속적으로 모두 연구를 하여 추려 놓고 또 추려 놓고 가는 것인데, 그 복합적인 성격이라는 것이 신비해서 간단하게 이렇다 저렇다 하고 얼른 규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신령한 전투를 한다 할 때 그럼 전투하는 것이 교회의 중요한 성격이냐, 본질이냐 할 때 그것은 중요한 본질입니다. 그래서 전투하는 교회(church militant)를 아주 중요한 본질로 생각합니다. 교회란 끝없이 전투를 하는 곳이다. 이 땅에서는 부지런히 전투를 하고 그 영광스런 통일의 날에는 우리가 면류관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란 그 본질에 있어서 볼 수 있는 것인가 볼 수 없는 것인가? 엄격한 의미로 말할 때에 교회를 잘 볼 수 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교회에는 볼 수 없는 면이 있고 볼 수 있는 면이 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교회의 본체는 신비한 것인 까닭에 어떤 조건 아래 움직이는 현상의 세계에서 우리의 감각 기관을 통하여 꼬집어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형태를 나타내느냐 할 때 그것이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이 역사의 세계에서 늘 나타나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또한 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사를 볼 수 있느냐 없느냐 할 때 천사라는 것이 나타나 뵐 때는 볼 수 있지만 안 타나날 때는 못 보는 것입니다. 본질적인 교회 그것도 사람의 감각의 대상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것이므로 볼 수 있는 시각 한계 내의 존재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각의 한계 내에서도 우리가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기에 볼 수 있는 면, 볼 수 없는 면으로 나누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교회는 볼 수 없는 면이 있고 볼 수 있는 면이 있느냐 할 때 그렇게 말하기가 좀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영혼은 볼 수 없지만 육신은 볼 수 있다는 식이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닙니다. 교회도 어떤 형태는 볼 수 있지만 내부의 정신을 볼 수 없다 하는 그런 의미는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좀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이지만 그것으로 완전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라고 할 때에는 영혼만 가지고는 사람이 안 되는 것입니다. 물론 육신만 가지고도 사람이 안 됩니다. 영혼과 육신이 완전히 통일된 존재로서 있을 때 비로소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라고 할 때에는 명확하게 늘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라는 것은 명확하게 항상 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 교회는 통일된 위치에 이르게 될 터인데 즉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 그 때에는 과연 사람의 시각 대상으로 항상 볼 수 있게 존재하겠느냐 하면 거기에 대해서도 우리는 명확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람’처럼 절대적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럴지라도 교회는 볼 수 있는 것이 있고 또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하는 이런 것들이 다 본질이요 교회의 성격 혹은 성질(nature)입니다.

 

좌우간 원상의 교회 혹은 본질적인 교회를 놓고 그것이 어떤 속성을 두드러지게 드러내느냐 할 때 첫째는 그리스도와의 통일성, 유기적인 완전한 통합체로서의 성격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둘째는 거룩한 하나님의 속성을 나누어 받았고 또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하다고 인정을 받았다는 두 가지 면에서의 거룩함입니다. 셋째는 보편성(catholicity)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볼 수 없는 이 거룩한 교회는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통치 대권의 관점에서 볼 때에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한 형태 혹은 중심적인 한 형식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만유를 통재 하시고 통일 하시는 하나님의 통치 대상으로서 교회가 그 중심이 되어 마침내 천하에 그 자체의 큰 원상적인 성격을 명시하게 될 것입니다. 만유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다는 관점에서 교회는 하늘과 땅에 걸쳐서 거룩한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어떤 지역적인 제한이나 시대적인 제한에 갇힌 존재가 아니라 시간적으로 항구하고 공간적으로 우주에 걸쳐서 존재한다고 해서 보편성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의 신약적 의미

 

교회가 거룩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가? 그것을 알려면 우선 거룩하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그 다음에 교회에서는 그것이 어떻게 적용되며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를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거룩하다’라고 할 때 거기 한 가지 부족이 있기가 쉬운데 많은 교인들은 거룩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그저 들은 풍월로나 지레짐작으로 아는 정도입니다. 그것을 명확하게 가르치지 않고도 저절로 알리라고 기대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같은 말에 대해서 갑은 이 생각 하고 을은 저 생각하고 병은 다른 생각 하고 가르치는 목사는 또 다른 생각을 한다면 이야기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항상 거룩함이 무엇이라고 잘 규명해서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교회에 그 성격이 적용될 때에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하다는 말을 여러 가지로 사용합니다. 아, 그 사람 참 거룩한 사람이라든지 혹은 어느 때에는 비록 죄 있는 사람들이지만 ‘거룩한 무리’라 해서 성도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주일날을 성일이라 하기도 하고 하나님께 드린 물건이 있으면 그것을 가리켜 성물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러니까 거룩하다는 말은 주로 형용하는 말로 두루두루 사용됩니다. 그것이 반드시 인격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도덕적인 책임을 지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 거룩하다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거룩하다는 말이 도덕적인 가치를 주연(周延) 곧 대변하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착하다든지 혹은 참되다는 말처럼 도덕적인 책임을 띠고 그 가치를 발휘하는 대상에다 사용하는 것과는 달리 거룩하다는 말은 도덕적인 책임을 질 수 없는 시간이라든지 공간이라든지 물질에도 적용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거룩하다는 것이 무엇이냐가 우리에게는 중요합니다. 교회가 거룩하다 할 때 그것이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고 또 그 거룩함이 적용될 때는 무엇을 나타내는지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당은 거룩한 곳이다 하는 말을 씁니다. 그러면 어떤 장소나 건물을 거룩하다 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또 어떤 시간에 대해서 주일은 거룩하다 할 때에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거룩한 날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리고 ‘거룩히’라는 부사도 사용합니다. 주일 성수라 할 때는 주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말이므로 분명히 부사로 쓰인 예입니다. 성화한다. 거룩하게 한다 할 때 그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어학적으로 따지면 헬라 말로 동사 ‘하기아조’(αγιαξω)입니다. 그러면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 거룩하다는 말은 모두 벌써 수백 번은 들은 말일 테니까 당연히 알 것으로 기대할 수밖에 없지만, 그저 막연한 추상적인 용어로 생각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 다시 대강 보고 지나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거룩하다는 말 자체를 한번 검토하고 지나가십니다. 신약이나 구약에서 이 거룩하다는 말이 많이 사용되는데 그것은 의롭다는 뜻인가?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포하신 것을 거룩하다고 하는 것인가? 물론 그것은 아닙니다. 먼저 ‘거룩하다’는 말을 사람에게 적용하는 경우는 칭의(稱義) 혹은 일본 사람들이 만들어 낸 말인 의인(義認)과 거룩하다는 말은 다른 말입니다. 칭의와 비교해서 보자면 거룩하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법적인 선포를 통하여 사람의 존재 위에 어떤 새로운 가치를 규정해 주셨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엄격하게 자꾸 따져 들어가면 거룩하다는 것은 사람의 내부의 생활에서 발생하는 어떤 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칭의가 법적인 차원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행동이라면 거룩이라는 말은 오히려 새롭게 창조하는 재창조적인 거룩하신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칭의의 사실이 하나님이 단번에 선포하심으로써 그 효과가 발생하는 일이라면 거룩이라는 것은 장기의 경과를 요구하는 일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것은 이생에서는 절대로 완성될 수 없는 것입니다. 거룩이라는 이것이 분명히 초자연적인 사역이긴 하지만 신자는 이 일에 있어서 성신의 감동으로 자의식이 움직여서 노력하고 활동해 나가는 것입니다. 신자의 관점에서만 바라볼 때 거룩이라는 것은 명확한 목적 의식 하에서 노력해 나감으로써 발생하는 사실입니다. 그런고로 신자가 거룩하게 된다고 할 때 그 거룩이란 자체는 중생에서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생명과 변개(變改-다르게 바뀌어 새롭게 고쳐지다)라는 사실에서 나올 뿐 아니라 동시에 그 새로운 생명을 강화하고 더 풍성하게 하고 더 튼튼하게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개념으로 인간의 내부 생활에서 거룩이란 그런 의미로 사용됩니다.

 

거룩하다는 말의 구약적 의미

 

이제 우리가 이 말이 신약과 구약에서 어학적으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좀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앞서 간단히 말씀드린 것은 대체로 사람의 내부 생활과 관련된 일반적인 개념 하에서 설명한 거룩이란 말입니다. 어학적으로 볼 때 구약성경에서는 거룩하다는 말을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그것들을 종합해 볼 때 대체로 ‘정결하게 한다’는 의미, 또 무엇을 구별해 가지고 ‘드린다, 봉헌한다’는 뜻이 많이 섞여 있습니다. 그것을 거룩이란 말로 번역한 것입니다. 사실상 또 그것이 거룩이란 말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결국 거룩이란 무엇이냐 할 때 하나님께 구별하여 전체로 드리는 것이다 하는 개념이 들어 있습니다.

 

둘째로 신성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어떤 평가의 위치에서 하는 얘기이냐 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신 속성이란 위치에서 평가할 때 신성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평가하는 한 영역에 가깝게 구별해서 드리는 것이다 하는 말뜻인데 이 말은 해석이 조금 필요합니다. 거룩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내의(來意)는 먼저 ‘하나님을 위해서 그분의 거룩한 속성에 가깝게 드렸다’는 사실입니다. 드린 그것 자체가 어떻다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 당신의 그 거룩이라는 속성에 가깝게 드려졌다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하면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먼저 따로 이것을 떼어놓고서 결국 그것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그럴 때 그것은 거룩한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히브리 말의 어근이 ‘카다쉬’(קךשׁ) 인지 ‘하다쉬’(חךשׁ) 인지 조금 불분명합니다. 만일 ‘하다쉬’라는 말을 썼다면, 그 어근의 뜻이 ‘새롭다’ ‘번쩍번쩍 빛나다’라는 말로서 순결이라는 개념과 통하는데 거기서부터 차츰차츰 발달해서 순결이라 하는 말로 표시되었을 것입니다. 이 거룩이란 히브리 말인 ‘카도쉬’ 혹은 ‘카드’(קך)라는 말에서 나왔다면 ‘끊다’ ‘절단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이냐 하면 구별했다. 나누어 놓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상 이 두 가지의 개념이 거룩하다는 말 가운데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흔히 말하는 대로 거룩하다는 것이 반드시 구별했다는 말이냐 하면 그것이 단순히 구별했다는 정도의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돈을 가지고 있다가 어떤 부분을 따로 떼어서 무엇을 사겠다고 했을 때 그 돈을 거룩한 돈이라고 말하느냐 하면 그렇게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내 목적을 위해서 돈을 따로 떼어놓은 것을 가리켜 거룩한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물론 구별의 요소가 강하게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거룩하신 경영과 그 목적을 위하여 구별한 것이다 비로소 거룩하다는 말을 사용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거룩하다 할 때는 그와 동시에 도덕적인 가치 평가에서 그것은 항상 도덕적인 순결성(moral purint) 즉 정결하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고로 결론부터 간단히 말하자면 거룩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드린 것으로, 그것은 구별되어 있고 또한 도덕적으로 순결한 것이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거룩이라는 말은 첫째로, 언제든지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 구별되어야 한다. 둘째로, 그것은 뒤섞여서 혼탁하지 않아야 한다. 셋째로, 그것은 순일(純一)하다. 순결하다 하는 의미가 필연적으로 들어 있다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도덕적 순결성의 평가 기준

 

도덕적인 순결성 혹은 순일성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 평가의 기준을 어디에 두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 사람이 가지고 있는 희미한 하나님 형상의 나머지를 중심 삼아 평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의의 관념이나 미에 대한 센스나 혹은 진리에 대한 터득, 또 선에 대한 우리의 어떤 각성을 가지고 아, 저건 선하다. 저건 아름답다. 저건 참되다. 저건 거룩하다 구별하는 것인데 그것은 사람이 자기 안에서 하는 평가일 뿐입니다. 궁극적으로 그것이 참말로 그러냐고 한다면 명확하게 말할 수가 없는 때가 많은 것입니다.

 

제가 가끔 이런 예를 듭니다. 언젠가 뉴욕의 브롱크스에 있는 굉장히 큰 동물원에서 생긴 일입니다. 그 동물원에 가보니까 저 아프리카에서 잡아온 굉장히 크고도 찬란한 뱀이 있었는데 그 뱀을 볼 때 저로서는 아주 소름이 끼치게 무서웠습니다. 분명히 아주 추하고 가공(可恐)스럽고 가증스럽게 뵈더라 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조그만 아이들이 와서 그 뱀을 보더니 ‘야, 참 아름답다’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얘들 눈에는 징그럽고 무시무시한 뱀이 아름답게 뵌다 그 말입니다. 여러 가지 뱀에 대한 전설이나 특별히 성경에 나타나는 바 뱀에 대한 사실에 대하여 아무런 인식을 가지지 않은 어린아이에게는 눈앞에 보이는 색채와 알롱달롱한 무늬를 보고 단순히 미(美)만을 느낄 뿐이었습니다.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가증스럽고 두렵고 끔찍한 여러 가지 내용에 대해서는 연상할 재료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처럼 뱀이 나무에 걸쳐 있다가 사람이 말을 타고 지나가니까 사람을 말채 휘감아 가지고 차례차례 집어먹었다는 뱀 이야기라든지, 어떤 뱀은 무서운 독을 잔뜩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무엇보다도 성경에 나타난 뱀의 유혹의 사실을 믿는 그런 눈으로 볼 때 당연히 소름이 끼치는 무섭고 더러운 존재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한 개의 심벌로 거기 있을 때 일종의 적개심까지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이처럼 한쪽은 아름답다 하고 다른 쪽에서는 징그럽다 추하다고 보는데 어느 쪽이 옳으냐 그것을 결정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시각의 호소만을 한 영역으로 놓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보이는 알롱달롱한 색채만을 느꼈을 뿐이지 뱀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관념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불문에 붙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의 미술이라든지 특별히 문학에서 인생을 표현한다고 할 때 탐미주의의 어떤 작품을 가지고, 우리 보기에는 대단히 불건전하고 부도덕하지만 그래도 아름답지 않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작품이라 해서 아름답지 않느냐 할 때 만일 그것 자체만을 놓고 보면 탐미주의 작품이 아름답지 아니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지고 있는 도덕이라든지 또 그것의 총화(總和)를 평가할 때 우리는 그것을 취할 수 있느냐? 없어요. 우리는 그것들이 파괴적이요 퇴폐적이라고 느끼는 것입니다.

 

예술적인 평가는 그렇다고 할지라도 가령 도덕적인 평가는 어떠한가? 사람이 의리와 신의를 지키고 나가는 것이 다 선한 것이냐? 당연히 그것이 의롭고 선하다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둑놈이 불한당질을 하자고 하고 화적질을 하는 판에 거기서 지키는 의리와 신의는 어떻습니까? 화적질을 하려면 서로 군호(軍號)를 짜고 있을 자리에 정확히 있어 가지고 제 임무를 끝까지 해 주어야 합니다. 그 신뢰에 부응을 하는 의를 지켜 주어야 한다 말입니다. 그러면 그 의리를 지켜서 무엇을 하느냐 하면 무고한 사람들의 집에 불을 지르고 사람을 쳐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야 화적질이 되니까, 그러면 그렇게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불지르며 야단 내는 것이 선하냐? 순전히 의리를 지켰다는 점에서는 선이라 말입니다. 국부적으로 그놈만 떼 놓고 가만히 바라볼 때는 그것을 선하다, 착하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그 의리와 신의는 무엇을 위해서 거기 있느냐? 결국 무엇을 배경으로 하고 자라난 꽃이냐 할 때에 그것은 불지르고 사람을 죽이는 거대한 악을 이루기 위한 꽃이라 말입니다. 그 의리와 신의가 아니었다면 차라리 악이 실패할 뻔 했지만 그 선을 행하였기 때문에 큰 악이라는 것이 조성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어떤 선을 찬양하고 높인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이 다 총 평가에서도 반드시 선이냐? 그렇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악을 위한 선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어떤 도덕적인 평가를 하려고 할 때 우리가 궁극적으로 어디까지 보아야 하느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에도 그런 평가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들여보내시면서 가나안 사람들을 도륙하라고 하셨습니다(신 20:16). 사울에게도 아말렉 사람을 하나도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삼상 15:3). 이것은 오늘날 발달한 인도적 사상의 관점에서 볼 때 대단히 비인도적인 처사입니다. ‘피를 즐기는 하나님’이라는 자유주의 고등비평가의 비평이 가장 그럴듯한 것입니다. 무슨 죄가 있으면 죄 있는 사람이나 벌을 당하는 것이 공의이지 죄 없는 부모나 처자식까지 한꺼번에 도륙해 버리는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역사를 보면 수많은 경우에 우리는 그런 사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가령 민수기 16장에 나오는 고라 당의 반역 사실을 보더라도 죄 있는 당사자나 땅이 입을 벌리고서 집어먹든지 할 일이지 회막 문 앞에 서 있다가 그 식구와 처자들이 다 같이 죽게 되는 것은 무슨 일이냐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일어나서 사람을 도륙할 때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도 직접 땅으로 하여금 입을 벌려서 그 사람들을 다 죽게 했다면 도대체 그것은 무슨 일이냐? 혈연관계라고 해서 함께 죄 없는 식구들을 멸하는 그런 불공의를 하나님도 승인하시느냐? 하나님은 피를 좋아하시는 것 아니냐? 이처럼 자유주의자들은 하나님께 대한 평가를 자기네 관점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서 다른 무슨 깊은 생각을 하느냐 하면 별로 그렇지 못한 형편입니다. 언젠가 곁에서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아이가 제 부모 몰래 집을 나갔어요. 그 부모는 아이를 찾으려고 애를 태우고 있는데 아이는 친한 제 친구한테만 비밀로 했거든요. 편지를 하면서 이 소식은 제 부모한테는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내 부모가 필연 너한테 소식을 물을 테니 내개 대해서 일체로 소식을 들은 양하지 말고 모른다고만 해라 한 것입니다. 친구가 나를 믿고 그렇게 편지를 했는데 나는 친구에게 비밀을 지켜 주어서 의리를 지켜야 하겠다고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부모는 그 자식 때문에 애달아 돌아다니면서 밤잠을 못 자며, 혹시 너한테 오늘은 기별 안 왔더냐 하고 매일 묻습니다. 매일 그렇게 묻지만, 연락 안 왔습니다. 하고 대답해야 할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친구 되는 아이가 다른 사람한테 가서 의논하기를 “실은 이렇게 편지가 왔는데 그 어머니가 매일 애타게 묻는 것을 생각하면 참 죄송스러운데 그렇다고 해서 친구의 의리를 저버릴 수도 없으니 이를 어떻게 해야겠습니까?”하는 고민을 털어놓는 것을 옆에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지금 가만히 생각하면 이 친구 사이의 아이들 얘기의 경우나 하나님이 피를 요하신다고 함부로 하나님께 대해서 평가를 하는 그런 경우나 비슷한 것이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피를 요하신다는 생각은 그들의 생각이 거기밖에 안 미쳤으니까, 즉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 평가의 영역이라는 것은 인도주의라는 관점뿐인데 그 이상 무엇이 있겠느냐 그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얼마나 많이 아느냐? 인간다운 이상의 심오한, 더 깊은 인생관이라든지 다른 평가의 기준을 가지고 있느냐? 없다면 우리도 그 일에 대해서는 해석을 하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리고 말 것입니다. “글세, 왜 그러셨는지 모르겠는데 …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니까” 하고 돌릴 수 있을 뿐이지 왜 그랬는가는 설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덕적인 평가를 할 때에 그 기준은 항상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런즉 다만 우리가 갖는 평가의 기준이 더 심오하고 높은 데로 올라가서 거기서부터 역순(逆順)으로 말하기까지는 우리 스스로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돌아가서 거룩이란 말이 늘 도덕적인 순일성을 내함하고 있다고 할 때 어떤 것을 보고 순결하다고 하느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보고 순결하다고 합니까? 사람은 자기의 의리의 관념, 의의 평가의 기준에 의해서 순결성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가령 인간의 순결성에 대해서도 평가의 기준이 항상 같지는 않습니다. 옛날에 말하던 순결성과 오늘날의 평가가 동일하지 않습니다. 또 같은 시대라도 사회에 따라서 다릅니다. 쉬운 예를 하나 들면 이조 시대에 가지고 있던 관념 하에서 여자의 순결성을 말할 때 여자가 시집을 갔으면 일부종사(一夫從事)를 하는 것입니다. 불행하게 남자가 일찍 죽었으면 여자는 수절을 하면서 일생 지내는 것이 가장 순결한 생입니다. 특히 사대부의 집안에서는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어서 만일 여자가 개가를 한다든지 하면 마치 더럽혀진 여자로 여겨 버렸습니다. 그러한 이교적인 도덕적 관념 하에 늘 젖어 있던 사람이 로마서를 읽을 때 막히는 것입니다.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할지니라”(롬 7:2-3). 성경이 왜 이런가? 남편의 법에 한번 매이면 죽으나 사나 남편의 법에 있어야지 어찌 이렇게 쓸 수가 있단 말인가? 하고 의문을 일으킨 옛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요즘에야 그런 사람이 별로 없겠지만 옛날에는 부인네들 사회에서도 속으로는 어떤지 몰라도 에이, 어디 그럴 수가 있느냐고 혀를 찼던 것입니다.

 

그러나 서양 사회에 들어가서 그들의 일발적인 윤리에서 이야기를 할 때에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무엇 때문에 남편이 죽었는데 청승스럽게 그러고 앉았느냐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가 마음으로 남편을 사모하고 사랑하고 그러고 산다면 별문제이지만 속으로는 시집을 가고 싶은 생각기 굴뚝같이 있으면서 그저 얽매여서 그런다면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이나 유럽의 사회에서 하는 짓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시집을 서너 번씩 가더라도 도무지 부끄럽게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아직 한국 사회에서는 한 남자하고 혼인하고 이혼한 다음에 둘째 남자하고 혼인하고 또 이혼하고 셋째 남자하고 혼인하면, 저거 인간 다 되어버렸다고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 사회에 가서 그런 말을 하면 말이 되겠습니까? 당장에 주먹 맞기가 쉬울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신문에 내어서 인기의 재료로 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생활을 하지 않습니까? 본인은 물론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합니다. 그러한 사회에서는 그것이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도덕적 순결이라는 것도 항상 표준이 어디 있느냐 하면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성격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성격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당신의 성격입니다. 하나님 당신의 성격에 그 표준이 딱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거룩하다’고 자처 할지라도 우리의 평가나 기준으로 옳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거룩하다는 말을 우리가 부사로 사용할 때에 그 점을 주의해야 합니다. 거룩하게 하라든지, 거룩하게 어찌어찌 하라는 말을 할 때 자칫 자기 평가, 자기 기준을 가지고 규정을 하면 잘못하면 독단이 되기 쉬운 것입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킴

 

‘주일을 거룩히 지켜야 한다’는 말을 예로 생각해 보지요. 이 선언은 정당합니다. 그러나 “주일날을 거룩히 지켜라” 할 때 주일을 거룩히 지킨다는 것이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냐 하는 방법론을 이야기하기로 하면 문제가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평가가 순전히 형식적인 종교 즉 계율적인 종교의 규율 가운데 서 있으면 그것이 전정 거룩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도덕적 순결성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의 분여(分與) 인데,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이 자기가 생각한 종교적인 어떤 규율을 지키는 것으로 주일을 성수한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굳게 가지고 있는 그 규율이란 사실 유대주의적인 관념에서 짜낸 것이 대부분입니다. 특히 한국에는 유대주의적인 관념과 제도에 의한 계율이 강하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별히 다비(Darby, John Nelson) 파의 신학이 한국에 들어와서 널리 퍼져 나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지불식간에 유대 찬양적인 관념이 강하게 지배를 하게 되었는데 그런 유대주의적인 관념의 영향으로 심지어 한국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가 아니겠느냐 하는 이야기까지 옛날에는 떠 돌아다녔습니다.

 

한국에서 누가 그것을 시작했는지 알 수 없으나 그런 유사한 증거를 한 삼십 개나 수집해 보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오늘날 비단 우리 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국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고, 심지어 일본에서도 그런 사람들을 만나 보았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사람들에게는 역시 무엇을 생각할 때 괜히 우상화하고 미화해서 견강부회(牽强附會) 곧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억지로 끌어 붙여 자기주장의 조건에 맞도록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을 이스라엘화 하려고 억지로 무엇을 끌어낸다면 도저히 이야기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 뭐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은 무엇보다 역사에 대한 큰 착오입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가운데 열 지파는 어디로 갔는지 다 아직 숨어 있고 남쪽에 있는 베냐민과 유다 지파만이 유대라고 생각하는 이론은 당치 않은 얘기입니다. 고레스 왕이 포로 귀환을 허락했을 때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하여 유대인들이 귀환 했는데 그때 이미 열두 지파 이름이 다 나왔습니다. 포로 귀환 때 다 돌아온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열두 지파 가운데 열 지파인 북쪽 이스라엘은 지금도 어디에 숨어 있고 두 지파만이 남아서 나라를 다시 건설한 것이니까 나중에 예수님이 오셔야 비로소 나머지 열 지파가 돌아와서 완전한 통일 왕국 이스라엘을 건설한다는 다비 파의 신학이란 원래 근거가 박약합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그런 근거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자꾸 주장을 합니다. 이스라엘을 영화화 해 가지고 땅 위에다 무엇을 건설한다는 생각이 썩 좋은 사상은 아닙니다.

 

주일날을 거룩히 지킨다 하는 것도 이스라엘적인 요소와 관념 하에서 해석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과거에 우리 한국교회에 이스라엘을 영화화하는 태도가 많이 흘러내려와서 거기에 비근하게 접근시키려는 경향이 없지 않은데 그렇게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비천한 자가 높은 자리를 차지한 것은 다 어디로 가고, 항상 옛날의 형식, 형상적으로 나타났던 것만을 가장 높은 것으로 보고 우리는 저 뒤에 앉아 있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은 교회론의 빈약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고귀하고 높으냐를 생각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특권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꾸 저 뒤에다 둡니다. 그런 신학이 한국을 휩쓸었습니다. 그 때는 다비 파들이 만들어 낸 말세론으로 판을 쳤습니다. 그것이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말세론이지 여기서 만들어 낸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가지고 믿고 나간 까닭에 무슨 생각을 하기만 하면 항상 다비 파와 같은 편견을 갖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 영향은 필연적으로 구약의 율법에 대해서도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구약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상을 잘못 이해하여 구약의 율법의 제도를 어떤 점에서는 성경의 말씀이나 지켜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성경의 말씀에 대한 해석을 일관성 있게 해야 할 텐데 그렇게 제멋대로 하는 것은 부정당한 태도입니다. 구약에 있는 여러 가지 제도나 법칙의 큰 뜻을 배우고 그 전체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알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 대한 해석의 태도가 항상 일치성이 있고 수긍할만한 합리성을 가져야 할 터인데 그렇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어떤 것은 전혀 해석을 안 할 뿐 아니라 아예 포기합니다. 그리고 어떤 것은 유리하니까 들고나섭니다. 예를 들면 십일조 같은 것은 유리하니까 지금도 유별나게 강조합니다.

 

주일 성수라는 말이야 원래 구약에는 없는 말입니다. ‘그 날’이라든지 ‘주의 날’이라든지 하는 말은 오늘날 말하는 주일과는 의미를 달리하여 구약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주일은 안식일일 텐데 안식일은 곧 주일이라 해서 안식일적인 규정을 주일에다 전부 그대로 둘러씌웠습니다. 그리고는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거룩하지 아니하다 합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킨다고 할 때 안식일의 규정을 전부로 삼고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하면 그것은 너무나 졸속한 태도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모세적인 계시와 제도를 오늘날 그대로 적용하고 습답하는 그것을 거룩이라고 가르친 일이 없습니다.

 

거룩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성격이라는 관점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의 목적을 위해 구별되어 있다. 그리고 도덕적인 순결성을 가진 것이다 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거룩한 속성을 나누어 받아서 흘러가는 것이라는 그런 의미로 늘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일을 거룩히 지킨다 할 때 먼저 주일이란 어떤 날인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주일이란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의 목적에 따라 그 계획을 땅 위에 구현하기 위한 중요한 심벌과 거룩한 계시의 내용으로서 우리가 가지게 된 중요한 패턴입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과 계획의 진행에서 거룩한 경계를 우리에게 보이는 바 중요한 샘플로서 주일이 존재할 때, 그런 의미를 위해서 더 분명히 드러내고 나갈 때 거룩이라는 성격은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실은 어디로 가고 땅 위에서 어떤 제도와 계율 하에 자기를 가두어 놓고 근엄하게 앉아만 있으면 된다 할 때 그것은 성경이 근본적으로 요구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혹시 히말라야 산속에서 수도하고 있는 극단적인 사람들의 태도에 가까울는지 몰라도 성경이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요구한 태도와는 많이 다른 것입니다.

 

대체 이 안식일이라는 것부터 바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안식년이나 또 안식을 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구체적이고 정당한 해석은 없이 안식일은 곧 주일날이다 해서 덮어놓고 그냥 시작을 해 버렸습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켜야 한다”는 선언은 우리도 늘 주장을 해야 할 내용입니다. 그와 동시에 주일을 거룩히 지킨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바로 해석해서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킨다 할 때 그 평가의 기준은 어디에 있느냐? 기준을 바로 파악하고 거기서부터 거룩하다든지 않다든지 평가를 해야지, 내 멋대로 만든 몇 가지 계율주의의 규정을 딱 세워 놓고 거기에 맞으면 거룩하고 안 맞으면 거룩하지 않다고 단정하면 참 부정당합니다. 그렇게 단정을 해서 나중에는 교회의 권징까지 발동해서 규율을 정하려고 야단 내는데 그런 것은 항상 주의를 해야 할 일입니다. 반면에 주일을 다른 날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하면서 다만 이 날은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 그것으로 전부이다 하는 태도라는 것도 실은 주일이 어떠한 날이라는 근본적인 정신조차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딴 짓 하는 것도 결코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가지 예를 보겠습니다.

 

거룩한 헌상

 

헌금 드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헌금을 거룩한 성물이라 할 때 그것이 어떻게 될 때에 성물이고 어떻게 되면 성물이 아닌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십일조 문제에 대해서도 주의를 해야 합니다. 십일조를 늘 강조하는데 사실상 강조하는 만큼 교회가 십일조의 정신을 파악도 하지 못할뿐더러 실행도 못 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벌써 적어도 십 수년 혹은 수십 년 우리 한국 교회가 십일조를 강조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기대할 만한 성과를 내지 않았다면 무엇이 미흡했는가 그 이유를 좀 따져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한 대답이 교인들의 신앙이 그만큼 자라지 못하고 다 태만해서 그렇다고 하면 간단한 얘기일 것입니다. 보통 생각하는 이유가 그것 아닙니까? 교인의 반수만 십일조를 내도 교회가 풍성할 텐데 왜 이렇게 십일조가 안 나오느냐 하는 것인데, 지금 하는 이야기들로는 교인들이 다 그만큼 신앙이 없다는 말밖에 안 됩니다. 교인들이 신앙이 없어서 십일조를 안 낸다고 핑계를 돌리는 것에 그친다면 그것은 문제 해결에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교인들의 마음 가운데 무엇이 헌금인지를 정신 차려서 깨닫도록 했는지가 먼저 앞서는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불분명한 상태로 수십 년 그냥 지내오면서 교회가 자라기를 바랄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모든 용어들을 바로 깨닫고 나가려고 할 때 먼저 우리가 거룩이라는 말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슨 뜻인가, 어떻게 사용했는가, 또 어떻게 적용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초대 교회가 세워질 때 생겼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행 5:1-11). 그들이 십일조를 안 내어서 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십의 몇 조를 냈을 것입니다. 얼마를 감추었다 했으니까 제 생각으로는 대부분을 내놓고 조금 감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 부부는 십일조라는 관점에서 볼 때 굉장히 열성이 있고 신앙이 돈독한 사람들인 셈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죽었다 말입니다.

 

그들이 죽은 이야기 중에는 “성신을 속였다”는 간단한 진술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평가를 했는데 성신을 속였다는 말은 어떻게 했다는 말인가? 오늘날 성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잠깐 덮어놓고 생각해 볼 때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보고서 “아, 이것은 성신을 속인 것이다”하고 말할 만큼 그 사실이 심각한 얘기입니까? 그렇게 말할 만큼 그것이 악질적인 사실이냐 하는 얘기입니다. 제 것 가지고서 제가 다 내려다가 문득 생각하길, 내가 남에게 폐를 안 끼치고 살 수 있는 사람인데 이것 다 냈다가 나중에 아무 것도 없으면 남한테 꾸러 다니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교회로부터 얻어먹는다는 것도 부담이 되니 얼마를 떼어서 감추어 두고 나머지는 다 내자 하고 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네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할 때 “네, 이것뿐입니다” 하고 거짓말 한 번 한 것입니다. 그 사람이 거짓말을 왜 했을까? 가령 구브로 사람 바나바가 자기의 전 재산을 팔아 가지고 사도의 발 앞에 두었을 때 다른 사람들이 칭송을 하니까, 칭송을 얼마나 했는지 그것도 알 수 없지만, 그 칭찬이 굉장히 부러워서 그랬는가? 사실 그렇다해도 오늘날 예배당 지을 때 많은 사람이 있는 데서 경매 부르듯이 헌금하는 식으로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칭찬이 굉장히 부러워서 그리했을 것이라도 단정하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또 그 이야기에서 보면 자기가 인기를 얻어 가지고 무엇을 하겠다는 목적 의식도 없습니다. 얘기를 보면 전부를 바치려다 얼마는 감추어 놓고 나머지를 갖다 내놓았다. 그랬는데 이제 그 다음에는 무서운 책망이 쏟아집니다.

 

그들에게 저의(底意)가 있었다면 무엇이겠는가? 만일 칭찬이 필요했다면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칭찬을 조금 들으려고 했겠나? 그런 정도이겠지요.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다 죽어야 할 것입니다. 거짓말 한 번 한 것으로 죽어야 한다면 죽을 사람이 너무 많다 그 얘기입니다. 참 단순하게 그것이 죽어야 할 죄라면 우리가 무엇을 찾아야 하는고 하니, 오늘날 눈으로 보아 굉장한 죄를 지었다고 자꾸 그 죄를 찾으려고만 말고 헌금의 예를 어디에다 세웠는가 하는 것을 찾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기 위해서 이 제도를 마련하셨는데 그 제도에 의해서 이들은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다면 오늘날도 진노 받을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복 주시는 그 사랑과 은혜의 경계에 도달하려면 지금으로는 문제가 크다 하는 것을 비로소 느끼는 것입니다. 헌상의 문제를 간단히 보아서는 안 되겠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짓말을 한 번 한 것이라든지 남에게 칭찬을 받으려는 허영이 있었다는 것이 나중에 혼이 떠날 만큼 책망 받을 일이 되었다면,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헌금의 정신은 얼마나 소홀하고 느슨하냐 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룩한 물건이라 할 때 거룩하다는 것은 그렇게 적용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평가를 하자면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드리지 않았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거룩한 물건으로 구별해서 드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단지 십일조 내는 것이 거룩한 것은 아닙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이 전 재산을 팔아서 낸다고 해도 그것이 반드시 거룩한 것은 아닙니다.

 

성신을 속인다 할 때 신을 속이는 행동이란 무슨 의미입니까? 사람이 물건을 가지고 아무리 속이려고 해도 모든 것을 통찰하시는 하나님께서 속을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적어도 성신을 기망(欺罔) 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나에게 대한 성신의 어떤 기대, 영적인 상태에서의 어떤 위배가 있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돈을 다 가지고 갔다가 얼마를 감추었다고 속으실 성신님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신을 속였다 할 때에는 결정적으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들한테 무슨 거짓말을 한 경우 “사람들 앞에 거짓말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거짓말을 했다”는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 경우는 내가 하는 거니까 한 것이지만, 성신을 속였다 할 때에는 거기에는 성신이 속는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인격자간의 상호 교통 가운데서 발생하는 일입니다. 인격자이신 성신과의 일이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슬프다”든지 “진노한다”든지 하실 때 그것은 내가 하나님을 진노케 하였다든지 하나님을 질투하게 했다 할 때에 성립하는 말입니다. 어떠한 대등한 위치에서, 적어도 주고받는 위치에서 비로소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한테 거짓말을 할 수 있고 속여 보려고 할 수도 있는 것이고 하나님을 욕되게 할 수도 있고 심지어 하나님을 훼방할 수 있는 사람도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하나님이 욕을 잡수시는 것도 아니고 거짓말에 넘어가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일단 속였다는 말이 들어갈 때 거기에는 피차 대등한 위치 즉 내가 너를 그만큼 신뢰했는데 그 신뢰를 내가 위배했구나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 비추어 우리는 거룩하다는 말뜻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비인격적인 것을 거룩하다고 말할 때의 바른 뜻

 

그런데 거룩이란 말은 도덕적 성질, 신령적인 성질을 표시하는 말입니다. 도덕적 신령적 성질을 가질 수 없는 물질에 이 말을 쓸 때는 어떤 뜻인가? 여러분, 물건이 도덕적 성격을 가질 수 있습니까? 물건이라는 것이 신령적 성격을 가질 수 있느냐 그 말입니다. 가령 돈이라는 것이 악하다는 성격을 가질 수 있습니까? 선하다는 성격을 가질 수가 있습니까? 돈 그 자체는 악한 것도 아니고 선한 것도 아니지요. 아무런 성격도 가지지 않습니다. 여기 있는 책상이 악하다든지 선하다든지 하는 성격을 가질 수 있느냐 하면 그런 성격을 못 가지는 것입니다. 즉 도덕적 성격을 안 가지는 것입니다. 집도 그렇고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악한 시간이 있어서 그 시간이 오면 사람들이 모두 그냥 저절로 악해지는 그런 일은 없는 것입니다. 또 악한 장소가 있어서 누가 그 자리에만 가면 환장해 가지고 금방 악인이 되어 야단 내다가 그 자리에서 싹 나오면 금방 다시 변하는 그런 자리란 세상에 없는 것입니다. 꼭 마찬가지로 어떤 자리에 들어갈 것 같으면, 그 자리에 공기를 한번만 호흡하면 금방 성인(聖人) 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서 가장 진실한 자식이 되는 법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배당을 거룩하다고 할 때에는 도덕적 성격하고는 상관이 없는 말입니다. 예배당이 거룩하니까 그 예배당에 들어가면 조금 전까지는 마음 가운데 오백 아귀가 야단 내던 사람이 금방 선해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단정한 사람이 되는냐 하면 그런 일은 도무지 없는 것입니다. 속에 있는 것 그냥 가지고 예배당에 들어가서 앉는 것이고 또 그냥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배당이 거룩하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주일이라는 시간이 거룩하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우리가 항상 주의해야 할 것은 이 거룩하다는 말이 원래 도덕적인 신령적인 성격을 표현하는 말이지만 어떤 물건이라든지 어떤 공간이라든지 시간에 대해서 이 말을 사용할 때에는 그것이 도덕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과 관련되어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도덕적인 성격을 띤 인격자와 관련되었을 때만 의미를 갖는다 말입니다. 도덕적인 성격을 가진 인격자라고 하면 물론 하나님과 땅 위에 있는 우리 사람들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서 사용되는 어떤 시간이나 장소 혹은 물질에다 이 거룩이란 성격적인 단어를 쓰는 것입니다.

 

주일은 거룩한 날이다 할 때는 거기에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하시고 그 날 그 시간에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그러한 거룩한 속성의 관계에서 하나님과 교통을 가질 때에 비로소 주일을 거룩한 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떠나서 어떤 시간이 저절로 거룩한 성격을 띠는 것은 아닙니다. 그 시간이 우리를 거룩한 성격으로 둘러씌워 주는 법도 없는 것입니다. 주일이 되었으니 내가 거룩해지는 것도 아니고 예배당에 갔으니 내가 거룩해질 까닭도 없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거룩한 관계를 가지고 그 시간을 구별되게 헌상한 것으로 보내기 전에는 결코 주일이 거룩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주일이 거룩하다 할 때에는 요컨대 하나님의 거룩하다는 성격이 그 시간에 유별히 나에게 발휘될 때 또 나도 하나님이 나누어 주신 그 성격을 그 날 발휘하고 있을 때 비로소 그 날은 거룩한 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 구별된 시간을 하나님을 향해서 드릴 때 그것은 순결성을 표시하는 날이 된다 그 말입니다. 그런 까닭에 시간 자체는 순결한 시간도 없고 더러운 시간도 없습니다. 시간은 그냥 시간입니다. 장소도 그렇습니다. 장소가 더럽다고 할 때는 먼지가 많이 앉고 지저분할 때 더럽다고 말하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거룩성과는 상관없는 것입니다.

 

거룩한 직분이라 할 때도 그렇습니다. 그 직분이 앉아 있는 사람의 도덕적인 성격이 거룩해야만 거룩한 직분이지, 직분은 거룩하다고 남이 승인을 해 주는데 자기는 거기 대해서 하등의 거룩에 대한 도덕적인 성격을 각성하지 못하고 느끼지도 않는다면 그이가 도무지 거룩할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암만 거룩하다 해도 최후에 가서는 거기에 대한 책임자가 누구냐 하는 것이 늘 중요한 문제입니다. 시간에 대한 책임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그가 거룩하면 그것은 거룩한 시간이 됩니다. 공간에 대한 책임자에 의해 그가 거룩하면 그것은 거룩한 것이 됩니다. 그렇지 아니할 때는 거룩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배당이라고 해서 덮어놓고 거룩한 것이 아니라 예배당이라는 장소에 대한 책임자 즉 교인들이 거룩이라는 하나님의 속성의 부분을 나누어 가졌을 때 혹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인정하셨을 때에만 거룩한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 거룩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우리는 늘 주의해야 합니다. 시간이라든지 공간이라든지 혹은 직위라든지 이 거룩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에는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께 드린 것으로서 구별되었다는 사상이 항상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이 거룩이라는 말과 구별된다는 말이 결코 동일한 개념을 표시하지는 않습니다. 둘을 섞어서 사용하는 것도 아닙니다. 구별한 것은 구별한 것이고, 거룩한 것은 거룩한 것입니다. 서로서로 흡수해 가지고 이용하는 것도 아닙니다. 구별한다고 해도 거기에 거룩하다는 바른 성격적인 내용이 붙을 때 비로소 거룩하다는 말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구별했다고 해서 덮어놓고 거룩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런 것들이 주로 구약에 나타난 거룩에 대한 사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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