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재호 목사 Pro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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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에 관하여

교회의 거룩함(2)

말씀:마태복음 6:9-13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

 

교회가 무엇인지 알려고 할 때 단순히 몇 가지 요소에 의한 개념 형성으로써 사고를 하기 시작하면 교회의 깊고 신비한 본질적인 내용을 알기가 힘든 것임을 먼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 즉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은 하나의 유기체가 바로 교회라는 관점은 당연히 ‘인격’이라고 하는 중요한 내용을 거기에 적응시켜서 생각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원래 인격이란 무엇을 원형(原形)으로 하고 쓰인 말인지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생명체가 유기적으로 활동할 때 우리는 그것을 다 인격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짐승도 초목도 생명의 활소(活素)가 유기적으로 활동을 하는 생명체이지만 초목이나 금수를 인격자라고 않습니다. 거기에 감각의 작용이 있고 본능의 충동에 의한 모든 활동이 있고 모든 생리의 기능의 발동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을 가리켜 인격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인격자라고 말할 때에는 적어도 사람부터 이야기합니다. 그 다음, 천사에 대해서도 하나의 인격자(person)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인격자라는 말이 사람의 특수한 특권적인 상태를 표시하는 데 사용되지만 그 인격이라는 말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개념의 근원 혹은 근본 요소는 어디에서 나온 것이냐? 물론 생명체이시면서 절대적인 의미에서 인격자이신 하나님에게 그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야말로 언제든지 이 퍼슨(person)이라는 말의 원형(proto­type)이십니다. 단순히 원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형(archetype)인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 거룩한 인격적인 요소를 분여받은 인간들이기에 인격자라 부르는 것입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성격(character) 가운데 인격적인 요소를 찾아내고자 하는 까닭에 이런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유기체의 움직임을 볼 때 표면상 머리가 있고 손이 있고 발이 있지만 감각 기능은 전체적으로 작용합니다. 영혼의 기능(soul faculty)을 가진 인격자는 의식 작용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행동을 유발해서 마침내 손이든 발이든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실제로 행동하는 기관 하나하나를 인격자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손이나 발을 인격자라고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세포 하나하나의 미세한 움직임이나 신진 대사의 과정에 대해서 다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그것이 생명을 구현하는 중요한 형식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포 하나하나를 가리켜서 인격자라고 않는 것입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이라 할 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한 큰 존재, 말하자면 거대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성삼위의 제2위 되신 한 분을 놓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의 머리로서 교회를 포함하고 있는 바의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그 인격자의 구성 요소인 세포, 단위의 요소들로서 연합해서 그리스도적인 거룩한 인격을 구현하는 하나의 큰 기관으로 나타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거룩한 인격을 구현하는 기관인 교회의 세포라고 할 만한 단위적인 구성 요소는 인격자들인 우리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유기체인 사람의 몸의 일부는 인격자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는 인격자인 것을 늘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효와 새로운 생명으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이루어진 거룩한 하나의 용체(容體)를-얼굴모양과 몸맵시. 구성하고 구현해 가는 단위입니다. 요컨대 교회의 속성이라고 할 때에 속성이라는 말 자체가 한 인격의 구체적인 성격을 상상하고 쓰는 말입니다. 교회라는 것을 하나의 인격적인 존재로 보고서 사용한 말입니다. 그러면 그 속성은 어떻게 구성되고 어떻게 구현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 각각에게서 거룩한 속성이 구현되어야 함

 

내 자신의 인격적인 특성은 어떻게 구성되어 나타나느냐 할 때 먼저 생각할 것은 나의 기관과 기능이 정상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놀라운 재주를 가졌다고 가정합시다. 그가 비록 놀라운 생각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그 생각을 표현할 만한 신체적은 조건이, 기관의 조건이 갖춰지지 않았을 때는 그 사람이 놀라운 생각을 가졌는지 어쨌는지 우리가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놀라운 생각을 가졌다고 하지만 무슨 큰 사고를 만나서 그것을 표현할 어떠한 기능도 남아 있지 않은 경우라면 그가 위대한 사상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인격자가 아닌 것은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 인격의 내용이 훌륭한 가치를 지닌 경우일지라도 그것이 사회적으로 실용되고 실현할 수 있는 인격의 용체에 큰 결함과 불비(不備)-갖추어지 아니함. 가 있을 때에는 인격자로서 충분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개인에 비교해서 교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가 가지고 있는 거룩한 속성, 그리스도와의 생명의 일체성, 또 보편적인 성격을 아무리 표시하려고 할지라도 그것을 나타낼 수 있는 용체에 큰 결함과 불비가 있다면 그것이 충분히 나타날 길이 있겠습니까? 그 결함과 불비는 단위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결국 세포가 파괴되어 충분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동차를 하나 생각하더라도 자동차의 여러 부속품 가운데 어떤 부분이 자꾸 고장이 생긴다면 그 자동차가 다른 자동차처럼 가동해서 기능을 정상적으로 발휘하기를 기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엔진 가운데 연로 펌프가 망가졌다면 당장에 주입(注入)을 못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거룩하다고 백 번 그 속성을 이야기해도 그것은 결국 객관적으로 교회라는 명제 하에서 교회의 속성을 논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고로 참으로 교회가 거룩하려면 어떠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는 ‘교회는 거룩한 것이니라’ 하는 공식을 배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섬기고 있는 교회가 거룩한 교회로서 충분한 능력을 발휘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하는 것이 항상 중점입니다. 그러려니까 필연적으로 이 신령한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최소 단위 하나하나에게 동일한 속성이 구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와는 달리 교회의 거룩한 인격을 구성하는 단위 하나하나가 또한 인격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라 말입니다. 하나하나가 도덕적 책임자입니다. 한 사람에게 있어서 손이 홀로 도덕적 책임을 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이라고 할 때는 그가 곧 단위로서의 도덕적 책임자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법칙에 준거해서 자기가 자의식을 가지고 생활을 해야 하는 책임을 일컬어 도덕적 책임(moral responsibility) 이라고 합니다. 윤리적 책임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칙이라는 거룩한 크라이테리어에 준해서 자기가 거기 부응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이것이 도덕이라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분 부분이 신성의 속성을 구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결국 교인 개개인이 거룩한 하나님의 속성을 나누어 받은 사람으로서 제각각 충분한 위치에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그 생활의 행진 가운데 거룩함(holiness)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홀리니스의 프로세스(process)를 동시에 가져야 한다 말씀이오. 이것은 단순히 거룩한 위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위치라는 것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보혈로 사셔서 크신 은혜로 나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롭다고 선언하셨다는 사실과 연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의롭다고 선언하셨을지라도 그것이 나에게 적용되어서 내 자신이 그것을 확인하고 확신하고, 그리하여 그것이 나에게 구현되기까지는 의롭다고 선언하신 사실이 역사상으로 실효를 나타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의롭다고 선언하셨다는 사실은 두 가지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선언하셨다는 큰 사실, 선포로 말미암은 위치 혹은 자격의 결정이 있습니다. 둘째는 그 결정된 자격이 나에게 실질적으로 효과를 나타내는 이것이 늘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속성을 우리에게 위치적으로 주셨다고 실컷 이야기할지라도 내 생활의 과정 가운데 거룩하다는 것이 구현되지 아니하면, 구체적으로 실현되어 나가지 아니할 때에는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교회는 거룩한 것이니라’고 백 번 이야기하여도 내가 몸담고 있는 교회의 어떤 부분 즉 내가 차지하고 있는 부분만큼은 이지러졌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생활은 거룩하지 않거든요.

 

교인 사생활과 교회의 성격

 

그런고로 이 인격이라는 말에 대해서 주의하자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거룩을 생각할 때에 신자 개개인의 생활이라는 것이 교회의 속성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라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이 말을 다시 좀더 진전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교회의 생활이라는 말은 내가 교회안에서 생활한다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교회가 한 개의 생명력을 가진 인격자라면 그것 자체의 생활이 있을 것입니다. 그 자체의 움직임과 지향하는 바와 또 그 자체가 이루어 가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움직임, 지향하는 목표,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 나가는 결과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그 자체의 생활이라고 합시다. 그러니까 그것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생활이지요. 교회가 가지고 있는 생활이 별달리 공중에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예배당에 가서 예배드리는 생활이 교회가 가지고 있는 생활의 전부는 아닙니다. 물로 대부분도 아닌 것입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생활이라는 것, 교회 자체가 가지고 있는 성격의 구현이나 그것을 역사 위에서 증시해 나가는 전체의 생활 진행은 순전히 교인 하나하나가 자기 집에서 혹은 직장에서 하는 생활입니다. 교인의 사생활을 떠나서 교회의 성격이라는 것은 구성되지 않습니다.

 

교회가 공동으로 앉아서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은 대략 한 주일 생활의 십분의 일도 안 될 것입니다. 전 생활의 십분의 구는 우리가 교회 밖에서 보내는 것입니다. 교회의 생활이 우리 생명의 대표적인 시간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우리 생활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의 성격을 구성하는 전부입니까? 사실 우리의 성격을 구성하고 구현하는 생활의 대부분이란 가정과 직장에서 하는 생활입니다. 교회의 생활이란 우리가 늘 그렇게 생활해야 하겠다는 표준은 될 수 있지만 사실 그 표준대로 우리가 다 살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것이 대표적이요 전형적이라는 사상조차 희박해져 버렸습니다. 오히려 교회의 생활은 자기의 종교에 불과하고 개인의 사생활이야말로 자기의 진짜 생활이라는 식으로 분리하는 것이 오늘날의 현상입니다.

 

그럴지라도 바른 것을 교회에서 가르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가 거룩하려면 교우 개인의 생활이 거룩해야 함을 강조해야 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생활이 거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집에서 아이들을 기를 때도 그렇고 밥을 먹을 때도 그렇고 부인들이 씨서리를-써레로 논바닥을 고르거나 흙덩이를 잘게 부수는 일. 할 때도 마찬가지로 그 생활 하나하나에 거룩하다는 속성이 구체적으로 늘 나타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교회가 저 혼자 거룩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끌어안고 산다고 해도 별달리 교회만 거룩하게 되는 수가 없습니다. 예배당 문 바깥에 있는 이 거친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혹은 시장에서 아귀다툼을 하고 지나면서 보내는 생활 하나하나가 한마디로 ‘교회의 생활’입니다. 그의 교회 생활이라는 말이 아니라 교회 자체가 가지는 생활이라 그 말입니다. 그것이 교회 자체가 가지고 있는 호흡입니다. 결국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생활, 교회에 대한 확실한 의식이 있는 교우들의 생활 상태 여하가 교회의 성격을 구성지어 주는 것입니다. 교우들이 그것을 각성하여서 아, 내가 집에서 애들 데리고 욕 한마디 하는 것도 곧 교회의 성격을 만들어 내는 데 큰 관계를 가지는구나. 하고 느끼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먼저는 그렇게 가르쳐야 합니다. 시정(市井)에서- 인가가 모인 곳. 중국 상대(上代)에 우물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여 살았다는 데서 유래한다.하는 나의 행동은 교회의 신성한 성격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겠지 혹은 관계가 희박하겠지, 한다면 큰 문제입니다. 그렇게 생각지 않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애들 데리고 욕 한마디 하는 그 마음자리를 가지고 와서 교회 봉사도 하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하고 아귀다툼을 하던 그 마음자리가 교회에 들어와서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교회 일 의논하고 여타의 교회 봉사도 하겠다고 떠드는 것입니다. 동일한 마음에서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하는 것이라 말입니다.

교회가 호흡을 하고 있느냐,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느냐, 어떤 성격을 표시하고 있느냐 할 때 우리 교인 개인 개인을 놓고 보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활들을 하고 있는가? 교인의 생활은 잡다합니다. 어떤 사람은 시장 마당에 가서 싸우는 시간에 다른 한 사람은 조용히 골방에 앉아서 기도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모두 합쳐 가지고 한 개의 성격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시장에서 싸움을 하는 사람은 교회의 속성에 상관이 없고 골방에서 기도하는 사람만 상관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이 다 뭉쳐 가지고 결국은 어떤 공통 인자라는 것을 하나 내놓는 것입니다. 그것에 의해서 교회의 성격은 지어져가는 것입니다. 결국 이상적으로 이야기하면 교인 하나하나의 생활이 다 신령하고 거룩해야 거룩한 교회의 성격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실상으로는 적어도 교인들 전체의 경향과 또 대부분의 교우가 신령한 생활을 해야 하겠구나 하고 밀고 나가야만 거룩한 교회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강설은 교회의 몇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우 전체에게 하는 것입니다. 교우 전체가 빠짐없이 강설을 다 잘 듣고 그렇게 은혜 받기를 원하지만 다 그렇게는 되지 않습니다. 다는 안 될지라도 대부분은 그렇게 되어야 하겠다 말입니다. 강설을 했는데 교인 가운데 일부만 듣고 나머지 대부분은 그것을 안 들으면 그 강설이 실효 있기는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말하는 거룩하다는 것의 개념

 

이제 우리가 배워 나가는 것, ‘거룩하다’는 말을 다시 계속 생각하기로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거룩함이란 말에 대해서 늘 주의를 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세속적인 거룩함의 개념을 그대로 그냥 교회에다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앞서 구약에 나타나 있는 거룩함이란 말뜻을 종합해서 하나의 아이디어를 배웠는데 오늘부터 신약에 있는 이 거룩함이라는 말에 대해서 잠깐 일별을-한 번 죽 훑어 봄. 하고 그것을 종합해서 거룩이란 개념을 굳히는 것이 좋을 줄 압니다.

 

신약에서 거룩함이란 말은 구약과 비슷한 뜻의 동사 ‘하기아조’(αγιαξω) 라는 말을 썼습니다. 이 말을 ‘구별한다’ ‘따로 떼어서 드린다’ 즉 ‘헌상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어느 편으로 더 의미가 강하냐 하면 단순히 그냥 나눠 놓는다는 의미보다 헌상한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그러니까 아무런 목적이 없이 나눠 놓은 것이 아니라 그 목적은 분명히 ‘위로 올린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미추(美醜)의-아름다움과 추함. 관계에서 정결하게 한다 혹은 정화한다(clense). 순결케 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원학에 관한 이야기를 누누이 논할 것은 없습니다만 이 하기아조라는 말은 ‘하기오스’(αγιοs) 라는 말에서 왔는데, 구약에 있는 ‘카도쉬’(קדש)라는 말에 해당합니다. 그런고로 역시 ‘구별한다’, ‘분리한다’는 말뜻이 강합니다.

 

그런데 신약에서 이 거룩 곧 ‘하기오스’라는 말이 몇 개의 다른 의미로 쓰였습니다. 첫째는 이것이 지적(知的)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6:9절 이하의 주기도문이 나오는 잘 아시는 말씀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도 거룩함이란 말을 배웠지만 이 말이 어떤 경우에는 도덕적 성격을 표시하는 용어입니다. 도덕적인 성격을 표시할 것인데 그렇지 않은 대상에게도 거룩함이라는 말을 쓰는 일이 왕왕이 있습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할 때 이름 자체는 도덕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름은 부호이니까요. 엄격하게 따지면 이름은 부호에 불과한 것입니다. 김홍전 하면, 나는 도덕적 책임을 분명히 가진 사람이지만 김홍전이라는 이름 자체는 나를 표시하는 것일 뿐 아무것도 아니지요. 이름이라는 것은 ‘김’ ‘홍’ ‘전’이라는 발음뿐이에요. 이 발음이 합해서 한 부호를 이룬 것입니다. 그런데 인격자 본인을 거룩하게 한다면 별문제이지만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는 말을 한다면 엄격하게 따질 때 그것은 도덕적인 성격을 가지지 아니한 부호에 거룩하다는 말을 사용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경우에 사람들은 모두 그 이름이라는 말이 표시하고 있는 하나님 당신의 실재를, 존재를 전체적으로 대표한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서 “예수의 이름 권세여!” 하고 “그 이름 찬송합시다”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이름 찬양합시다 할 때는 이름이라는 부호를 찬양한다는 말은 아니고 사실은 그 이름이 대표하고 있는 바 실재적인 그분을 찬송한다는 말이지요. 그렇지만 그런 의미로 보자면 그것은 상당히 정신적인 의미로 쓰인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구약의 경우와 유사한 용법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거룩한 날’ 하면 시간이 거룩하다 말입니다. 그러면 날이란 시간은 무엇을 대표하고 있습니까? 이름은 마땅히 그 이름이 표시하는 바 도덕적인 존재를 가리킨다는 것을 예상하는 것이지만 ‘날’ 하면 날이 대표하는 무슨 도덕적인 존재자가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지난번 구약의 용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거룩한 날’ 할 때는 분명히 어떤 사상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 ‘날’이 대표하고 있는 바 가장 중심적인 그 날의 주인 되는 이 혹은 지배자라는 도덕적인 존재를 예산하고 전제로 하고 거룩한 날이라는 말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 시간이 거룩하다는 그것 자체만으로는 의미를 안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날이 대표하고 있는 바 도덕적인 존재는 누구냐?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하신 것처럼 항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즉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이 시간적인 카테고리가 인간에게 부여되었다는 것을 전체로 하고서야 거룩한 날이라는 말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그냥 막연히 거룩한 날이라고 할 때에는 의미가 희박해집니다.

 

또 거룩한 장소, 성소(聖所) 라 하는 말도 그렇습니다. 성소가 무엇을 대표하고 있느냐? 거룩하신 하나님을 또한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룩한 물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에서 쓰던 성물들이 무엇을 대표했느냐? 그것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인격을 구현하는 한 기구, 표현 방도로 존재할 때 거룩한 물건이었던 것입니다. 항상 그 안에 있는 도덕적 실재를 전제로 하고서 거룩한 시간, 장소, 물질이라는 말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한 발 더 들어가서 생각할 때 거룩한 날 하면 단순히 구별된 날이란 뜻만이 아니라 거기에는 분명히 도덕적 성격인 순결성을 포함하고서 쓰는 말입니다. 구별할 뿐 아니라 도덕적 순결성이 있고, 반드시 하나님께 드린다는 구체적인 방향을 취한다는 내용들이 거기 붙어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상이 신약에 와서도 마찬가지로 그대로 사용되었습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서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벧전 3:15). ‘내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서 거룩하게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누구를 거룩하게 하라는 말이냐 하면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삼는 너희의 관념(idea), 너희의 사고의 결정(結晶)을 거룩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시간, 공간, 물질뿐 아니라 어떤 정신적인 현상에 대해서도 ‘거룩함’이라는 말을 적용한 예를 보는 것입니다. 가령 그리스도를 주로 삼는다는 한 개의 아이디어는 ‘그리스도’라는 개념, ‘주’라는 개념, 또 ‘삼는다’는 말까지 모두 합쳐서 형성한 관념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그것 자체로 독립하여 존재할 수 있느냐? 참으로 신비한 사실이지만, 사람의 사고 작용이라는 것이 전 인격적인 작용 전체의 움직임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지 그것만 똑 떨어져 가지고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고하면 필연적으로 지적인 감정(intellectual feeling) 이라는 것이 움직이게 됩니다. 이것을 가리켜 심리학상 정조(貞操: sentiment)라고 합니다. 센티멘트 없이 사고만 따로 독립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얼마만큼 인지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제2차적인 반성의 작용에 의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고, 그에 대한 우리 자신의 가부(可否) 의 의지의 움직임이라는 것이 늘 동(動) 하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의 영혼의 기능은 한 개의 단위로서 총체적으로 조화 있게 움직이는 것이지 영혼의 기능의 한 부분만 움직이고 다른 한 부분은 전혀 안 움직인다는 법은 없는 것입니다. 적어도 의식 작용에서도 그렇습니다. 꿈을 꿀 때 무의식적으로 혹은 잠재의식이 작용하는 것은 조금 별문제이겠지만, 그리스도를 주로 삼는다 할 때에는 자연히 먼저 그리스도라는 거룩한 한 인물에 대해서 평가하는 중요한 사고 작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 삼았을 때는 그에게 이미 가치 판단의 작용이 선행된 것입니다. 우리의 판단 작용 가운데 첫째로 사실 판단이 있고 다음으로 그 사실에 대한 자기의 주관적인 가치를 결정하는 가치 판단의 작용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영혼의 기능은 부분 부분이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조화 있게 총체적으로 작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삼는다는 한 구체적인 관념을 형성합니다.

 

어떠한 사상이든지 형성된 사상은 그 사람의 도덕적인 행동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보통 생각하고 다음에 뜻을 두고 그다음에 정이 움직이고 그리고 나서 행동합니다. 그러나 정이 반드시 행동에 비해 앞서는 것은 아닙니다. 오래 있다가 정이 붙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사고 작용과 의지의 발동이란 사실은 앞서는 요소입니다. 사고하여 의지가 발동하면 거기에 대해서 나중에 우리의 마음 가운데 가(可) 하다든지 부(不) 하다든지 하는 정이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에 하였다’ 할 때는 먼저 그리스도를 주로 삼은 중요한 영혼의 기능의 작용이 결국 우리 안에 도덕적인 성격을 구성하는 한 초석을 놓고 그것을 구성하는 한 행동을 벌써 시작하는 것이라 말입니다.

 

우리가 좀더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사도 베드로가 쓴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한다’는 말에다가 ‘신학을 한다’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한다’든지 하는 말을 넣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아는 너희의 관념과 자식의 내용을 거룩하게 하라. 했다면 만물이 다 주께로부터 나와서 주로 말미암아서 주께로 돌아가는 큰 사실, 결국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으로써 거룩해야 할 것이다 하는 뜻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도덕적 책임을 지는 초석으로서 출발해야 합니다. 가령 신학을 한다고 할 때 그것이 자기 지식의 축적이 된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하고 싶으니까 한다든지 혹시는 작업을 위해서 한다든지 한다면 그것은 아주 미흡한 것이니다. 하나님 말씀을 공부할 때에 단지 학문을 위해서 한다든지 혹은 자기의 지식을 풍부하게 하기 위하여 한다든지 하면 그것은 참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는 거룩하지 않은 것입니다. 반드시 목표는 하나 있어야 합니다. 그 목표는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신학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데에는 반드시 한 목표가 있는 것인데 그것은 거룩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삼았다 할 때도 그 관념이 우리에게 있음으로써 우리가 거룩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즉 그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께 드린 것으로, 순결한 것이라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거룩하다는 말을 사용할 때 궁극적으로는 항상 거기에 도덕적인 인격자의 책임을 붙여 가지고 사용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에도 반드시 인격자의 책임이 거기에 수반된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됩니다. ‘관념을 거룩하게 하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보통 얘기가 아닙니다. 관념을 명백히 하라든지 관념을 구체화하라든지 하면 내 속에 잘 정돈한다든지 뚜렷이 잠재시킨다든지 하는 정도에서 끝나겠지만, 도덕적인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는 말로써 거룩하게 하라고 했으면 전인적인 품성을 드러내는 총체적인 활동을 해야 하겠다 말입니다.

 

거룩하다는 것과 도덕적 실재자와의 밀접한 관계

 

거룩하는 말을 단순히 구별되게 하라든지 순결하게 하라든지 다른 것과 명백하게 가르라 하는 정도로 해석하면 거룩함이 가지는 다른 중요한 속성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성경에 거룩하라는 말이 나올 때 늘 주의해야 할 것은 도덕적인 실재자와의 관계를 무시하고 해석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주일 성수의 문제에서도 그것은 그 시간이 도덕적 실재자를 대표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도덕적 실재자를 무시하고서 자기가 실재자가 되어서 주일을 거룩히 지킨다는 사상을 갖는다면 위험한 우상에 빠져들어가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겠습니다. 주일 성수란 주일이 거룩하다는 사상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주일이 거룩하다는 사상을 떠나서 만일 그 말을 쓰면 거기에 남는 도덕적 책임자는 나밖에 안 남는 것입니다. 내가 주일을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지킨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내가 거룩하다는 가치를 부여하는 자로 거기 존재한다는 말이 됩니다. 주일이 내가 거룩이라는 가치를 부여함으로 거룩해지는 것입니까? 그것이 있기 전에 내가 밤낮 주일을 반대하고 무시하고 무관심했다 할지라도 엄연히 거기에는 도덕적 실재자가 어떤 시간을 도구로 사용하사 당신의 속성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그런 날의 한 구체적인 대표가 주일입니다. 그래서 주일이 거룩하다 하는 말은 요컨대 이 시간이 대표하고 있는 바 도덕적 실재자가 계셔서 그 실재자의 거룩한 속성이 시간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인데, 우리는 다만 그 중요한 전례(sample) 로서 주일을 지킨 것일 뿐입니다. 그러면 월요일은 어떤가? 그 시간에도 거룩한 실재자는 존재하사 당신의 거룩한 속성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의 어떠함같이 그 시간의 성격을 부여하려면 나는 월요일에도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주일날은 성수하고 월요일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좋다는 그런 이론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또한 중요한 사상입니다.

 

그리고 만일 그렇게 성격을 부여하는 도덕적 실재자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 내가 된다고 할 때, 일주일에 가령 목요일이면 목요일 하루는 구별해서 특별히 지켰다고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못 하는 것 아니지요. 그렇다면 말이오. 그런 의미로 “주일은 내가 이러이러한 종교적인 규율을 지킴으로써 이 날을 거룩히 지키겠다 한다면 그것은 어떻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입니다. 몇 가지 종교적 규율을 지키는 것으로 이 거룩함이라는 도덕적 성격이 성격화해서 나오지는 않습니다. 가령 밥을 안 사먹고 집에 가서 찬밥만 먹고, 내가 자동차도 안 타고 걸어서 예배당에 가기만 하면 주일은 거룩하게 되고 나는 주일을 거룩히 지킨 것이냐? 거기에 어떤 도덕적인 가치가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순전히 의식적 가치가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순전히 의식적인 문제입니다. 종교상 의식뿐이지 그것 자체가 도덕적 성격을 구현하는 것은 아닙니다. 혹여 어떤 사람은 그 날 금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금식은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을 나누어 받은 사람이 그 날 거룩한 도덕적 성격을 특수하게 표시하기 위하여 하는 행동이라고 우리가 용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용인할 뿐 아니라 그것이 가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떠나서 종교적 계율의 조목으로서 자기가 그것을 지키느라고 한다면 참 의미 없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에서 주일 성수라는 말을 가지고 얘기를 많이 하지만 대체 성수를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성수에 해당하는 몇 가지 종교적 계율을 딱 세워 놓고 그 계율을 지키는 것은 성수요 위배하면 성수가 아니다 하는 식으로만 해석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도덕적 실재자의 문제라든지 실재자의 속성을 어떻게 분여받아서 어떻게 구현했느냐 하는 문제와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불교도들도 어떤 계율을 세운 다음에 그 계율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불교도가 비린 것을 금하고 고기를 안 먹었다고 해서 그것이 도덕적으로 무슨 가치를 가졌느냐,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말입니다. 만일 종교가 그런 식으로 떨어지면, 그것이 전부라면 그것은 타락입니다.

 

우리가 종교의 형식이라는 것을 무시해 버릴 수 없습니다. 특별히 구약의 여러 가지 의식과 제도는 그것을 통해서 무엇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계시하신 본질은 어디로 가고 의식과 제례만 남아 있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같은 제사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려고 내신 은혜의 방도로서 첫째는 계시인 것입니다. 그런데 번제나 소제나 화목제를 드려 놓고도 계시는 어디로 가고 제사만 남았을 때 구약 시대에도 성도(聖徒)는 거기에 대해서 반발했던 것입니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시 51:16).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시 40:6). 같은 구약에서 한쪽에는 제사를 드리라고 명해 놓으시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것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하신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 시대에 이스라엘은 아주 찬란하고 난숙한 문화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유대교 식으로 볼 때 의식적으로 일대의 찬란한 종교 개혁을 이룬 것입니다. 그래서 주후 3세기의 유명한 스승 가운데 한 사람인 힐렐(Hillel ben Gamaliel Ⅲ)은 말하길 “우리는 메시야가 오기를 가다릴 것이 없다. 이미 히스기야 왕 시대에 메시야가 온 것을 우리가 다 경험을 했으므로 우리는 앞으로 메시야가 올 것을 기대할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 그렇게 말할 만큼 히스기야의 왕조는 위대한 유대교적인 종교 개혁을 성취하였습니다. 그런 시대에 이사야가 일어나서 타매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사 1:10-11).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리고 레위기에서 요구하던 제사를 당장에 시편에 와서 주께서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해 버렸습니다. 요컨대 성경이 무엇을 말했을 때에는 거기에 의미하는 바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의미하는 바의 무엇을 어디로 가고 모양만 남아 버리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만일 어떤 날을 구별했다 하는 것은 다만 구별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 날이 거룩하려면 도덕적인 성격을 가져야 합니다. 시간이 도덕적 성격을 가질 수 없지만 도덕적 실재자가 그 날의 주인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일날을 도덕적으로 성격화하지는 못합니다. 그렇게 할 기능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인간은 못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이라는 인과 관계나 범주 위에 서 계신 하나님만은 그것을 성격화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를 떠나서 인간들끼리 자기네가 몇 가지 종교의 의식을 지킴으로 “이것은 거룩한 것이니라” 한다면 그 거룩이라는 말 자체가 벌써 부당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이교에서 하는 것과 아무것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불교도 그렇게 어떤 날을 정하고 그 날은 자기네가 금계(禁戒)를 합니다. 모슬렘은 라마단이란 절기를 정해서 그 기간에는 금식을 하며 계율을 지킵니다. 불쌍하게 의미 없이 금식을 하지만 회교도이니까 그렇게 합니다. 이 거룩하라는 말에 대해서 우리가 항상 주의해야 할 이유는 이렇게 명백합니다. 벧전 3:15에 있는 말씀 즉 어떤 관념을 거룩하게 하라고 할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주의해야 합니다. 그냥 쓸어서 해석하지 말고 명확하게 찾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오늘 한 군데만 더 보겠는데 누가복음 11:2절입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6:9절과 같은데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하는 구절입니다. 마태복음 6:9절과 누가복음 11:2절에 있는 이 말씀은 ‘내가 그 이름을 거룩히 여겨야 한다’하는 말입니다. ‘아버님께서는 그것을 받으십시오’하는 말이지 하나님 당신께서 친히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내가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 할 때 엄격히 말하자면 이름이라는 그것도 관념이라는 범주에서는 안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름 자체만을 떼어서 보면 그것은 한 부호이지요. 그러나 그 이름이 무엇을 대표하느냐, 표시하느냐 하면 거룩하신 그분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이 경우에는 그 대상이 거룩하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시간이라든지 공간이라든지 관념이라든지 물체라든지 하는 물질보다 그것이 대표하고 있는 바 도덕적 실재자에 대한 것을 늘 상정하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거룩함을 돌린다’고 할 때는 먼저 ‘거기에 거룩한 속성이 있나이다’하는 것을 우리가 인지하고 동시에 우리의 언어나 생활 행동으로 그분이 거룩하다는 것을 증시한다는 말입니다. 원래 이 ‘돌린다’는 말이 그런 뜻 아닙니까? 영광을 돌린다고 할 때 내가 말로 “하나님이여 영광을 돌리옵나이다” 함으로써 그 영광이 돌아갑니까? 돌린다는 말을 쓸 때에는 첫째, 그 거룩하다는 사실을 내가 인지하고 인정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내 언어나 행동을 가지고 그것으 그렇다는 것을 증시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영광을 돌립니다’할 때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받아서 남에게 비추기 전에는 영광이 돌아갈 까닭에 이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거룩함을 돌린다 할 때도 나 자신의 언어, 행동, 표현에 의해서 거룩하다는 것이 분명히 증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주기도문을 해석할 때 그 말을 늘 쓰지만, “아버지여!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하는 것은 내 자신이 그 거룩한 속성을 나누어 받아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다는 것을 증시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이고, 그런 기도라야 비로소 정당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다는 것을 도무지 이 사회나 바깥에 증시하지 못고 개차반이 되어서 돌아다니면서 “하나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소서”하면 “내가 너 때문에 욕을 숱하게 많이 먹었다. 무엇이 거룩하냐”하실 것입니다. 문제는 자기 자신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신성성을 증시하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이, 저 사람 하나님 믿고 난 다음부터는 참말로 그 독특한 거룩함이라는 속성이 나타난다. 하며 말로라도 표시할 때 비로소 거룩함을 돌리는 것입니다. 즉 내 생활이나 행동을 통해 다른 사람이 아, 하나님 그분은 거룩한 분이구나 하는 것을 인정하는 사실, 히스토리를 만들고서 이것을 받으십시오 하는 상태라야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 하는 말뜻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도덕적 책임자는 누구냐 하면 나인 것입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소서”할 때에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그렇게 거룩하게 드려야 할 책임자는 나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 당신이 최후의 책임자가 아니라 내가 책임을 지고 하는 것입니다. 신약의 용례들을 좀더 보아야 할 것인데 다음 시간에 또 보기로 하지요.

 

기도

 

거룩하신 아버님, 아버님께서 거룩하시므로 저희에게도 거룩하라 하셨습니다. 저희에게 거룩한 위치와 능력을 주셨고 그것으로 거룩한 생활의 열매를 맺도록 요구하셨나이다. 그저 막연한 생각 가운데 거룩함을 독단해서는 아니 될 것이고 참으로 거룩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야 할 줄 아옵나이다. 주님, 성신님으로 저희에게 비추시고 더욱 가르쳐 주셔서 분명히 깨닫게 하시며, 저희가 바로 알뿐더러 성신님으로 격려하시고 책망하시고 이끌어 주셔서 주님이 거룩하다는 사실을 바로 증시하게 하시옵소서. 그렇게 함으로 아버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길 수 있게 하시고 거룩함을 아버지께 돌려드리게 하옵소서. 주님 저희 생활의 면면에는 항상 막연하고 추상적이고 불분명한 것이 많사옵나이다. 주님께서 저희들을 다 주장하셔서 저희들이 책임 있는 사람답게 행동하게 하시고, 어떤 막연한 몽롱한 상태를 그대로 호도(糊塗)하고 지나가지 않게 하옵소서. 주일을 거룩히 지킨다는 말에 대해서도 참 의미를 바로 알고 바로 가르칠 수 있게 하시고, 혹은 어떤 장소나 어떤 물질을 거룩하다 할 때 항상 그 의미를 바로 깨닫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교회가 거룩하다 할 때에 교회가 가지고 있는 이 속성의 큰 뜻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도 더욱 명백하게 알기를 원하옵나이다. 교회가 어떠한 상태로 존재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항상 주의하게 하시고 주께서 맡기신 교회의 상태가 암매와 저락(低落)과 배회에 머물게 하는 무책임한 게으른 종이 되지 않게 저희를 깨우치시며 책망하시옵소서. 저희가 알지 못해서 부지불식간에 책임을 비키고 지나간 일이 많이 있는 것을 다 용서하시고, 이 혼탁한 배교의 세대에 참 교회는 어떠한 것인가를 확실히 증명하고 실증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옵나이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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