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전 박사 교회에 관하여-교회의 거룩함(3)

by 손재호 on Apr 23,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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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에 관하여

교회의 거룩함(3)

말씀:에베소서 1:15-23

 

신약에 나타난 ‘거룩하다’는 말의 뜻

 

교회의 속성 가운데 하나인 거룩함에 대해서 이야기해 나가는 중입니다. 신약에 있는 ‘하기오스’(αγιοs)의 우리말은 ‘거룩하다’라는 형용사인데, 동사형으로 만들면 ‘거룩하게 하다’ 혹은 ‘거룩하게 된다’ 하고 한다 혹은 된다는 말을 거기다 붙여야 할 것인데 헬라어의 그 동사는 ‘하기아조’(αγιαξω)입니다. 이 말은 구별한다. 구별하여 드린다. 정화한다 혹은 순수하게 한다 이런 뜻을 가진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구별했다’는 뜻을 제일 잘 표시하고 있는데 그 밖의 다른 의미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정신적인 면에서 어떤 물질이나 사람에게 적용하여 신성화한다 할 때 ‘그 대상을 거룩하다고 여긴다. 인정한다’는 의미로 많이 쓰입니다. 그 다음에 둘째로 교회 의식상의 의미로서는 일반적인 목적에서 구별해서 어떤 특별한 신성한 목적을 위하여 따로 떼어놓았다. 어떤 특별한 직위, 직분을 위해서 따로 떼어놓았다 하는 데에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셋째로는 거룩하게 한다 혹은 신성화(神聖化) 한다는 뜻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 말은 성신님의 역사 즉 하나님의 역사를 통하여 그 개인 안에서 그 사람 자신으로 하여금 거룩한 품성을 터득케 한다. 거룩한 품성을 가지게 한다는 의미로 신약에 많이 나타납니다. 그 다음에 또 주로 속죄 혹은 보상한다는 의미로서도 거룩하는 말을 많이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특별히 히브리서에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말하자면 바울 서신에 있는 ‘의롭게 한다’는 말과 깊이 관련시켜서 쓰는 말입니다.

 

‘거룩하다’ 하는 뜻의 다른 용어를 신약에서 빼내어서 볼 것 같으면 예를 들어 ‘히에로스’(ιεροs) 라든지 ‘호시오스’(οσιοs) 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들을 다 사용하기는 했을지라도 특별히 도덕적인 성격을 표시한 것은 아닙니다. ‘히에로스’는 어떤 물질의 불가침성을 표시하려 할 때에 쓴 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있는 까닭에 함부로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서 쓴 것이 ‘히에로스’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호이오스’는 물질이나 하나님이나 혹은 그리스도에게 적용한 말로서 그 대상이 더럽힘과는 상관이 없이 구별되어 있다. 악한 것과는 상관이 없이 떨어져 있다. 좀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종교적으로 모든 도덕적인 의무를 성취하고 있다. 즉 도덕적인 요구에 응하고 있다는 의미로 사용된 말입니다. 그 다음에 있는 거룩하다는 말의 또 하나인 ‘하그노스’(αγνοs) 는 모든 불순과 오염에서 윤리적으로 유리되어 있다는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제일 많이 사용하고 있는 거룩하다는 말은 ‘하기오스’인데 이 말은 신약전서에서 참으로 특성이 있는 용어입니다. 물론 이 말이 신약에서 늘 동일한 뜻만을 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말의 큰 뜻은 하나님 봉사를 위해서, 하나님을 받들고 섬기는 일을 위해서 구별되고 봉헌(奉獻) 되어 있는 것이다 하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고로 그것은 자기 자체를 이 세상의 더럽힘에서 온전히 구별해 놓고 동시에 하나님의 순수성을 분배받아 가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하기오스’라는 말은 도덕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거룩한 선지자’라 하면 그가 도덕적으로 위대하다는 말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목적을 위해서 구별된 사람이다’ 하는 뜻입니다. 특별히 선지자의 직분인 말씀을 맡아서 전파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서 ‘거룩한 선지자’(눅 1:70)입니다. 엡 3:5에도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이란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선지자’ 이런 말들이 다 있습니다(눅 1:70; 행 3:21; 벧후 3:2).

윤리적인 의미로 보아서 무엇이 거룩하다 할 때에는 거기에 어떤 한 성질이 있다는 것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윤리적 성경 혹은 자격이라고 할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 가까운 관계로 능히 설 수 있는 자에게 요구되는 성질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가까운 관계 가운데 서 있는 자로서 필요한 성질을 거룩하다는 말로 표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이 받으실 만하게 하나님을 봉사하기 위해서 필요한 성질이 거룩함입니다. 이렇게 거룩함이라 할 때는 도덕적인 성격을 표시하는 말로서 하나님과 아주 가까운 관계에서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열납하시도록 섬기기에 필요한 성격입니다. 특별히 성화라 하는 말을 쓸 때에는 그런 의미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말로는 성화(sanctification)라는 말과 거룩함(holiness)이라는 말을 다 동일하게 ‘거룩하다’ ‘신성하다’라는 말로 율(律)해 버려서 특별히 구별점을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거룩하다 할 때의 ‘홀리니스’라는 말은 주로 외부적인 상태와 그의 주관적인 성질이라는 것을 다 같이 뜻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까이 맺고 그가 기쁘시게 받을 만한 봉사에 필요한 성질로서의 거룩함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의 존재를 놓고 말할 때는 구별된 곳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목적을 위해서 따로 떼어놓은 자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자체의 성격은 어떤가 할 때 도덕적으로 순결하다는 것을 표시하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거룩하다 할 때에는 그 정신을 불순과 오욕에서 온전히 구별해 놓은 것이고, 또 우리 육신의 욕망과 마음의 욕망이 이끌고 들어가는 죄악들을 전부 배척하고 부인해 나가는 정신을 거룩하다는 말로 표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약에 나타나 있는 바 거룩이라는 말뜻을 이렇게 간단하게 요약해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성화의 본질과 특성

 

이제 우리가 이것을 종합적으로 한번 빨리 보면 이렇습니다. 거룩함이란 성신님의 계속적인 은혜로운 역사로 말미암아 죄인을 정화하고 그의 전 품성을 하나님의 형상처럼 새롭게 하는 것이며 그로 하여금 하나님이 정하신 바 선한 일들을 능히 행할 수 있도록 만든 성신의 역사 자체인데 그것을 성화(聖化)의 역사라고도 말합니다. 이것이 칭의와 다른 점은 먼저 사람의 내면 생활에서 발생하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칭의가 하나님의 법적인 사실을 표시하는 말인데 비해 이것은 하나님의 재창조적인 행동을 표시하는 말로서 흔히는 장기간의 과정을 겪어야 할 것이지만, 또한 마침내 우리의 인생에서는 결코 완전에 도달하는 일이 없는 것이 이 성화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이기는 하지만 신자는 또한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시려고 하시는 이 역사에 대해서 어떠한 반응을 일으켜야 할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하시고 또 무엇을 말하고 생각할 수도 있게 하시고 그 생각에 따라 행동하게도 하셨습니다. 그런 영혼의 기능을 우리에게 다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이성의 판단과 주장에 의해서 움직여서 우리의 영혼이 여러 기능들이 자유롭게 거룩함이라는 방향을 분명히 잡고 거룩하다는 위치와 생활 가운데 들어가기를 하나님은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성화라고 할 때는 중생으로써 주신 것으로부터 끄집어내고 가지고 성화시킨다는 것만이 아니라 차라리 새로운 생명을 강화하고 더 풍성하게 하고 또 그것을 잘 간수해서 튼튼한 요새로 만들어 놓는다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그런고로 성화는 두 부분에서 성립하는데 첫째 부분은 사람의 성품(nature)에서 점진적으로 죄의 오염과 부패를 제거해 나가는 것이요, 둘째는 새로운 생명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서 하나님께 드린 생명을 자기가 점진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성화란 이처럼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되는 한 행위 또는 과정인데 그 성화의 상태와 자질로서 거룩하다는 것은 사람의 심정 가운데에 발생하는 일로서 동시에 이것이 자연히 전 생활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거룩함이란 신자의 심정에서 발생하는 동시에 그것이 자연히 전 생애에 영향을 준다고 했는데 우리의 속사람이 변화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외부의 생활에도 어떠한 변화를 수반하게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내부가 거룩할 것 같으면 외부에서도 거룩한 생활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성화라는 하나님의 성신의 역사는 기계적으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영혼의 기능의 반응이라는 것은 두 면에서 중요히 나타나는데 첫째는 악과 시험에 대해서 늘 대적한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고로 “너는 언제든지 계속적으로 악과 시험을 대적해야 한다”고 마음 가운데 경고가 와서 그 경고를 듣고 그대로 순응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룩하다는 사실이 우리에게서 발생하기 위해서 우리의 품성이 하나님께 대하여 의식적으로 작용하는 현상입니다. 둘째는 “거룩하게 살라” 하는 말씀의 권고를 따라서 우리의 영혼의 기능이 움직여 가지고 거룩하게 살려고 하는 것인데, 이것은 우리의 생활 가운데 하나님 앞에 적극적으로 드리고 봉사하는 생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화란 이 세상에서 불완전한 성격을 그냥 가지고 있으면서 주께서 오시사 완성하시는 날까지 끊임없이 발전해 나가는 것으로서 신자의 정신과 생활 행동 각 부분에 영향을 미칩니다. 신자의 신령적 발전이라는 것은 이생에 있는 동안에 무흠(無欠) 하게 되는 것은 아니고 늘 결핍이 따라다니기 마련이므로 신자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언제든지 죄와 더불어는 항쟁해야만 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신자의 생활은 우리 속에 있는 새사람과 옛사람의 끝없는 전쟁이며 특별히 훌륭한 신자의 생활에서는 그 전쟁이 강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가장 훌륭한 신자라도 항상 자기의 죄를 고백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 용서해 주시기를 빌게 되는 것이올시다. 그 다음에 다시 좀더 나은 완전의 경지를 향하여 끝없이 노력해 나가는 것이 신자의 생활입니다.

 

거룩하다. 신성화했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선한 생활이라는 것을 이끌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화의 열매인데, 선행(善行)이 완전한 행동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원칙에서 솟아 나온 행동으로서 하나님을 믿고 하는 행동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늘 믿고 의지하는 원칙 가운데에서, 그런 능력 가운데서 솟아 나오는 것이 선행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이신 뜻에 대한 의식적인 합치 혹은 순응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최후의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성신으로 중생한 자만이 이런 진정한 선행을 할 수 있습니다. 중생하지 아니한 자도 매우 훌륭한 일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기쁘게 흠향하시는 선행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도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덕택으로 교도(敎導)-가르쳐서 이끎. 되어서 외면적으로 순응하는 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칭찬할만한 일이요 칭찬받기 위한 목적에도 부합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선행의 열매는 근본적으로 결핍되어 있습니다. 중생하지 못한 자의 선행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뿌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헌신한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에 대하여 중심으로부터 나온 순종이 없다는 것을 표시합니다. 또 자신이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따라가야 한다고 주장하지를 않습니다. 로마 가톨릭에 반해서 우리가 견지해야 할 바는 신자의 선행은 결코 어떤 공로를 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행자들에게 은혜와 보상으로 갚으시기는 할지라도 그 선행이 자기의 공로라고 해석해서는 아니됩니다. 또 반법론자(antinomian)들의 주장에 반해서 선행의 필요는 항상 강조되어야 하고 굳게 주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도덕적 성격을 표시하는 선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우리는 지금 ‘교회가 거룩하다’는 말을 사용할 때 그것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확증할 수 있고 또 표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거룩하다고 할 때는 무엇보다도 교회가 성도의 한 가족과 같은 단체라 하는 외견적인 관점에서 볼 때 거룩한 것이고, 또 교회를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은 신령한 몸이다 할 때에 그리스도가 거룩하신 까닭에 그를 머리로 삼은 신령한 몸은 당연히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거룩하다 하는 말을 쓰는 것이지만 이 말이 실제로 어떻게 해야 바로 적용되고 바로 나타나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좀더 생각해야 할 중요한 과제입니다.

 

교회가 거룩한 것이라 할 때 그것은 도덕적인 성격을 가진 말이라고 그 동안 상고했는데, 도덕적 성격이란 차원에서 교회의 거룩함은 어떻게 설명되며 어떻게 나타나는 것인지를 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가 땅 위에서 구체적으로 형식을 취할 때에 그것이 인격의 형식을 취하지는 않습니다. 이 점은 우리가 특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그럴지라도 교회가 한 개의 인격적인 용어로 호칭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인격적인 용어라고 하면 사람에게 관계되는 말들을 쓴다는 것입니다. 머리가 있고 손이 있고 발이 있고 그리고 정신이 있고 마음이 있다는 식으로 한 개의 인격이 되기 위하여 가지는 요소들을 교회에다 붙여서 부릅니다. 우리는 교회를 일컬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은 지체라 하는 말을 잘 쓰지요. 이것이 성경의 용어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있는 하나의 인간상을 생각하고 하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어 있는 하나의 인간상이란 유기적인 관점에서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냥 비유로 쓴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 선언입니다. 교회는 하나의 몸과 같은 것이니라 하는 뜻의 ‘패러블’(parable: 우화)이 아니라 확실한 진리의 선포로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니라 그 말입니다. 그것은 신령하고 거룩한 한 인격을 확실히 표시하는 말이지 그것 아닌 다른 것을 비교하여 쓴 말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오장육부가 있듯이 자동차에는 내연 기관이 있어서 사람이 무엇을 먹으면 소화하여 그로써 기운을 내어서 걷는 것처럼 자동차도 휘발유를 먹으면 그것이 변형된 에너지 형태로 발휘되어 바퀴를 돌려 앞으로 가는 것이다. 하는 식 비교가 알레고리가 아니라 그 말입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명백한 진리의 선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을 우리가 잘 쓰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고 있는지에 대해서 잘 알고 써야 합니다. 교회를 인격에 적용하는 용어를 가지고 칭하게 될 때에는 교회 자체의 어떤 특별한 성격들을 표시하려고 그 말을 쓰는 것입니다. 인격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내용, 그 요소라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할 때 그것은 도덕적인 요소입니다. 아무리 정교한 로봇, 인조 인간을 만들어서 말을 하게 하고 미세한 동작으로 움직이게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도덕적인 자격과 책임을 가진다고는 아무도 생각을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 하고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라 한다면 그것은 거기에 도덕적인 성격을 붙이는 것입니다. 이 도덕적인 성격은 어디에서 났느냐? 교회의 속성을 이야기할 때 첫째는 그리스도와의 통일된 일체라는 단일성입니다. 이것은 도덕적인 성격의 표현은 아닙니다. 교회란 그리스도와 일체가 되어 있는 것이로구나 하는 존재의 속성을 생각하고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교회의 보편성이란 교회가 얼마만큼 뻗어 나가느냐 하는 존재의 외연을 생각하고 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의 일체성과 교회의 보편성만 가지고는 교회의 도덕적 성격을 분명히 못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거룩합니다. 할 때 거기에 가장 종합적이고 명백한 도덕적인 성격이 표시되는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의 큰 뜻이 그런 데 있습니다.

 

거룩한 생활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필요함

 

거룩함이 도덕적 성격을 표시한다고 할 때 그 표준은 항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안 됐다 할 때에는 안 된 것이고 되었다 할 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안 됐다, 됐다 하는 사실을 하나님이 일일이 자세히 다 지시하느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그 표준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지만 기억할 것은 말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늘 하나님 당신의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당신의 존재가 표준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속성에 비추어서 이것이 거기에 부응한다든지 아니라든지 할 때 그것을 거룩하다든지 거룩하지 않다든지 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그것이 하나님의 속성에 부응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이시는 것인데 계시로 보이시는 동시에 또한 기쁘게 받으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치심으로 보이십니다. 그것을 기쁘게 받으신다는 사실을 우리 마음 가운데 심어 주심으로 우리는 그것을 깨닫고 감사히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볼 때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 그 표준에 의해서 무엇이 거룩하다든지 않다든지를 우리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생명 되신 이는 계시되신 하나님,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나타났던 그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고 할 때는 거기에 수령(首領) 혹은 두령(頭領) 이라는 말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물론 첫째는 신체의 두부(頭部)를 의미하지만 그것은 또한 거대한 조직체의 두령을 의미합니다. 교회의 통치자는 예수 그리스도라 그 말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거룩한 속성이 교회가 거룩하다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거룩하니까 마땅히 그리스도의 몸은 거룩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는 거룩하여라. 왜냐하면 내가 거룩하니까 거룩하여라” 하셨습니다(레 11:45). 그런 거룩한 속성이라는 것은 어떻게 나타나느냐? 거룩한 속성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우리에게 계시됨으로 그 계시에 의해서 하나님은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싫어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데서부터 나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을 어떻게 알며 무엇을 거룩한 것이라고 해야 하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여러 말 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신학적으로 논증해서 아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보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더욱이 이런 무신론의 시대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이란 그전보다 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알게 함으로만 가능합니다. 신과 그리스도를 분리해서 생각하기 시작할 때에 잘못하면 초연신론이나 이신론(理神論) 에 빠져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분리해서 생각할 때에는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혹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된 바 하나님의 계시를 더 많이 앎으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지식이 좀더 풍부해지는 것입니다. 신께 대한 지식이 좀더 풍부해질 때 신의 속성이라는 것을 더 더듬어 알고 더 추리해서 알고 더 각성해서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데 따라서 그 방향을 향해서 봉헌하고 그런 성격을 내가 또한 가질 때 비로소 나도 거룩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성화라는 것은 발전적인 것이고 점진적인 것이지 한꺼번에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성화의 발전과 그 진행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나의 지식의 증가에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좀더 알 때 거룩하다는 속성을 알 수 있는 것이고 또한 좀더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면서 거룩한 것만을 특별히 알 재주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하다는 것은 하나님 당신이 존재하시는 그 내용의 성격을 표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속성이라는 것이오. 우리가 하나님을 달리는 모르는 것이고 그 속성을 통해 자꾸 아는 것입니다. 거기에 비추어서 거룩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도 자꾸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새사람 안에서의 성신님의 역사

 

도덕적인 순결이라는 말도 그렇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고 순결하다고 하느냐? 우유와 물을 놓고 물이 순수하냐 우유가 순수하냐 할 때 물이 순수하다고 해도 안 되고, 우유가 순수하다고 해도 말 안되는 것입니다. 둘 다 순수하다고 할 때 우리는 비로소 신선한 밀크요 신선한 물이라고 수긍하는 것입니다. 왜 수긍하느냐?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요. 둘 다 혼탁이 없고 부패가 없는 까닭에 순수하다고 수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무색 투명하게 보이지만 부패한 물을 떠다 놓았을 때 그것을 저기 어디서 길어 왔다 하면 아, 그건 불순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무색 투명하게 보이지만 부패한 물을 떠다 놓았을 때 그것을 저기 어디서 길어 왔다 하면 아, 그건 불순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기에 맑으니까 순수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성격을 순결히 보존하여 거기에 이질적인 것이 섞이지 아니했을 때에 순수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도덕적 순결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인데 그것 자체에 배반되는 성격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도덕적 순일성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도덕적 순결을 가졌다 할 때는 우리에게 주신 바 하나님의 거룩하신 품성이 다른 이질적 배반적인 성격으로 말미암아 이지러지거나 오염되어 있지 아니할 때 “아, 거룩하다”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도덕적인 순결성이라는 것은 거룩함의 도덕적인 가치를 표시하는 말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좇아 만드셨습니다. 당신의 형상이라고 할 때 우리는 항상 형태를 생각합니다. 형상, 이미지라는 히브리말은 ‘첼렘’(צלם) 인데 아마 사진이라는 말로 쓸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진(replica) 이라, 즉 하나님 비슷하게 만들었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볼 수 있느뇨? 신이시니 볼 수 없느니라.” 그런즉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태가 뭐냐 할 때 그것은 형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격으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이질적인 것을 내함(內含) 하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께 대해서 반대하는 성격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순종만 하고 나가더니 “아닙니다” 하고 하나님 말을 거역하고 딴 짓을 함으로써 그 행동이 죄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죄책을 짊어진 동시에 거역을 하는 성격이 그 속에서 발생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도덕적인 오염인 것입니다. 이런 죄악의 오염이라는 것이 사람 속에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불순한 것이 되었고 그것은 언제든지 거룩하지 못한 것이 된 것입니다. 아무리 거룩한 성품에 도달하려고 해도 이미 그 자체가 비틀어져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격을 어떻게 나타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안되는 까닭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그 새로운 생명이 나타나기에 적응한 거대한 변화를 그의 영혼의 기능에 일으키사 그로 하여금 새로운 인격을 형성해서 거룩한 성격을 나타내게 하신 것인데 이것이 하나님의 재창조입니다. 거룩하지 못한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구속하시사 죄책을 면제하시고 죄의 오염을 당신의 보혈로 씻으시는 거룩한 역사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재창조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것이 그대로 나타나면 순수하지만 재창조된 새사람이 우리의 본래 어지러지고 결핍이 있는 오염된 상태에 압도를 당해서 그것이 덮여 있을 때에는 불순한 것이요 거룩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성신님을 그 안에 보내 주셔서 그 성신님이 끝없이 작용하사 그 안에 있는 하나님께 대한 이질적인 성품을 항상 제어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성격이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결국 거룩하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옛사람이 새사람을 누르는 일이 없이 주신 바 영원한 생명이 자연스럽게 발전해 나갈 때 비로소 나타납니다. 그러지 못할 때는 거룩하지 못한 것입니다. 주일날 암만 밥을 굶으며 울고 기도만 하고 앉았더라도 속에 옛사람이 움직이고 있는 동안에는 아무런 거룩한 상태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주일만 거룩하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날을 거룩하게 보내야 합니다. 다만 우리에게 있는 시간을 하나님 앞에 드렸다 하는 일반적인 용어를 쓸 때에 즉 우리의 시간이 한껏 하나님의 거룩하신 그 속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구현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외증(外證) 하려 할 때에는 어떤 특별한 시간을 구별해야 할 테니까 할 수 없이 우리가 어떤 날 하나를 내놓는 것인데 그것을 주일로 삼은 것입니다. 문제는 주일뿐 아니라 모든 날에서 우리에게 있는 옛사람이 나를 지배해서 옛사람이 가지고 있는 미와 덕과 종교와 열정을 드러내면 그것들은 아무리 해도 거룩하지 못한 것입니다. 아무리 굉징히 열심을 내고 주께 부르짖으며 애쓸지라도 거룩한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불순을 내함하지 아니한 즉 순일성을 가진 예수 그리스도적인 생명에 의한 성품이 내 안에서 자유롭게 자연스럽게 발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 할지라도 그것이 충만한 상태는 아닙니다. 우리가 재창조조 말미암아 처음에 나왔을 때는 미미한 존재입니다. 미미하면 미미한 대로 좋다 그것입니다. 주일에는 밥도 안 먹고 차도 안 탄다는 것을 반드시 강조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 나름대로 새로운 생명이 들어가서 새로운 생명의 방향을 향해서 조금씩 아장아장 걸어가면 그것이 거룩한 생활입니다. 주일을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적용해서 이러이렇게 하지 않으면 거룩하지 않다고 한다면 율법주의나 기계주의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각 사람이 받은 은사와 각 사람이 장성한 분량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다만 어떤 방향을 취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서 장성해 나가는 방향, 새로운 생명의 발전의 그 방향을 바로 취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앞서는 사람도 있고 뒤서는 사람도 있지만 문제는 하나님을 향한 그 방향으로 가느냐, 상당히 앞선 사람이 갑자기 방향을 돌려 가지고 딴 데로 한눈 팔고 돌아다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방향에 따라서 거룩하지 않은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커뮤니어 쌍토룸’(communio santo­rum)의 특성과 개혁의 문제

 

다시 돌아와서 ‘교회가 거룩하다’ 하는 말에 대하여 생각하십시다. 제1세기부터 교회를 생각할 때 늘 ‘커뮤니오 쌍토룸’의 사상에서부터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교회의 큰 진리를 표시하는 중요한 용어가 오늘도 성도의 사회(coummunity of saints) 라는 말입니다. 성도의 켜뮤니티라는 거룩한 무리들이 혈연으로 한 가족을 이루어서 한 생명으로 연결될 때 가장 이상적인 형태가 되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이질적인 사람들이 모여서 이해 관계로 결속된 도시적인 경제 사회를 형성하고 삽니다. 우리가 보통 말할 때 커뮤니티라면 주위의 이웃 사람들끼리 같이 살면서 서로 통정도 하고 도아주고 사는 사회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커뮤니티라는 것은 요컨대 민속 문화 가운데서 잘 볼 수 있습니다. 산골에 초가집 다섯 채가 있으면 자기네끼리 서로 오붓하게 삽니다. 갑자기 불한당이 들이닥칠는지 밤중에 산에서 짐승들이 내려와 덮칠는지 알 수 없는 환경에서 유사시 소리를 지르면 서로 와 하고 나와서 같이 위험을 막아 주는 것이고, 좋을 일이 있으면 같이 가서 먹고 놀고 떠들며 살기 때문에 남의 집에 수저가 몇 벌 있는 것까지 다 알고 지낸다 말입니다. 그런 사회에 가장 근접한 예는 물론 가정입니다. 우리가 한 가정을 이루고 살 때에 비로소 우리의 소유가 공동의 소유가 되고 또 애정도 공동으로 나누고 사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것이 그렇게 같은 피로 연결되어서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이해휴척(利害休戚)을-이득과 해와 편안과 근심. 같이하는 결속된 사회라는 것입니다.

 

이런 공동의 사회가 한 개의 인격적인 성격을 붙인 거룩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으려면 그 안에 속한 가장 명료한 단위로서의 인격체가 거룩해야 합니다. 열 사람이 교회를 구성했다면 열 사람 하나하나가 명료한 단위의 인격체입니다. 그런고로 열 사람 하나하나가 거룩할 때 열 사람이 모여 있는 한 켜뮤니티가 거룩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인격적인 용어로 표시했습니다. 그런고로 이상을 어디에다 두었는고 하니 지체 하나하나가 거룩해 가지고 거룩한 분위기를 집약해서 일으키라는 것이 아니라 최후에 가서는 하나의 인격과 같이 거룩하게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표준입니다. 교회라는 것은 열 사람이 모였든지 백 사람이 모였든지 그것이 하나의 인격적인 움직임으로 드러나는 것이 이상(理想)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거룩하다는 교회의 속성은 가장 충만히 나타날 수 있습니다.

 

거듭 하는 말이지만 교회가 거룩하기 위해서는 그 속에 있는 개개의 인격체가 거룩하다는 속성을 구현해야 하는 것이고, 그런고로 교회의 성격을 구성하는 것은 예배당에 모였을 때만이 아니라 개인개인이 사생활을 할 때라고 강조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시간의 대부분을 사생활로 보내기 때문입니다. 소수의 교직자 이외에는 대개 자기의 사업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 때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활 태도, 마음의 상태, 그리고 그들이 앉아 있는 위치라는 것이 항상 거룩하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것입니다. 장사를 하여 같은 이문을 남기더라도 거룩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거룩하려니까 이문을 남겨서는 안 된다는 그런 기계적인 생각은 부당합니다. 그러나 거룩하려면 분명히 무엇이 거룩한 것이며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이며, 또 특별히 지금 하고 있는 이 장사가 어떤 위험이 있을 것이며 그에 따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이다 하는 것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모르고 앉아서 저절로 거룩해지지는 않습니다. 장사하는 사람이 장사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어떻게 나타내는가를 교회가 가르쳐 주어야 아는 것입니다. 스스로 성경 공부해 가지고 혼자서 알아라 하면 그것은 무책임한 이야기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했으면 장사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그 말입니다. 내가 이 장사를 하는 것은 먹고 살려고 하는 것인데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합니까, 한다면 그 생각부터 고쳐야 합니다. 먹고 살려고 한다 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것은 그것대로 다른 문제입니다.

 

아무튼 교회의 거룩함이라는 문제를 생각할 때 개별적으로 행동하더라도 행동의 다양성 때문에 거룩한 것이 파괴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더 나아지거나 하지 않는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생활이 나중에 한 집단적인 행동으로 나타날 때는 무엇으로 나타나는 것이지만 “모아서 행동하니까 더 거룩합니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개인적으로 행동한다고 할지라도 최후에 가서는 결국 하나의 인격체가 활동하여 그 속성을 드러내는 것과 같은 위치에 도달하는 것이 이상입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의 인격체에 적용하는 말을 쓴 것입니다. 교회는 여러 개의 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은 한 몸이라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교회에 충만하게 적용을 할 것이겠지만 보이는 교회라 할 때에는 즉 교회의 보이는 면에서는 결국 불가견적인 교회를 표시하기 위해서 가견적인 교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는 교회는 그렇게 할 수 없으니까 안 해도 좋다 한다면 그것은 역리(逆理)-이치(理致)에 맞지 아니함. 가 되는 것입니다.

 

요컨대 보이지 않는 교회가 가지고 있는 충만한 속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보이는 교회의 형태를 취한 것인 까닭에, 그 취한 형태가 보이지 않는 교회의 동일한 한 인격체의 도덕적 성격을 나타내기에 부적당 할때는 개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든지 개조해야만 합니다. 그것을 개조를 하는 데 게으리지 않겠다고 서약을 하고 나선 것이 개혁자들의 정신입니다. 개혁은 16세기에만 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필요를 따라서 개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개혁의 필요를 느끼면서도 개혁을 않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약점을 바로 규명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개혁의 필요를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완전히 부패하지는 않았으니까 나는 아직 이 자리에서 해 보겠다 할 때라도 해 보겠다는 그 말은 곧 개혁해 보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철저히 부패하지는 않았으니까 아직 여유 있는 동안 그 자리에 있겠다는 말입니다. 개혁을 않겠다는 거절은 아닐 것입니다. 만일 거절한다면 큰일 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개혁해 보려고 해도 현재의 부패를 방지할 길이 없으니 차라리 나오겠다 하는 것은 단지 하나의 방법입니다. 그것은 방법론이지 개혁을 부인하는 사실은 아닙니다.

 

교회가 하나의 인격체에서 나오는 거룩한 속성을 드러내듯이 거룩함을 나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요컨대 순일성이라는 것은 결국 다양한 근원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표시합니다. 여러 근원에서 나와서 이것도 좀 섞이고 저것도 좀 섞인 것이 아니라 하나에게서 흘러내려왔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참으로 거룩한 생활이 있다면 그 근원은 하나입니다. 다른 교우들 하나하나가 거룩한 생활을 한다면 그 근원도 하나입니다. 동등이 아니라 동일한 근원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다 같이 공동으로 생명을 나누어 받고 그 동질의 생명을 가지고 우리는 다양한 은사에 의해서 인격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성된 인격은 항상 상화 보완적인 것이지 반복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묘하신 방식으로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에 참예할 때 하는 중요한 고백과 서약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돌아가심과 그 흘리신 피라는 것이 나의 죄책으로 인한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주시는 것은 “내가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것이라” 하신 바로 그 생명입니다. 그러한 동일한 생명을 우리는 다 같이 마신다. 다 같이 가졌다 하는 것을 때때로 다시 기념하는 것입니다. 동일한 생명에서 흐르는 바 동질적인 기질이라는 것을 우리는 다 같이 승인하고 취하는 것입니다. 내가 과거에는 인간으로서 내 자신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을 옛사람과 함께 묻고 예수 그리스도적인 새로운 기질 즉 그 피로 말미암은 기질이 내게 나타나서 그것이 주신 바 은사와 합해서 새로운 한 성격을 구성하게 되었고 그리고 그 성격은 가치로 볼 때 그리스도적인 성격이고 그 기능의 발휘라는 것은 다양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면면을 각각 다른 사람과 보충해 가면서 드러내는 것이다 하는 것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으면서 우리는 성찬도 행하는 것입니다. 세례와 성찬을 성례(聖禮) 라고 할 때 그 자체에 구별되게 드린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지만, 또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속성을 가장 잘 구현하는 데 관계되어 있는 예식인 까닭에 또 한 성례가 되는 것입니다. 예식 자체도 하나님 앞에 구별된 거룩한 식이지만 또한 교회의 거룩함이란 사실과 관계된 예식이기도 합니다.

 

동일한 목표를 향한 행진

 

교회의 거룩함을 생각할 때 비록 거기서 탈락하는 사람이 있고 이질적인 가라지가 있을지라도 가급적 모든 교우들이 동일한 생명의 근원에서 받은 예수 그리스도적 생명을 나타내되 은사의 다양성에 따라 서로 부조(扶助) 하고 조화해서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그것이 표시되어야 합니다. 개인 생활이나 교회적으로 집회를 했을 때나 그것은 필연적으로 한 몸에서 거룩한 속성이 드러나듯이 한 개의 인격체의 거룩한 순수성, 도덕적 순결성이 표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몸에서 거룩한 속성이 드러날 때에 그 몸은 거룩하다 하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교회라는 몸에서 거룩한 속성이 드러난즉 교회는 거룩한 것이니란 하는 말도 나오는 것입니다. 다소 이야기가 까다롭게 돌았으나 결국 최후에 가서는 그렇게 거룩한 속성이 나와야 하는 것이지, 그저 선언으로서 ‘교회는 거룩한 것입니다’ 한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거룩하다고 할 때에는 교회의 구성 요소인 인격적인 개체 혹은 분자가 먼저 거룩하다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개체가 거룩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필연적으로 교회적인 거룩한 성격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표현의 다양성은 있을지라도 동일한 근원에서 발현된 동질의 거룩한 속성들이 새로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서 하나의 인격인 도덕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교회가 어떻게 거룩함을 나타내느냐? 먼저는 교회의 교인 하나하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대한 각성이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그것없이 거룩해지는 재주가 없습니다.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누어 받은 것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자기는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유출돼서 항상 연결되어 있는 전체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전체의 부분으로서 예수의 생명이 내게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나 자신의 그리스도의 생명의 완전히 현현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암만 충만해 보려 하고 또 충만히 나타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큰 생명과 큰 인격의 부분적인 것만 나타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전지와 전능과는 거리가 먼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충만하지도 않은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전체적으로 총화를 드러내는 그런 생명체가 아니라 말입니다. 그것이 나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다른 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분적인 것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형제들에게는 다른 것들이 있어서 그것들이 연합해 가지고 거룩하다는 것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총체적인 생명을 하나 구성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전체의 부분으로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타낼지라도 옛사람이 아닌 새사람으로서 그것을 드러내야 합니다. 나의 언행심사에서 항상 새사람이 충만히 나와야 하겠다는 데다 주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나뿐 아니라 다른 형제와 더불어 공동의 생명을 현현해야 할 의무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이라는 연대의식을 늘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 전체가 하나의 인격적인 속성을 드러내는 것인데 그 인격적인 속성은 어떤 점에서 명료해지느냐 하면 동일한 목적을 향한 행진을 할 때 분명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저 존재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목표를 향해 행진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자영영(孜孜營營)-쉬지 아니하고 부지런히 일함. 하면서 각각 자기의 생활을 하지만 이 목표를 향한 행진이라는 것은 우리 전체 생의 한 큰 목표가 되는 까닭에 잠시도 잊어버리지 말고 그리고 방향을 취하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큰 목적을 구현하기 위해서 세우신 큰 은혜의 기관은 참된 의미의 신성한 교회입니다. 교회 이외의 다른 더 귀한 은혜의 기관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상 교회라는 말은 아주 숭엄하고도 가장 은혜로운 말입니다. 다른 것으로 대치하지 못하는 것이고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말로라도 교회란 그렇게 신성하고 높은 것인데 교회를 비하해서 다른 것으로 대치하려는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이 현대주의자 가운데 많은데 절대로 부당한 태도입니다. 교회의 원상(原狀) 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교회를 떠나서는 참된 구원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를 떠나서는 그 사람의 생명이라는 것이 발휘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말을 원래 그렇게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생명이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그 전체를 가리켜서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별다른 데에서 자꾸 보고 이야기할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해야 하는 교회

 

교회가 이 사회에서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려면 무엇보다도 그 전체의 사상이 도덕적으로 순일(純一)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간절히 사랑한다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순결이요 순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하는 까닭에 자기를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하겠다 하는 마음의 준비와 태도가 있는 것인데 그것이 교회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야말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드러내시고 전파하시려는 거룩한 기관인 까닭에 그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데 있어서 명백하고 우수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암담한 현실에서 선지자로서 큰 목소리를 늘 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는 첫째의 중요한 점입니다.

 

개혁교회에서 말하는 바 교회의 징표, 교회가 교회 아닌 다른 단체와 무엇으로 구별할 수 있겠느냐 할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을 가르치고 전한다는 사실입니다. 성례전의 집행과 신실한 권징 이행을 더해서 세 가지를 우리가 들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을 바로 전하고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바로 전하고 가르치지 못하는 교회는 그 나머지 무슨 사업을 하든지 교회로서의 징표는 미약한 것입니다. 사실상 말씀 하나만 가지고 전체를 주장하는 신학자들도 많습니다. 성례를 집행하는 것과 권징을 신실히 행한다는 것이 말씀 안에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례라는 것은 보이는 형식으로 말씀을 또한 전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징계란 불순이 침입하려고 할 때 말씀이 막는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은 희미한 데를 밝게 하며 말씀이 바로 전달될 때에는 권징해 주는 것입니다. 이래서 권징이라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결국 전부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말씀을 떠나서는 다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독특한 종교적 예식이라는 것은 기독교만의 특권이 아닙니다. 다른 종교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과 관계되어서 기독교의 성례는 비로소 성립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떠나서 그것으로만 독립해서 성립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구별되게 쓰신다면 그 교회는 분명히 그 시대의 인류 역사 위에 하나님 나라를 증시하기 위하여 거룩한 말을 선포하고 가르칠 것입니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목소리로서 그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있는 사람들에게 여기에 살 길이 있다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불의하고 악한 세대 위에 서서 하나님의 징벌과 심판을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크신 경륜을 알리는 것입니다. 오염된 철학과 그릇된 사상의 혼돈 가운데에서는 이것이 빛이다 하고 나타내고 교정(敎正) 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게 온전케 함이니라”(딤후 3:16-17). 교훈, 가르침이 있어야 하고 잘못되었을 때에는 항상 바르게 비판하고 책망하여 시정하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또 적극적으로 의(義) 로 훈련하여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여러 가지에 다 유익한 것인데 결국 그 목적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온전하게 되어 가는 데 있습니다. 즉 이상하거나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릇된 사상과 시대 사조, 그릇된 역사적인 성격 가운데에서 사람들이 방황하며 그런 데 물들어 가지고 흔들거리며 돌아다닐 때 그 근본부터 따져서 차곡차곡 하나님의 말씀 위에서 비판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과거와 현재를 자세히 관찰하고 하나님의 계시의 터 위에서 “네가 앞으로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선지자의 일입니다. 교회는 다른 무엇보다도 선지자의 일에 대해서 충실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예를 하나 든 것으로서 그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교회는 인류의 존재를 위한 복의 기관인 까닭에 만일 참 교회가 땅 위에 없으면 오늘이라도 이 세상은 다 필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싹 쓸어버리실 것입니다. 거룩한 교회 때문에 하나님이 이 땅을 아끼시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복을 받을 기회가 남아 있는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복을 전달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류의 진통과 세기의 거대한 고민을 교회는 민감하게 느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제사장의 직분입니다. 제사장은 자기의 고통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교회는 전 세계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땅 위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대표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수요(需要)를 알고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간곡한 호소를 교회가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복을 자기가 직접 받아서 내릴 수 있는 복의 기관으로서 중요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들어서 구별되게 쓰셨다는 것을 증시하려면 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성한 의미부터 차례차례 드러내기 시작해야 합니다. 교회가 큰 예배당 짓고서 그것으로 무엇을 증거한다고 생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원래 예배당을 교회라고 생각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주후 2세기경에 비로소 예배당을 고려하기 시작했지 그 이전까지의 역사에는 원래 예배당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믿는 사람 가운데 부유한 신자가 넓은 방을 제공하면 거기서 모인 것입니다. 우리는 가장 전형적인 교회라고 하면 초대 교회를 생각합니다. 예배당을 하나도 짓지 못하고 갖지도 아니했던 사도 시대의 교회를 전형적인 교회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요새는 교회 자체가 착실하게 교회적 속성으로 자라나는 데다가 주력하기보다는 있을 집 걱정부터 해서 집에다가 주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짓지 말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빚을 내가면서 집을 짖고 다닌다든지 예산도 없이 “이것은 믿음으로 합시다” 하는 식을 문제 삼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르치면 나중에는 믿음과 아무 계책이 없는 무모(無謀) 의 짓인 만용을 혼동해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실 때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 족할는지 먼저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전쟁을 하러 갈 때 먼저 앉아서 1만으로 저 2만을 대적할 수 있을가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고 딱딱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일 전쟁의 준비가 없으면 미리 가서 화친을 청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않고 탑을 쌓다가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들의 비웃음을 받고 말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눅 14:28-32). 전쟁을 하는 왕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려고 하는 자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가르치셨습니다. “나는 만 명으로 이만 명을 대적하련다. 이 소수가 다수의 세계를 향해서 도전하며 싸움을 하고 나아간다. 나를 따라오려면 어떻게 해야 할 줄 아느냐? 아무 예산 없이 덮어놓고 예, 따라갑니다 하고 함부로 나서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교회가 거룩하다는 속성이 어떻게 구현되느냐 하는 것을 우리의 목회 생활에서 적용하려면 신자의 생활 면면을 면밀하게 검토해 가면서 자꾸 원칙을 적용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청년들은 오늘날 시대 사조와 철학적인 고민 가운데 고통하고 혹은 회의(懷疑) 합니다. 목사가 말하는 소리를 반절만 듣고 나머지 반절은 “그것 뭐 시대에 뒤떨어진 얘기이고 내 문제의 핵심에는 전혀 닿지도 않고 해결을 못 준다”고 회의하고 돌아다니는 것이 이 세대의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그렇다고 목사가 모든 철학을 통투(通透)히-사리를 꿰뚫어 환히 앎. 다 알아 가지고 해결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실존주의 철학을 가지고 고민하면 실존주의를 가지고 이야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철학으로 고민하는 고민에 대해서, 그 고민을 어떻게 하면 풀 수 있는지에 대해서 대답은 해줄 줄 알아야 합니다. 철학을 얘기 안 할지라도 그것으로 말미암아 받은 상처는 싸맬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총을 맞았든지 활을 맞았든지 칼을 맞아 가지고 상처를 받았으면, 내가 총 쓰는 법 활 쏘는 법 칼 쓰는 법을 묘하게 다 알아서 요렇게 하면 상처가 낫는다고 설명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 상처가 낫는지 어떻게 그 상처를 싸맬는지는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혼의 의사 노릇을 할 수 있다는 목사들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런 데 대한 아무 대책이 없으면 그 때는 종교 직업자가 되겠다는 것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영혼의 상처를 싸매려면 치료하시는 그분을 그에게 충분히 소개해서 분명한 관계를 맺게 해 주는 은혜의 방법을 알고, 명확하게 그에게 적용해야 합니다. 그런다고 모두가 다 그것을 잘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는 것은 그 사람의 문제이지만 이쪽에서는 적어도 나는 유감이 없이 말을 전했다고 할 정도는 되어야 한다 말입니다. 그런 예를 우리가 생각하자면 참 많을 것이올시다. 이것은 우리 한국의 교회뿐 아니라 일본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난번에 동경에 가서 청년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런 고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문제는 목사가 학문을 많이 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의사답게 하나님께로부터 그런 은사를 받아서 바로 쓸 줄 아느냐 하는 것입니다. 학문만을 외치는 상태에 떨어지면 신학이 철학의 한 부분이 되기가 쉬운 것입니다.

 

기도

 

거룩하신 아버지, 오늘도 저희에게 같이 모일 수 있게 기회를 주셔서 주님의 나라에 대해서 또 교회의 거룩하다는 속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았사옵니다. 저희들이 교회가 거룩하다는 말을 너무나 단순하게 생각하고 개괄적으로 병탄(倂呑)-아울러 삼킨다는 뜻으로, 남의 재물ㆍ영토ㆍ주권 등을 강제로 한데 아울러서 제 것으로 삼음. 해 버리는 흠이 많이 있사온데, 거룩함의 의미를 분명히 바로 알게 하시고 그로 인하여 교회의 참된 속성이 구체적으로 현현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허소 잘 깨닫고 사회적으로 나타내게 하옵소서. 주님, 저희에게 은혜를 주셔서 주의 말씀의 깊이 가운데 더욱 들어가게 하시고, 주님의 은혜가 저희들 속에 더욱 있어서 그 거룩한 뜻을 성신님으로 깨달아 알게 하시며 그것을 교우들에게 전달할 때 성신께서 충만히 역사하시고 함께하시사 실효 있게 하시옵소서. 주님 저희들을 각각 붙드시고 저희 연약한 것을 주께서 담당하사 저희 마음 가운데 아버님 나라의 깊이에 더욱 접촉할 수 있는 간절한 심정과 사모하는 마음을 허락하여 주시고, 저희들을 쓰셔서 주께서 하시는 일이 항상 열매 있기를 원하옵나이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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