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재호 목사 Pro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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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봄학기 특강(개혁주의 교회론)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신실하게 받드는 교회(4)

- 성령 하나님의 충만하신 지배를 받는 대표적인 방법 -

말씀:갈라디아서 5:16-26

 

우리는 지난 시간에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분별하는 일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오늘은 네 번째 마지막으로 성령 하나님의 충만하신 지배를 받는 대표적인 방법에 대해서 공부하고자 합니다.

 

성령 충만을 위한 자세 : 자기를 철저하게 주께 드림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실하게 받드는 교회 네 번째 강의로 이제 성령 하나님의 충만하신 지배를 받는 대표적인 방법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지려면 먼저 이것은 구원을 받은 우리의 삶 속에서 당연히 이루어지도록 보장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요한복음 14:16절에 보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고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하시리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에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전제 하에서 바울은 에베소서 5:18절에서 말하기를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능력 있게 전개하려면 마땅히 ‘성령 하나님의 충만한 지배’를 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성령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바 그분의 거룩하신 목적과 섭리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그분의 힘을 늘 의지하여 살아감으로써 우리의 인격과 삶이 보다 더 하나님의 백성다운 신령한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가게 됩니다.

 

이제 이런 원리를 생각하는 가운데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그러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것을 통하여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지금 갈라디아서 5:16절에서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했고, 갈라디아서 5:25절에서는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들은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서 행하라’는 말인 것입니다. 여기서 ‘행한다’라는 말은 어떤 인격적인 존재가 다른 인격적인 존재에게 부여한 어떤 능력이 있는데, 여기에다가 자기 자신을 일치시키고 유지시켜 나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힘을 베푸시고 필요한 경우 소원을 베푸시는데 바로 여기에 우리 자신을 일치시켜 나가야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거듭 확인하자면 성령 하나님의 의사와 능력이 나의 생활의 원리가 되어야 하고, 나의 생활은 그것과 일치되어야 한다는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이러한 이론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인가? 간절히 부르짖고 기도하면 되는가? 그래서 그렇게 해주신 것으로 믿으면 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와 인도와 관련한 성경 말씀들을 보면 분명하게 드러나는 한 가지 사상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 자신을 성령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드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서 12:1절에 보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영적 예배’라는 말의 의미는 ‘합당한 예배’로 정의 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 구약 시대의 이상을 신약 시대의 이상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 시대의 이상은 신약 시대에 보다 완성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산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이 말의 강조점은 ‘자기를 부인한다’는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 그대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가 드릴 산 제사 입니까? 삶 자체, 곧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자신의 삶 자체를 드리는 태도가 없이는 신약적 예배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신약 시대의 예배는 영적 예배이고, 곧 삶 전체를 하나님께 헌신하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성도의 영적 생활에 있어서 ‘자기 자신을 드리는 것’의 의미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드리는 것’에 대해서 정신을 집중해야 합니다. 성경은 ‘드리는 것’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집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6:13절에서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냐 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품과 삶을 하나님의 나라를 장성케 하는 거룩한 도구로 쓰시고, 그래서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시고,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의 거룩한 내용들을 구현해 내신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고린도후서 8:5절에 보면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마게도니아 교회의 성도들은 먼저 자기 자신을 주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바울 일행을 위하여 풍성한 연보를 제공하였습니다. 이는 올바른 연보의 자세와 정신이 무엇인가를 보게 하고, 반면 자신을 주께 드리는 삶이 곧 연보로 발전한다는 것을 보게 합니다. 우리가 성령 하나님의 신실하게 받드는 교회라는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이 부분 곧 연보의 자세와 정신에 대한 논의는 다음으로 미루겠습니다. 다만 우리가 여기서 정리해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 곧 영적 예배나 연보 생활 등의 명제들은 성령의 소욕을 좇는 데서 오는 결과요, 동시에 성령의 소욕을 좇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자기 자신을 드린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좀더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과연 ‘자기 자신을 드린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먼저 부정적으로 표현해 보자면 갑자기 직장을 그만두고 신학교에 간다거나, 일정 기간 작심을 하고 금식 기도에 들어간다거나, 재산을 털듯이 하여 복음 사역에 기부하고 하는 등의 어떤 획기적인 행동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여 일순간적인 헌신이나 획기적인 결단에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드린다’는 것은 성도가 지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자기의 가치를 정당하게 파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성도가 일상적으로 품게 되는 마음의 태도와 그리고 일평생 견지해 나아가는 인생의 행진 자세와 관계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성도가 자기 인생의 진정한 가치와 행복이란 것이 성령 하나님께서 이루어 내시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한 영역을 접할 수 있을 때에만 찾을 수 있다고 하는 인식을 그 바탕에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드린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자기를 드리는 일은 성도가 자신의 인생의 목표와 방향을 하나님 나라의 내용에 걸맞게끔 맞추어 나가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부정적으로 설명하자면 이것은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주장해 나가는 태도를 버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세상으로부터 얻어지는 일체의 인본주의적인 철학이나 사상들에 눈 돌리지 아니하고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에서만 인생의 방향을 찾으려고 하고 그것의 내용을 만들어 가려고 하는 태도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드리는 자’에게서 보여지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드린다’는 말은 ‘옆에 놓았다’는 뜻으로 곧 ‘저 사람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자신을 옆에 놓는다’는 의미입니다. 성도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드려진 그 사람을 쓰시게 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쓰시는 이 일은 성령의 소욕으로서 그를 강하게 사로잡으시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새 생명의 삶이란 것은 이렇게 자신을 성령 하나님께 철저하게 내어드리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소극적으로는 항상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요, 적극적으로는 철저하게 자기를 삼위일체 하나님께 의탁하는 이것이 지속적으로 자기 안에서 역동하게 될 때에 비로소 신령한 삶이란 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가치와 행복을 추구하려고 하는 옛 사람의 성향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것을 예의 주시하는 가운데 일편단심의 심정으로 신령한 삶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까닭에 행복이란 것을 물리적이며 경제적인 측면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동기와 목표로서 인생을 경영하는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일을 행해 나갈 때에도 자기의 학력, 능력, 재력, 의지, 기질, 재주, 기술, 경험, 인맥 등을 자연스럽게 의지하게 됩니다. 이런 동기로 출발하고 또한 이런 것을 의지하여 일을 추진해 나가다가 어떤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그때서야 부랴부랴 나서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도 하고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새삼스럽게 각오를 새로이 하고 나아가 자기를 헌신하겠다고 하는 서원까지 드리게 됩니다. 심하면 파격적인 행동까지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 속에서는 ‘자기를 드린다’고 하는 사실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자기를 드린다’고 하는 이 사실은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항상 포함하는 것입니다. 과거서부터 이미 자기를 드려나온 사람인 까닭에 지금 현재에도 그렇게 자기를 드릴 수 있는 것이고 또 나아가 미래에도 역시 그렇게 실제로 자기를 드릴 수 있게 됩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자기를 드리려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항상 성령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통상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 은혜의 수단이라고 하는데, 이는 성령 하나님께서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신다고 하는 원리를 염두에 두고 그렇게 말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성령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은혜의 수단이라고도 말해지게 됩니다. 이런 까닭에 말씀 충만과 성령 충만의 동일성이 성립됩니다(참조. 엡 5:18 골 3:16). 만일 성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게 되면 그만큼 성령 하나님의 역사는 기대할 수 없게 됩니다. 여기서 말씀이란 성경을 가리키고, 여기에는 정통적으로 해석된 것이라면 해석된 말씀까지도 포함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고 이해하며, 거기에 전심으로 순종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께 자기를 잘 드리는 다른 방식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 이번 특강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충만하신 역사와 인도를 늘 받아 나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께 자기 자신의 삶 전체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한 시대의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성령 충만한 사람으로 살아가겠다’고 하는 사람은 그러한 소원을 가진 것으로만 그치지 말고 실제로 ‘자기를 드리는 삶’의 훈련을 강도 높게 전개시켜 나가야 합니다. 로마서 6:13절을 보면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우리가 말아야 할 것은 죄에게 드리는 일이요, 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일입니다.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의의 병기로 드리는 것이어야만 행여라도 죄에게 드리는 악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께 자신을 적극적으로 드리는 일이 전개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이름을 걸고 행해지는 모든 당위성 있는 행위들은 항상 이런 자세에서 나와야 하고, 또 이것은 평소부터 진행해 나오던 삶의 연결선상에서 자연스럽게 나와야 합니다. 자연스러움이라고 하는 이것은 평소에 그가 자신을 신령한 자로 존재시켜 나왔다고 하는 사실과 연결되어지는 까닭에 사실상 큰 능력인 것입니다. 성도는 무엇을 하든지 다 성령 하나님을 힘입어 해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의 소욕을 따르는 데에는 큰 일 작은 일이 따로 구별되어지지 않습니다. 큰 일인 경우에는 성령 하나님을 특별하게 의지하지만, 작은 일인 경우에는 이런 심정을 가짐이 없이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해치우는 태도는 옳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는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든지, 할 수 없는 일이든지의 여부를 떠나서 항상 성령 하나님의 소욕을 좇아 행해나가는 습관을 형성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노라면 우리 안에는 새 사람다운 성품이 자리잡히게 되고, 또한 실제로 우리의 삶은 신령한 나라의 백성다운 성격과 방향을 뚜렷하게 갖추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넉넉하게 자라가게 됩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갑자기 성령 하나님의 화자(話者)가 되셔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사실을 상기하면서 본 강론을 마칩니다. 요한계시록 2:7절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참조. 계 2:11, 17, 29; 3:6, 1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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