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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락전 선택설/타락후 선택설 논쟁'과 칼빈의 예정론 ◇

 

[ 한국복음주의신학회 조직신학 분과 논문 발표 2002. 9. 7 ]

이승구 박사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일반적으로 죤 칼빈(John Calvin)하면 예정론을 떠올리는 것이 신학계는 물론 비신학계에서의 상례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신학계에서는 물론, 신학계에서도 칼빈의 예정론에 대한 무수한 오해가 난무하고 있다.

 

이런 오해들 중에는 예정론이 칼빈 신학의 출발점인가, 아니면 그의 신학의 논리적 결과의 하나인가에 대한 그의 신학 전체에 대한 해석의 문제와 관련된 것도 있고, 이중 예정을 말하는 성경을 따르려는 칼빈의 심정에 대한 심리적 오해도 있으며, 칼빈이 제시하는 예정론의 정확한 성격에 대한 오해들도 있다.

 

이 마지막에 진술한 문제와 연관되는 것으로 칼빈의 예정론을 시대적으로 후에 나타나고 있는 예정론에 대한 중요한 논쟁인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의 논쟁 가운데 놓고 보았을 때 나타나는 오해가 있다.

 

이 글에서 나는 마지막에 언급한 문제, 즉 칼빈의 예정론을 타락 전 선택설과 타락 후 선택설의 맥락 가운데서 논의해 보려고 한다. 물론 오늘날 칼빈 연구가들의 동향 가운데서는 이런 논의 자체를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치부하고서 제쳐놓으려는 요구가 매우 강하다. 그러나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이 문제와 관련하여 칼빈의 예정론에 대한 여러 가지 오해가 있으므로,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어 칼빈의 입장을 명확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이러므로 이 글은 이 특정한 논쟁과 관련하여 칼빈 자신의 견해를 명료화하는 시도로 구성된 것이다.

 

1. 선행 연구 조사

 

지금까지 이 문제와 관련해서 칼빈의 입장을 제시한 견해들도 매우 다양하다. 첫째는 칼빈을 후대 논쟁에서 나타난 타락 전 선택설에 가까운 주장을 하는 이로 보는 견해가 있다. 둘째는 칼빈을 타락 후 선택설의 주장자로 보는 견해이다. 셋째는 칼빈의 진술에는 타락 전 선택설과 타락 후 선택설을 각각 지지할 수 있는 증거가 있으나 칼빈은 그 어떤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고 해석하거나, 칼빈의 입장이 그 어느 한 견해에 좀 더 가깝게 비춰질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견해이다. 마지막으로는 칼빈의 견해를 실제 역사 안에서의 타락 후의 선택으로 이해하는 입장도 있다. 칼빈의 예정론 해석에 있어서 이처럼 다양한 해석이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이 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하도록 하는 계기가 아닐 수 없다.

 

먼저 칼빈을 타락 전 선택설의 주장자로 보는 대표적인 학자로는 칼빈의 신앙론을 정리하는 박사 학위 논문을 썼던 빅토 쉐퍼드(Victor A. Shepherd)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의 논문의 한 부분에서 "하나님의 선택의 작정은 창조 작정보다도 앞선다" 고 주장한다. 칼빈의 신지식론을 정리한 다우이(Dowey)도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칼빈의 견해는 타락 전 선택설적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입장에서 칼빈을 해석하는 다른 이로 우리는 죠오지 파버(George Faber)를 들 수 있다. 이와는 정반대로 칼빈을 타락 후 선택설의 주장자로 보는 이들 중에는 전형적인 칼빈주의자들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 월필드(B. B. Warfield)가 칼빈을 그렇게 해석한다. 월필드 외에 죤 스탠포드 윅스(John Standford Weeks)도 칼빈과 요나단 에드워즈의 선택론을 비교하는 논문에서 칼빈을 타락 후 선택설을 주장하는 이로 해석한다. 이 외에도 독일의 알렉산더 쉬바이쳐, 뮬러, 막스 샤이베, 그리고 화란의 안드리이스 폴만 등이 칼빈을 타락 후 선택론자로 본다. 그런가 하면 칼빈에게는 타락 전 선택설의 요소와 타락 후 선택설의 요소가 모두 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

 

그런데 이런 입장을 지닌 학자들의 견해는 또 세 가지로 나뉜다고 할 수 있다. 칼빈의 신학 안에 있는 이 두 요소의 존재를 인정한 후에

 

(1) 칼빈은 두 입장 모두를 지지한다고 해석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2) 칼빈의 모호성과 비일관성에도 불구하고 칼빈을 후대의 논쟁의 상황 가운데 세운다면 칼빈은 타락전 선택설을 취했으리라고 보는 이들과

(3) 두 요소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설득력으로 보면 칼빈에게는 타락 후 선택설에 대한 옹호가 좀 더 있다고 보는 해석이 있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상당히 조심성 있고, 주어진 자료에 대해서 공정한 태도를 유지하려는 입장을 나타내 보이는 것 같아도, 사실상 칼빈 자신을 칼빈 자신의 의도에 반하여 "비일관성"을 지닌 사상가로 왜곡되게 해석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학자들 가운데는 아예 칼빈이 실제 역사 가운데서의 타락 사건이 있은 후에 하나님의 선택이 있다고 생각했다고 해석하는 이도 있다. 이런 입장을 주장하는 가장 대표적인 이는 시카고 대학교 신학부의 브라이언 게리쉬(B. A. Gerrish)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세상과 사람들을 창조하셨다. 그 후에 이브와 아담이 불순종으로 타락하자, 하나님께서는 일정한 백성을 선택하심으로 인간 역사에 개입하셨다."

 

이상의 네 가지 해석 가운데서 가장 설득력 없는 것은 역시 맨 마지막에 언급된 견해이다. 우리가 후에 구체적으로 살펴 볼 바와 같이, 그는 전혀 칼빈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칼빈에게 돌리면서 칼빈을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당히 조심스러운 학자인 게리쉬가 어떻게 이런 주장을 하는지 좀 의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논문에서 나는 칼빈의 예정론 진술에 나타난 증거들을 제시하면서 두 번째 견해, 즉 칼빈을 타락 후 선택설과 관련해서 해석하는 견해가 선택에 관한 칼빈의 입장과 관련하여 왜 가장 설득력 있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2.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칼빈의 진술들에 대한 정리

 

{기독교 강요}와 피기우스에 대한 반론인 {하나님의 예정에 대하여}, 그리고 칼빈의 다양한 여러 성경 주석들에 산재하여 나타나고 있는 (우리의 주제와 관련된) 선택 문제에 대한 칼빈의 견해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칼빈에 의하면, 선택의 주체는 삼위일체 하나님(the Triune God)이시다. 칼빈은 성자께서도 성부와 함께 선택의 주체되심을 강조한다. 따라서 칼빈에 의하면, 구원은 전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이다. 선택론은, 칼빈이 {기독교 강요}의 한 부분에서 잘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 사람들을 축복할만한 것이 사람에게는 전혀 없으며, 축복은 하나님의 자비로부터만 기원함에 대한 주님의 선언일 뿐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 자신의 사역이다.

 

다른 곳에서 칼빈은 이렇게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손을 모두에게 펴신다. 그러나 세상의 창조 전에 그가 선택하신 사람들만을 (그에게 인도하시는 방식으로) 붙잡으신다." 이렇게 칼빈에게는 선택으로부터 시작해서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사역이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 사역에서의 하나님 독력주의(獨力主義, monergism)를 말하게 된다. 그래서 칼빈은 택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기쁘신 뜻 외에는 선택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칼빈 신학 해석에서 아주 상식적인 말을 다시 한번 더 반복한다면, 선택은 무조건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 자신들의] 공로에 대한 고려를 전혀 하지 않고 (우리를) 선택하셨다." 고 칼빈은 강조한다. 심지어 신앙조차도 선택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택자들을 "신앙으로가 아니라... 순전한 은혜로 구별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여겨지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하시는 사랑이라는 원천에서 나 오는 것이다." 선택에서의 하나님의 자유와 주권은 칼빈의 선택론에서 아주 분명히 가르쳐졌다. 예를 들자면,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총의 부여에 있어서 자유로우실 권리를 가지고 계신다. 그의 주권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당신님께서 자비하게 여기고자 하시는 이들에게 자비로우시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영원 가운데서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되었음을 지금 여기서 확인하는 방법으로 칼빈이 제안하는 것은 다른 어떤 것, 특히 하나님의 예지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부름 받았음을 상기하는 것이다.

 

선택은 이렇게 부르심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 것으로 나타난다.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부르심을 간과하고서 선택의 확실성을 깊은 미로인 하나님의 숨겨진 예지에서 찾는 것은 가장 위험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택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숨겨진 하나님의 예지가 아니라, 우리의 소명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명과 선택의 깊은 연관에도 불구하고, 그 둘 사이의 시간적인 차이를 분명히 해야만 한다. 칼빈에 의하면, 선택은 "영원하고 고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칼빈에게서, 선택은 "처음부터" 있었고, "세상의 토대를 놓기 전부터" [창세 전 부터] 있었으며, "모든 세대들 전부터" 있었고, 따라서 "우리가 창조되기 전부터" 있었고, "첫 사람이 죽음에로 타락하기 전부터" 있었다. 우리는 이 논문의 논제와 관련해서 여기 나열된 인용문들의 의미에 유의해야 한다.

 

이 말들에 의하면, 칼빈은 분명히 역사 안에서의 타락 사건 이전부터, 심지어 이 세상의 창조 이전부터 선택이 있었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자기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말하는 에베소서 1:3-5절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든 이들과 함께 칼빈은 다르게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행 연구에서 나열된 견해들 가운데서 칼빈이 역사적 타락 사건 이후에 선택이 있는 것처럼 생각했다는 시사를 주는 브라이언 게리쉬(Brian A. Gerrish)의 해석은 전혀 칼빈적 근거를 지니지 못하는 해석이라고 말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칼빈은 아주 분명하게 에베소서 1:3-5절에 따라서 우리가 창세 전에 선택되었음을 여러 곳에서 확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칼빈의 입장이 타락 전 선택설 (supralapsarianism)이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후에 밝힐 바와 같이 타락 후 선택설(infralapsarianism)의 주장자들도 선택은 역사적 창조와 역사 안에서의 타락 사건 이전에 있었던 것임을 분명히 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칼빈의 견해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베드로전서 1:20절에 대한 주석에서 칼빈이 하고 있는 말을 인용해 보기로 하자:

 

분명히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그 순전한 상태에 오래 서있지 못할 것을 미리 보셨다. 그러므로 당신님의 놀라운 지혜와 선하심에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상실된 인류를(the lost race of man) 파괴된 상태로부터(from ruin) 구하시는 구속자가 되도록 정하신 것이다.

 

이 말씀에 의하면,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죄에 빠져 잃어진 사람들을(the lost) 그 파괴된 상태로부터(from ruin) 구원하시도록 정해졌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 구절의 문맥을 살필 때, 이런 말을 할 때 칼빈이 역사적인 타락 사건이 있은 후에 그 타락으로 인해서 상실된 사람들을 구하시려 구속자로 임명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칼빈은 영원에서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인류의 타락이 있을 것임을 보시고, 그렇게 타락될 이들을 그 파멸 상태(from ruin)로부터 구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구속자로 세우셨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칼빈의 말을 다시 한 번 더 인용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은혜의 치료책으로 우리의 병을 미리 처리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 가운데서의 하나님의 작정의 순서는 죄에로의 타락에 대한 작정이 있고, 그 후에 그리스도를 통한 치유책을 마련하시는 작정이 있는 것이 된다. 이 모든 것이 모두 다 시간-이전적(pre-temporal)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 도 없다.

 

(비록 우리가 시간 이전의 작정의 순서를 생각한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칼빈은 창조 이전의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과정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가장 중요한 구절이라고 할 수 있는 에베소서 1:4에 대해서 주석하면서도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우리는 아담 안에서 상실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선택으로 우리를 멸망하여 가는 가운 데서 구원하지 않으셨다면,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말씀도 문맥에 유의하면서 잘 이해해야 하는 말의 하나이다. 여기서 칼빈은 역사상 타락 사건이 있은 후에 있는 선택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칼빈은 선택은 세상의 토대를 놓기 전부터 있었고, 우리들의 창조 이전에, 따라서 첫 사람이 죄와 사망 가운데로 타락하기 이전부터 있었다고 말했던 자신의 말과 스스로 모순되는 말을 하는 것이 될 것이고, 에베소서 1:3-4절의 맥락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말하는 아주 이상한 사람으로 나타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칼빈이 적어도 자신이 주석하고 있는 에베소서 1:3-4절의 의미도 모르고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여기서도 우리는 칼빈이 선택의 상황을 타락을 바라보는 상황으로 놓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도 영원 가운데 있는 작정의 순서상 타락이 선택에 앞서는 것임을 칼빈이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피기우스에 반박하여 쓴 논문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대한 논문" 에서도 칼빈은 선택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음을 유의해 보라 :

 

선택되지 않은 이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의지로 불신에 거하는 것이고, 신앙의 빛이 없으며, 완전한 어두움에 그대로 버려져 있는 것이다.

 

이 말에 의하면 선택되지 않은 이들은 타락된 인류의 상태, 그 온전한 어두움에 그대로 방치되어져 있다. 그렇다면 함의상 선택된 이들은 이런 온전한 어두움과 빛이 없는 상태, 불의 상태로부터 구해진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선택이 이루어진 상태는 이미 타락이 전제되어진 상태인 것일 수밖에 없다. 우리를 선택하실 그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보실 수 있는 것은 "파멸을 위한 재료 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고 칼빈은 말하기도 한다.

 

물론, 우리에 대한 예정이 이루어진 때는 창세 이전이므로 "우리가 아직 존재하기 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서 우리는 창조될 것이고 타락될 것으로 보여진 것이다. 이렇게 타락된 것으로 보여진 우리에게서 하나님께서 보실 수 있는 것은 "파멸을 위한 재료" 뿐이다. "따라서," 칼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구원의 원인 은 우리에게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에게서 기원한다." 이렇게 칼빈은 predamnation은 모든 사람이 받아야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 상황 가운데서는 모든 사람이 정죄 받아 마땅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기까지는 죄 가운데 놓여 있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구원에 아무런 기여도 못하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우리는 정죄 받아 마땅한 상황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택의 작정이 있는 상황은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서 우리가 이미 상실되어져 있는 상황인 것이다.

 

칼빈의 이런 생각을 후대의 신학적 발전과 논의의 상황과 비교해 보는 것은 칼빈의 입장을 명백히 하고 드러내는데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논쟁과 관련하여 제일 중요한 문서 중 하나인 도르트 회의 결정문의 일부를 인용해 보기로 하자:

 

"선택은 하나님의 불변하는 목적이다.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순전한 은혜로, 당신님 자신의 주권적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서, 시원적인 바른 상태로부터 그들 자신의 잘못으로 죄와 파멸에로 타락한 인류 전체로부터, 일정한 수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택자들의 중보자와 머리요, 구원의 토대로 정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에로 선택하셨다."

 

도르트 신경의 이 구절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1) 선택은 창세전에 있었는데, (2) 이는 타락한 인류 전체로부터의 선택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타락은 역사 가운데서의 타락이 아니라, 소위 타락 작정이 되고, 작정의 순서는 창조, 타락, 그리고 선택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전형적인 타락 후 선택설(infralapsarianism)의 입장이다. 우리가 위에서 살펴 본 칼빈의 입장과 도르트 신조의 입장을 비교하면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가? 선택과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서) 타락된 인류 가운데서의 선택이 모두 창세 이전임이 칼빈과 도르트 신경에서 주장되고 있다. 그러므로 작정의 순서로 말하면 칼빈에게서도, 도르트 신경에서와 같이,

 

(1) 세상을 창조하려는 작정이 있고,

(2) 죄에로의 타락에 대한 작정이 있으며,

(3) 선택과 유기의 작정이 있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도르트 신경과 이에 반영된 타락 후 선택설 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리쳐드 마우(Richard Mouw)의 말은 칼빈의 예정 이해에도 잘 적용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하시거나 유기하시는 목적은... 세상을 창조하시려는 작정 "후"(infra)에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 즉 선택과 유기가 이 세상 창조 이전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윌리엄 헨드릭슨도 바빙크의 이해를 정리하면서 아주 명확히 말하기를 "전택설과 후택설이 하나님의 계획내의 요소들의 순서를 제시함에 있어서의 차이라는 것이 분명해 진다" 고 한다. 바빙크도 아주 분명히 전택설과 후택설의 "차이점은 단지 작정들의 순서에 관한 것이다" 고 말한다.

 

벌코프도 타락 전 선택설과 타락 후 선택설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작정이 하나이고 그 모든 부분들에 있어서 모두 영원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그것이 포괄하는 다양한 요소들에 그 어떤 시간적 연속성을 부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타락 후 선택설도 영원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작정의 순서에 관한 논의임을 생각한다면, 칼빈의 예정이해가 무리 없이 타락 후 선택설에 대한 이해와 연관될 수 있음을 확언할 수 있을 것이다.

 

3. 논박: 용어의 정확한 사용과 맥락적 해석의 필요성

 

이상의 논의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어떻게 칼빈 연구자들이 우리가 이른 결론 이외의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가 의아해 질 수도 있다. 때로는 칼빈이 아주 분명하게 선택은 "창세 전"부터 있었다고 말하는 것에 근거해서 칼빈은 타락 전 선택설(Supralpsarianism)의 주장자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것은 타락 후 선택설도 하나님의 모든 작정은 다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은 결론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잘못 생각한 대표적인 학자로 우리는 다우이(Dowey)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창세전에 유기자들은 그런 목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고" 본다는 점에서 "칼빈은 유기에 대한 타락 전 선택설을 가르친다"고 말하고 있다.

 

칼빈의 예정론에 대한 논문을 쓴 윌리(Wiley)도 이와 같은 문제점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그도 "사람들은 창조 전에 선택되었다"는 말에 근거해서 칼빈이 타락 전 선택설을 가르쳤다고 말하는 것이다. 상당히 많은 다른 칼빈 해석자들과 함께, 다우이와 윌리는 아마도 타락 전 선택설과 타락 후 선택설 의 정확한 의미에 유의하지 않고서, 단지 선택이 창세 전, 따라서 역사적 과정 안에서의 타락 전부터 있었다는 주장에 근거해서 칼빈이 타락 전 선택설을 주장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이들은 칼빈이 여러 곳에서 작정의 순서상 타락 이후에 선택이 있는 것으로 말하는 것을 보면서 칼빈은 모호하며 일관성이 없다고 이야기하기도 하는 것이다.

 

칼빈은 이 구체적 논쟁 이전의 사람이므로 정확한 논쟁 상황에서처럼 진술하지 않을 것이다. 또 그가 모호하게 어떤 진술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위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1) 칼빈은 우리가 창세전에 선택받았다는 것 때문에 자신이 타락 전 선택설자 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2) 칼빈은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부정확한 용어의 사용으로 칼빈을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 외에 칼빈에게 타락 전 선택설과 타락 후 선택설의 두 요소가 다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 중 데이비드 웰즈의 논의에 우리의 관심을 기울여 보자. 그의 논의는 상당히 칼빈 자신의 논의를 중심으로 증거를 제시하는 논의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그는 로마서 9:18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칼빈을 인용한다:

 

"솔로몬도 불경건한 이들의 파멸이 미리 보여 졌다고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불경건한 자 들은 파멸이라는 구체적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다고 가르치고 있다(잠 16:4)."

 

여기서 웰즈는 칼빈은 솔로몬도 불경건한 자들이 파멸되기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생각을 강조한 나머지 이 창조가 창조의 작정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래서 웰즈는 이 구절에서 칼빈은 (1) 유기의 작정, 그리고 (2) 창조 작정의 순서로 생각하고 있다고 여기면서, 이런 부분에서 칼빈은 타락 전 선택설(supralapsarianism)을 시사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웰즈의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의 용어의 사용이, 다우이나 윌리의 경우와는 달리, 비교적 정확하다는 점이다. 적어도 웰즈는 창세전에 선택이 있다는 것으로부터 타락전 선택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칼빈의 말 가운데서의 작정의 순서에 의지해서 타락전 선택설을 생각하는 것이다. 웰즈는 이와 비슷한 구절들에서 칼빈의 타락전 선택설을 찾고, 또 다른 구절들에서 우리가 위에서 논의한 바와 같은 타락후 선택설을 찾아내어서 결국 칼빈은 "모호하고, 일관성이 없다"고 하고,"타락전/타락후 선택설에 대한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사실들은 사람들에게는 숨겨져 있고, 하나님의 비밀로 남아있다"고 결론 내리려고 한다.

 

이 논쟁에 대한 다른 이들의 평가와 함께 웰즈의 이 결론이 옳으며, 우리는 하나님 마음속에 있는 바, 영원 전에서의 하나님의 작정에 순서에 공연히 주의를 기울이려고 하지 말아야 하려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웰즈의 칼빈의 말에 대한 해석이 바르고 공정한 것인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논의의 문제이다. 위에 인용된 웰즈가 칼빈으로부터 인용하고 있는 구절에서 칼빈은 웰즈가 생각하고 있듯이 유기의 선택, 그리고 창조 작정이 아니라, (1) 유기의 작정 그리고 (2) 실제 역사적 창조를 말하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석한다면 칼빈은 이 구절과 이와 비슷한 구절들에서 타락전 선택설을 주장하는 것이 아닌 것이 된다. 그러면 칼빈에 대해서, 웰즈가 말하는 것과 같이, 구태여 일관성이 없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웰즈의 상당히 좋은 논의도 아직 우리를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어떻게 생각하면 웰즈의 논의는 칼빈의 두 입장의 병열을 잘 드러내어 주는 논의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인용하고 있는 칼빈의 말은 타락후 선택설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칼빈의 글을 그 본래적 맥락 가운데서 해석하면 일관성 있게 후대의 타락후 선택설의 입장과 같은 주장을 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훨씬 더 크다 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4. 결론

 

이상에서 우리는 칼빈의 예정론에 대한 해석 가운데서 그의 진술을 후대의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의 논쟁과 관련해서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의 문제를 다루어 보았다. 이 논문의 논의를 통해 칼빈의 이 문제에 대한 견해가 비교적 명백하게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 이 글의 가장 큰 의미 일 것이다. 즉, 칼빈의 말을 그 문맥 가운데서 바르게 해석하기만 하면, 칼빈은 후대의 타락후 선택설자들과 비슷한 과정의 신학적 사유를 하고 있었다는 좋은 주장을 세울 수 있다(pace Shepherd, Dowey, Faber).

 

또한 칼빈의 글에 대한 일관성 있는 해석을 취하면, 칼빈의 의도에 반하여 그를 해석하거나 칼빈에게 없는 그의 비일관성을 말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pace Wells). 또한 이 논의 과정에서 우리는 타락전/후 선택설과 같은 중요한 용어가 그 본래적 개념에 맞게 정확하게 사용되지 않으면 그 용어 자체나 중요한 신학자에 대한 해석에서 얼마나 큰 오해가 나타날 수 있는지를 살필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신학적 용어의 사용이 잘못됨으로 말미암아 야기되는 수많은 오해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용어뿐만 아니라, 신학사에서 나타난 중요한 용어의 사용은 적어도 그 용어가 생겨지고 사용된 그 의미를 가지고 논의되고, 그 맥락에서 비판되어야 할 것이다(pace Dowey, Wiley).

 

마지막으로 이 작업을 통해 우리는 칼빈에게 후대의 신학적 질문을 하는 것이 그저 시대착오적인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pace Muller). 물론 참으로 시대착오적인 질문과 논의가 있고, 따라서 바른 신학적 논의에서 그런 것은 다 배제되어야 하겠지만, 칼빈과 개신교 정통주의의 시대와 같이 사상적으로 가까운 시대에서는 이미 후대의 질문이 선배의 사상속에 배태되어 있어서, 후대의 신학자들이 그 논리적 함의와 결국을 이끌어 낸 것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도 칼빈과 개혁파 정통주의 사이의 또 하나의 연속성을 찾아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이는 또 다른 논의를 필요로 하는 커다란 문제의 제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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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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