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재호 목사 Pro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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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김광열 교수(총신)의 글이다. 중생과 회심을 이해하고 교육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중생과 회심, 어떻게 교육해야 하나?
-조직신학적인 관점에서-

 

  김광열교수 (총신대학교)

 

I. 서론 : 교회교육에서의 성경교리의 중요성

 

일반적으로 볼 때, 오늘의 교회교육의 성패는 내일의 한국교회의 성패를 의미하는 것이 라고 볼 수 있다. 오늘 교회 안에서 자라나는 젊은이들이 어떠한 신앙으로 영양분을 흡수하고, 어떠한 신앙내용과 신앙인격으로 성장하느냐의 문제가 내일의 교회의 모습을 좌우하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체적으로 교회교육에 대해 무관심해왔던 한국교회가 앞으로 더욱 더 그 분야에 새로이 관심을 모으며, 심도 있는 논의들을 지속해갈 때, 21세기의 한국교회의 밝은 미래를 그릴 수 있는 토대를 준비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오늘 개최된 개혁신학회 2006 봄 학술세미나 주제인 “한국교회 교육 다시 생각해 본다”는 매우 시의적절한 주제가 된다고 사료된다.

 

그런데, 우리가 교회교육을 논하게 될 때, 거기에서 논의되는 교육이란 성경을 전제로 하는 교육이어야 한다. 진정한 교회교육은 단순히 세속적인 교육원리나 방법들을 가지고 교회 안에서 성경공부를 가르친다고 해서 성취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교회교육이 정말로 21세기의 한국교회의 밝은 미래를 만들어내기 위한 기초를 놓기 위해서는, 그 교육의 모든 원리와 내용들이 진정으로 성경적인 가치관과 가르침 속에서 확립되도록 지속적인 교정 작업이 시도되어야 할 것이다.

 

세속적인 교육원리와 방법들은 성경의 하나님과 그의 말씀이 제시하는 역사관, 인간관, 구원관 등을 무시한 채 논의되어온 것들이므로, 우리가 교회교육을 통해 가르치고 제시하려는 내용과 상충되는 원리들을 직, 간접적으로 제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교육의 영역이란 넓게 봐서는, 신학의 한 분야인 실천신학의 영역이므로, 신학의 근본원리이며, 하나님의 기록된 계시의 말씀인 성경의 가르침과 교리의 틀 안에서 그 내용들과 목표들이 설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로 교회교육과 기독교교리들과의 통합(Integration)의 필요성이 제시되는 것이다. 성경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라고 가르치므로, -교회교육의 기본전제들 중의 하나는- 교회교육의 대상들인 인간이란 하나님의 의와 진리와 거룩으로 지음 받은 존재(엡 4:24)라는 가르침의 기초 위에서 다른 모든 교육의 이론들과 방법들이 전개되어야할 것이다. 혹은 교회교육의 목표로서 성숙을 생각해볼 때, 그 성숙이란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의 옛사람의 모습들과 죄악된 행위들을 죽이고(Mortification)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이 지음 받은 새사람의 모습을 살려나가는(Vivification) 원리로 설명되는 성경적인 성화의 삶을 이루려는 구조 속에서 그 내용이 정의되고 설명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그 세부적인 논의들에 있어서는 다소 견해의 차이들이 있을 수 있으나, 여기에서 강조하려는 것은, 교회교육이라고 할 때,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들과 교리들의 내용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여러 해 전에, 기독신문에서 “교회교육과 회심”의 관계에 대해 논란이 있었던 것도 부분적으로는 회심 혹은 중생에 대한 성경적인 교리이해의 부족에서 야기된 논란일 수도 있으며, 그것은 중생과 회심에 대한 성경적 교리이해를 통해서 정리할 때, 그 얽혀진 실타래를 풀어볼 수도 있으리라 본다. 따라서, 본고를 통하여, 필자는 먼저 중생과 회심의 개념을 성경적으로 구별시킨 후(물론 분리될 수는 없다), 중생은 하나님의 주권적, 단독적 사역이므로 근본적으로 교육의 내용이 될 수 없으나, 회심의 개념 속에서는 그것이 교회교육의 목표로서 수용될 수 있는 내용들이 있음을 드러내 주고자 한다.

 

II. 하나님의 주권적 초자연적 역사로서의 “중생”

 

본 개혁신학회 봄 학술세미나의 주제는 “한국교회 교육 다시 생각해 본다”이다. 그리고 본고는 구원론의 영역 속에서 신자에게 주어지는 영적 축복들 가운데, 회심과 중생의 사건이 어떻게 교회교육의 내용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겠는가? 라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려한다.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기 전에, 그리고 그에 대한 결론을 좀 더 정확하게 내리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일반적으로 혼용되기 쉬운 “중생”과 “회심”이라는 개념에 대한 구별을 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중생과 회심은 모두 성령님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특히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 속에서 성취하신 객관적인 구속사역을 오늘 신자들의 개개인들의 삶 속에서 자신의 구원이 되도록 주관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구원적용사역의 첫 단계인 것이다. 그러나, 회심(Conversion)이란 중생이 주어진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즉, 시간적으로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성령님의 초자연적인 중생의 역사가 주어진 이에게서 우리는 회심의 역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중생이란 그 구원적용사역의 첫단계의 사건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말하게 되는 개념이라면, 회심이란 그 같은 사건으로 인하여 인간 편에서 경험되어진 측면에서 보았을 때 사용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그 둘은 성령님께서 신자에게 베푸시는 하나의 구원역사의 첫 사건으로서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둘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 둘은 성경에서 두 개의 개념들로서, 서로 다른 관점에서 설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실존적으로 하나의 사건으로 주어진 구원의 역사이지만, 그 하나의 사건을 설명하는 두 개의 관점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구분을 명확히 하는 것은 본 세미나에서의 우리의 논의에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인간의 경험적 차원에서의 개념인 회심과 구별하여, 먼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서의 중생에 대한 성경적인 개념과 내용들을 정리해본 후, 본고의 후반부에서 회심사건의 내용들이 교회교육의 차원에서 어떻게 접근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설명하려한다.

 

1. 중생이란?

 

중생의 의미들에 대해서는 교회 역사 속에서 여러 가지의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어왔다. 초대 교부들의 경우, 중생이란 세례의식을 통해서 표시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의식과 실제적으로 매우 밀접한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고, 그러한 사상으로부터 중세 카톨릭의 예전주의적인(Sacerdotalism) 중생관이 발전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종교개혁자들도 중생의 표(sign)로서 세례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강조하기는 하였으나, 그 두 가지의 동일성은 기계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성례적인 관점에서였다. 중생의 은혜가 그것을 상징하는 세례 안에 실제적으로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상징과 실재를 혼동하는 것은 비성경적임을 주장했던 것이다. 세례란 중생의 은총을 상징해주는 표(sign)일 뿐이지, 그것의 의식과 행위 자체가 은총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중세의 예전주의적인 중생관에 대해서는 개혁자들이 극복을 하였으나, 그 이후 개신교회 안에서도 중생에 대해서는 여전히 견해의 차이점들이 존재해왔다. 초기 개혁신학에서 중생이란 매우 폭넓은 의미에서 이해되었다. 예를들어, 개혁자 칼빈의 경우 그것은 신자의 삶의 전영역 속에서 새로운 생명의 삶을 살아가도록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칼빈은 중생을 회심(Conversion) 혹은 회개, 그리고 성화의 개념과도 연관시켜 설명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1561년의 벨직고백서도 같은 방향에서 넒은 의미로 보았으며, 17세기의 많은 저술가들도 중생을 회심과 동일시하였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좀 더 제한적인 의미에서 중생의 개념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의해서 신자가 새로운 생명을 시작하는 그 출발에서의 사건이라고 정의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중생이란 성령에 의해서 신자에게 새로운 생명이 주어지는 사건이고, 회심은 그 심기워진 생명이 신자의 삶 속에서 처음으로 나타나게 되는 사건으로 구별하는 것이다.

 

2. 성령의 주권적 역사

 

이러한 개혁주의의 설명 속에서 강조되고 있는 개념은, 중생이란 성령님의 주권적인 사역에 의해서 발생되는 초자연적인 사건이라는 점이다. 물론, 새 생명이 심기워지는 이 사건은 자연적인 출생과 유사성을 지니는 부분도 있다. 자연적인 출생에 있어서, 출생자는 자신의 출생을 위해서 아무런 동기 제공도 할 수 없으며, 자신의 의지도 반영할 수 없고, 아무런 도움도 제공할 수 없다. 그는 단지 자신 이외의 존재들의 뜻에 따라서 이 땅 위에서의 삶을 출발케 되는 것이다. 중생(거듭남)이란 초자연적 출생으로서,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영적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할 때, 그것도 출생되는 자의 노력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사건을 경험케 된다는 점에서 자연적인 출생과 유사한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성경 안에서 제시되는 중생의 개념은 “새로운 피조물” 혹은 “부활”과 같은 이미지들을 통하여 표현되고 있다. 고린도 후서 5장 17절에서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선포한다. 여기에서 바울은 영적으로 새 생명을 얻게 되는 사건을 “새로운 피조물”(new creation)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스도의 새 언약의 행정 안에서, 하나님의 처음 창조 이후 왜곡되어온 인류 안에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에 동참하게 되는 것을 중생이라고 보는 것이다.

 

에베소서 2: 1-10에서, 바울은 또 다른 이미지를 가지고 중생사건을 소개한다. 그것은 부활의 개념이다. 중생이란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2:1) 너희를 살리신 사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함께 일으켜주신”(2:5-6) 부활의 사건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부활의 역사를 경험으로 들어가거나, 종말론적 재창조의 역사에 동참하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부패한, 그래서 전적으로 무능력한 우리 인간의 편에서는 전혀 기대될 수 없는 사역들인 것이다. 부활이란 죽은 자에게 주어지는 사건인데, 죽은 자가 어찌 스스로 살아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서 주어지는 사건이며,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도 그 역사의 대상인 피조물이 준비하거나 노력해서 이루어질 성격의 사건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창조주의 주권적인 사역에 의해서 이뤄지는 사건인 것이다. 이처럼, 성경은 부활이나 재창조의 이미지들을 통해서 중생이란 성령님의 주권적인 역사임을 말해준다.

 

중생에서의 성령님의 역사의 주권적인 성격을 잘 드러내주는 성경의 본문들 중에는, 니고데모와 예수님 사이의 대화가 담겨있는 요한복은 3장을 들 수 있다.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에 대해 설명해주시는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우리는 성령의 주권적 역사로서의 중생의 성격이 강조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3절에서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구절에서 “거듭난다” 혹은 “다시 태어난다”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는 “γεννεθη αναθεν”이라는 헬라어 단어로서, γεννεθη 는 출생한다는 의미를 지닌 “γενναω”라는 동사의 부정시제 수동형이다.

 

즉, 거듭난다는 것은 그 거듭나는 사람 자신이 스스로 능동적으로 만들어가는 역사가 아니라, 그 사건 속에서 사람은 전적으로 수동적으로 남게 되는 것임을 말해준다. 더욱이 “위로부터”라는 의미를 지닌 αναθεν이라는 단어도, 그 사건이 이 땅에서 발생되는 인간들 사이에서의 사건과는 전혀 다른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초자연적인 출생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처럼, 여기에서 우리는 중생이란 -앞에서 살펴보았던 부활이나 재창조의 이미지에 대한 설명에서 확있했던 바와 마찬가지로- 인간 편에서의 어떠한 도움이나 동기제공이 필요 없는 하나님의 단독적이고 주권적인 역사라는 점을 재확인케 된다.

 

중생의 사건에 있어서, 그 집행자가 인간이 아닌, 성령 하나님이라는 점은 예수님의 계속되는 대화 속에서 발견된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라는 니고데모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5절에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느니라”라고 대답하신다. 여기에서 “성령으로 난다”는 말씀은 바로 중생사역의 집행자는 성령 하나님이심을 다시 강조해준다. 3절에서 “위로부터 태어난다”라고만 설명되었던 그 사건은 이제 5절에 와서, 분명히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주어지는 것임을 밝히신 것이다.

 

중생의 의미를 설명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8절에서 사용하신 ‘바람’에 대한 비유도, 성령의 주권성의 의미를 더욱 강조해준다. 예수님은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라고 설명하시는데, 즉 바람이 임의대로 부는 것처럼 중생사건도 성령님의 주권적인 역사임을 의미하신 것이다.

 

이처럼, 고린도서와 에베소서, 그리고 요한복음의 구절들을 통해서 확인케 되는 것은 중생이란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서, 그 사건 속에서 중생자가 수동적으로 남게 되는 사건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교회 교육이 사람을 교육시켜서 헌신된 자로서 살아가게 하려는 목표를 지닌 작업이라고 할 때, 그 교육대상이 수동적으로 남아있으면서 그의 상태와 조건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만 발생되는 중생사건을 교회 교육과정 속에 포함시켜 인간의 어떤 교육방법으로 시도하거나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교회교육의 기본적인 전제가 되야 한다.

 

중생의 성격에 대한 개혁주의의 가르침은 -특히 성령의 주권성과 연관하여 볼 때- 칼빈주의 5대 교리의 내용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크게 두 항목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데, 첫 번째로는 “전적부패”의 가르침이다. 중생의 역사가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일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은 아담의 타락 이후로 그 안에서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이기 때문인 것이다. 물론 인간은 죄인이기 전에 또한 자연인으로서 육적 존재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영적인 것이므로, 육적 존재로서는 자기 스스로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시도를 할 수 없는 것이다(요 3:5-6).

 

더욱이,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담의 타락 이후로 인간은 영적인 장님의 상태에서 살아가므로 영적인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으며(요 3:3), 또한 죄와 허물 가운데서 죽은 자로서(엡 2:1)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전적으로 무능력의 상태에 머물게 된다. 인간은 본성상 하나님의 율법과 그 분의 뜻에 복종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된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자연적인 본성과 반대되는 일을 자기 스스로 의식적으로 결단하거나 시도할 수는 없는 것이며, 바로 거기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서의 중생의 필요성이 제시되는 것이다.

 

“5대 교리”의 4번째 항목인 “불가항력적 은혜”의 항목도 성령의 주권적 역사로서의 중생의 성격을 말해주는데, 그 항목은 우리가 중생하게 되는 은혜란 인간이 거절할 수도 없는 불가항력적인 은혜이라는 점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도바울의 경우와 같이, 아무리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핍박했던 이들조차도 하나님의 강력하고 철저하신 은총의 시여 앞에서 인간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것이 중생의 역사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중생이란 그것이 동사로 사용될 때, 우리가 “중생하는”것이 아니라, “중생되는”것이라고 해야 한다. 후크마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숨이 멎은 사람에게 인공호흡을 해주는 것과 같다. 숨이 멎은 사람에게 아무리 좋은 커리큘럼을 가지고 뛰어난 교사가 강의를 한다고 해서, 그가 성숙한 신자로 성장하는 일은 발생되지 않을 것이다. 일단 전능하신 성령 하나님께서 인공호흡과 같은 새생명의 역사를 일으키신 후 살아난 이에게만, 우리는 교회교육의 커리큘럼을 적용시켜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3. 중생의 변화

 

성령 하나님의 중생케 하시는 역사는 신자의 존재의 근본적인 변화들을 가져다준다. 그것들은 인간의 수련이나 노력을 통해서 제공될 수 없는 근본적인 변화들인데,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몇 가지의 변화들을 지적해볼 수 있다.

 

우선, 타락한 죄인의 지적 영역에 드리워졌던 죄의 영향(noetic effect of sin)들의 제거가 발생된다(고전 2:12-14). 중생자는 전에 깨닫지 못했던(롬 3:11) 영적 일들에 대해서 바라볼 수 있는 영적 시각을 회복케 되는 것이다. 성령으로 인하여, 그는 이제 자연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영적 이해가 가능케 되는 것이다. 또한 그는 성령님의 정결케 하는 역사를 통하여(요 3:5; 딛 3:5), 어두운 양심이 회복되어 깨끗한 양심으로 변화하게 되며, 그의 의지도 이제는 죄에 노예 되었던 상태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자신의 몸을 드릴 수 있는 자유의지를 회복케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의 감정과 욕구들도 이전의 세속적인 욕망과 감정들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방향으로 표출될 수 있는 변화가 주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중생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변화들의 내용들을 볼 때, 그것들은 인간 교육 과정을 통하여는 만들어질 수 있는 성격의 변화들은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즉, 중생의 역사란 오직 성령 하나님에 의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어지는” 사건인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교육으로 만들어질 수 없으므로, 교회교육의 목표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III. 교육을 통한 회심사역 논의의 가능성

 

지금까지 우리는 중생의 역사란 성령 하나님의 초자연적이고 주권적인 역사로서, 중생자에게서 아무런 조건이나 노력도 관여될 수 없는 오히려 중생자는 전적으로 수동적인 상태로 남아있는 동안에 발생되는 사건인 것을 성경의 여러 가지 가르침들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따라서, 그러한 중생의 역사는 교회교육이 목표로 할 수 없는, 성령 하나님만의 단독적이고 주권적인 사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렇다면, 교회교육을 통한 회심사역이란 무의미한 것인가? 주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첫 사건인 중생과 회심을 위한 교회교육의 커리큘럼은 세워질 수 없다는 것인가? 인간은 수동적으로 남아있고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의해서만 그 역사가 발생되는 것이라면, 그 일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거나, 노력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 아니겠는가?라는 질문들이 제시될 수 있다.

 

여기에서 이제 우리는 -앞서 서론 부분에서 언급한대로- 중생과 회심의 의미를 정리하여 구별함으로서, 교회교육의 차원에서 접근이 가능한 부분들을 회심이라는 개념 속에서 찾아보아야할 순서가 되었다. 중생이란 단독적이며 주권적인 성령 하나님의 비밀한 역사이다(요 3장). 그러나, 그러한 중생의 역사가 주어진 자에게서 나타나는 현상과 반응들이 회심의 사건이라고 본다면,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회심의 사역에서 사람의 참여를 말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게 되며, 바로 그 점에서 우리는 교회교육의 가능성을 말할 수 있는 영역이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중생의 은총을 베풀어주셨을 때, 인간은 그 중생의 역사로 말미암아 발생된 변화에 근거하여, 새로운 방향의 삶을 추구하게 되며, 그러한 새로운 생명의 삶의 실체들을 여러 가지 방향에서 표출케 되는데, 그러한 과정 속에서 교회교육은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신구약 성경 속에서 회심이란 사람의 사역인 것으로 묘사되는 때가 많다. 물론, 회심은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돌이키도록 하셔야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분명히 우리가 회심해야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지적했듯이 구약에서 회심을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슈브(בושׁ)”인데,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의미로 74회 사용된 반면, 하나님의 행동으로 사용된 경우는 겨우 5번 뿐이며, 신약에서도 26회는 인간의 행위로 사용된 반면, 오직 3번 정도만 하나님의 사역인 것으로 사용된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에스겔 33:11절에서,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라는 말씀 속에서도 회심의 사역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할 부분인 것으로 나타난다. 신약에서는 오순절 사건 후에 베드로가 행한 설교 속에서, “회개하고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행 2:38)라는 촉구를 듣게 되는데, 마찬가지로 회개란 그 청중들이 행해야할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이와 같이, 구원역사의 첫 단계에서의 사건으로서 회심을 말할 때도 인간의 역사가 하나님의 역사와 조화되어 설명되지만,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자가 되는 처음 단계에서의 회개개념과 그 이후에 계속되는 회개 개념 사이의 구별을 통해서, 본 주제의 논의의 내용들을 취급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전자에서 보다도 후자의 경우에 인간의 사역이 포함된다는 사실이 더욱 명백히 드러나게 되며, 따라서 교회교육의 가능성이 분명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오순절에 외쳤던 설교 속에서 제시된 “회개하고...죄사함을 받으라”는 촉구 속에서의 회개란 처음으로 주님을 영접하게 될 때 있게 되는 죄로부터 하나님께로의 전환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 처음의 전환이 있은 후에도, 신자는 이 땅 위에서의 삶을 계속하는 동안 끊임없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회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개혁자들은 회개란 일생동안 지속되어지는 작업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루터의 경우에도, 회개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전 생애를 걸쳐서 이뤄져야할 작업이라고 보았으며, 칼빈도 그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전 생애는 회개로서 특징지워진다는 점을 강조했다. 서론 부분에서도 지적하였듯이, 칼빈에게 있어서, 중생이나 회심이 성화와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사실 회심의 개념보다 성화의 개념은 그것이 교회교육의 분명한 목표가 된다는 점을 더욱 명확히 해 준다.

 

회심의 또 다른 측면인 “믿음”에 대해서도 같은 방향에서 설명될 수 있다. 죄인이 처음으로 주 앞에 나아올 때에 그는 믿음으로 나아와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게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믿음은 일회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으로 출발한 신자는 그의 생애가 계속되는 동안 끊임없이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중생한 이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회개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믿음의 개념에 있어서도 우리는 신자가 되는 처음의 단계에서의 믿음의 개념과 그 이후에 계속되는 신자의 삶 속에서의 믿음의 개념은 서로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또한 구별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구별 아래서 우리는 후자의 개념으로서의 믿음과 회개의 사역 속에서 교회교육의 가능성 뿐만 아니라 당위성과 필요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IV. 교회교육이 목표로 삼을 수 있는 회심사역의 내용들

 

회심이란 일반적으로 회개와 믿음으로 설명된다. 그것들은 성령 하나님의 중생의 역사가 주어진 신자에게서 필연적으로 보여져야 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회개와 믿음은 중생사역의 열매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회개와 믿음의 개념은 어원적으로는 구별되지만 성경 속에서 함께 가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것은 그 둘 모두가 같은 하나의 뿌리인 중생으로부터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뿌리로부터 맺혀진 열매들은 모습이 다소 다를지라도 그 내용은 같은 성격의 것을 지니게 되는 것과 같다.

 

성경에서 회개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현상이며, 또한 믿음도 그것이 참 믿음일 때는 언제나 회개하는 믿음이어야 한다. 예수님을 믿기는 하되 회개는 하지 않겠다고 할 수 없는 것이며, 회개는 하겠으나 예수님을 믿지는 않겠다고 말하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참 회개란 언제나 믿는 자에게서만 나타나지는 것이다. 만일 아직 중생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한 자에게 회개를 요구할 경우 그 결과는 형식적인 회개 혹은 율법주의적인 회개에 머물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믿음과 회개란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비밀한 중생의 역사가 주어진 신자에게서 나타나는 회심역사 속에서의 서로 떨어질 수 없는 핵심적인 내용들이다. 그런데, 우리가 교회교육과 연관하여 논의할 수 있는 부분은 -위의 III항 뒷부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회개와 믿음의 개념에 대한 2가지 개념들 중 주로 후자의 의미, 즉 구원의 역사의 처음 단계에서가 아닌 그 이후 계속되는 신자의 삶 속에서의 회개와 믿음이다. 이제 그 각각의 내용들을 분석하면서 교회교육과의 연관성을 찾아보도록 하자.

 

1. 믿음

 

믿음의 성격에 대해서 성경이 주로 강조하는 바는 믿음도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의 결과라는 점이다. 중생이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비밀한 사역일 뿐만 아니라, 회심의 한 요소인 믿음도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는 열매이며, 하나님의 선물이요 전적인 은혜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믿음의 근원은 예수님이신 것으로 설명된다(히 12:2).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할 때, 그 말은 우리의 믿음 자체에 구원하는 능력이 들어 있어서 그 믿음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나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믿음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할 때 그것은 믿음을 단지 도구적 원인(instrumental cause)으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도구적 원인 자체에는 아무런 공로가 없다. 그것은 도구로서만 사용되었을 뿐이다. 그 도구 자체에 어떤 구원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능력이란 믿음이 의지하고 있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언급되는 “믿음”이란 구원역사의 처음단계로 이해되는 “믿음”의 개념으로만 국한시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의미에서는 교회교육의 가능성을 얘기할 수 없다. 그러한 차원에서 “믿음”이란 오직 성령님께서 나누어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의미에서의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선물임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믿는 자들의 행동의 중요성과 인간의 인격적인 참여의 부분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믿는 자가 전적으로 참여하는 사건으로서 설명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Ferguson 교수는 그러한 양면성의 진리를, 바울이 빌립보서 1:29절에서 고난과 믿음을 유비시키면서 가르치고 있는 내용을 통해서 제시되고 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서 “고난”이란 믿음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 은혜로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로서 설명된다. 그러나, “고난”이라는 것은 우리가 두 손으로 서로 주고받는 것과 같은 선물꾸러미가 아니라 우리 전인이 행동하는 가운데 받게 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진 선물인 믿음도 우리가 그냥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선물 꾸러미가 아니라, 우리의 전인격으로 소유되어지는 선물임을 본문은 암시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나 그 믿음은 동시에 우리의 삶 속에서 행동하는 가운데 소유되는 것으로 이해 되야 한다.

 

믿음이란 -고난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행동으로 취해지는 선물이라는 개념은 바로 믿음의 영역 속에도 교회교육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측면이 있음을 말해준다. 믿음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면서도, 우리가 전인격적으로 받아야하는 것이라면,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효과적으로 그것을 받아 누릴 수 있을 것이가? 라는 신앙적 과제를 생각하게 되며, 그것은 교회교육의 목표로서 타당한 주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인간의 전인적인 참여라는 사실이 더욱 명확해지는 것은, 믿음이 지니고 있는 3요소의 내용들을 바로 이해함으로서 이뤄질 수 있다.

 

믿음에 대한 개혁주의의 설명들 중의 하나는, 믿음이란 3가지의 요소들을 지닌다는 점이다. 신자의 믿음이 성경적인 믿음으로 온전히 구비되려면, 적어도 지식, 확신, 그리고 헌신의 3가지 요소들이 포함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3가지의 요소들이란 믿음의 내용을 말하는 지식, 그 지식적으로 이해되는 믿음내용에 대한 확신, 그리고 그 확신한 바대로 살아가는 헌신과 순종을 의미한다.

 

성경은 먼저 신자의 믿음이 들음에서 나는 것이라고 설명해준다(롬 10:13-17). 사실 제대로 알지 못하고 믿는 것은 맹신에 떨어지게 된다.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신을 믿는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바울도 아덴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행17:23),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단에서 제사 드리는 이들을 지적하면서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알려주겠노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누구이며 참된 회개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그러므로 올바른 믿음이란 그가 믿는 바와 그 믿는 대상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필요로 한다. 성경적인 믿음이란 그 믿음의 내용이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교회교육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다시 확인케 된다. 중생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에게 심기워진 새로운 생명의 씨앗은, 그 씨앗의 진정한 의미와 내용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서 참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인데, 바로 그 작업을 도와줄 수 있는 자가 교회교육을 맡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중생하여 세례 받은 초신자는 그가 믿음으로 수납한 복음의 의미들을 바로 깨닫고, 그 가르침 위에 바로 서있을 때에야 흔들리지 않는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믿음의 지식이란 단순한 과학적인 지식이나 수학적인 지식을 의미하기보다 인격적인 지식을 의미한다.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 많은 정보를 나열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Knowledge about God)은 하나님 자신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알아 인격적으로 교제케 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ledge of God)과 구별 되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믿음의 지식이란 후자의 지식을 의미한다. 그러한 지식은 단지 입술로만의 고백으로서의 믿음이 아니라, 삶으로 연결되어지는 산 지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교육은 신자들을 단지 성경의 “사실들”에 대한 지식을 쌓아가도록 지도하는 교육 정도에 머물 것이 아니라, 삶으로 연결되는 산 지식이 되도록 우리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게 해야 할 것이다. 단순한 지적인 차원의 지식에 머물게 될 때 그것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며,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하는 지식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그것은 교회교사가 경계해야 할 지식이다. 그러나 베드로후서 3:18에서 말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은 진정한 믿음의 지식으로서 교회교육이 목표로 삼아야할 지식일 것이다.

 

믿음의 두 번째의 요소는 마음으로 동의하는 차원이다. 믿음으로 받아들인 내용에 대해서 마음으로부터의 확신이 뒤따라줘야 한다. 신자의 믿음이 참 믿음이 되려면, 그가 지식적으로 이해하고 납득한 내용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부분에서의 역사도 궁극적으로는 성령님의 감화하시고 감동하시는 역사로 인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중생한 자에게는 새 생명의 씨앗이 심기워졌으므로 교회교육은 그 씨앗의 생명이 정상적으로 성장하여 그의 전 인격이 복음의 내용들을 명확하고도 균형 있게 확신할 수 있게 되기까지 도와주고 이끌어줘야 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성경에서 믿음이란 “신뢰하고 맡기는 삶”의 요소를 포함할 때 진정한 믿음이 된다.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이란 죽은 믿음이라고 했다. 자신이 믿고 확신한 바대로 살아가는 삶이 있을 때 그가 진정한 믿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여호와의 약속을 믿고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며, 아들 이삭을 도로 살리실 줄로 믿고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드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믿음이 정상적으로 움직이게 될 때는 도움이 필요 없을 수도 있겠으나 현실적으로 신자의 믿음은 항상 견실한 것만은 아니다. 자신이 믿고 확신한 것이라도 쉽게 그에 따라 행동에 옮기지 못할 때가 있고, 혹은 그대로 행동에 옮기려고 하면서도, 행동을 제대로 올바르게 수행하지 못하기도 하는 것이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신자들의 현실이다. 따라서 교회교육은 그러한 신자의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주며, 연약한 부분들을 강하게 세워주는 역할을 감당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처음으로 신자가 되는 회심의 순간에는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선물로 주어진 그 믿음의 삶을 살아가게 될 때 우리는 순종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믿음의 수동적인 측면과 함께 능동적인 측면이 있다고 말하게 된다. 그리고 그 믿음의 능동적인 참여의 부분에서 신자는 적극적으로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하며 바로 그 부분에서 교회교육은 성경공부나 여러 가지 교육방법들을 통하여 신자가 그 부분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지도하며 이끌어줄 수 있을 것이다.

 

2. 회개

 

회개라는 의미로 사용된 구약의 히브리어에는 ~h;n과 bwv가 있다. ~h;n:å은 심리적으로 애통하며 후회하는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누가복음 18:23절에서 부자 관원이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게 된” 상태를 가리킬 때 사용 되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회개의 온전한 의미는 단순히 애통하는 감정이나 후회감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단순히 후회하고 애통해 하는 것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까지를 포함해서 회개의 의미를 정의한다. 바로 그러한 의미가 분명히 나타나는 히브리어 단어는 bwv라고 볼 수 있다. 참 회개란 감정적으로 후회하는 마음을 갖는 것부터 출발할 수 있으나, 그 차원을 넘어서 올바른 길로 방향을 바꾸어가는 것까지를 포함하는데, bwv가 바로 그 후자의 의미를 제시해주는 단어이다. 예를 들면, 그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생활로부터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

 

신약성경에서 사용된 헬라어들 속에서도, 단순한 후회감정을 뜻하는 μεταμελλομαι라는 단어 보다는, “μετανοεω”나 “επιστρεφω”라는 단어들 속에서 참 회개의 의미를 발견한다. 후자의 단어들은 단순히 감정적인 후회감만이 아니라, 실제로 악한 행동들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까지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즉, 참 회개란 우울한 감정이나 후회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깨닫고 기쁨으로 그에게로 나아가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후크마교수는 챔버래인의 글을 인용하면서, 회개와 후회감을 구별한다: “회개란 소망과 기대 가운데 앞을 바라다보는 것인 반면에 후회와 유감은 단지 수치 속에서 뒤를 돌아다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회개란 -위에서도 지적했던 바와 같이- 믿음이 가지고 있는 뿌리와 동일한 뿌리로부터 주어진 열매이므로 믿음이 의미하는 것과 내용적으로 거의 동질의 실체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죄를 후회하고 그것으로부터 돌아서는 것만이 아니라, 주께로 나아가는 것까지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포괄적인 의미에서 볼 때 우리는 참 회개가 지니고 있는 3가지의 요소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는 지적인 요소이다. 참 회개란 먼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초월성에 대한 인식을 포함한 그 분에 대한 지식이 전제된다. 그러한 하나님의 위엄을 깨달은 자만이 그 분 앞에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내놓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자기 입술의 부정한 모습을 명확하게 깨닫게 되었듯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선 자만이 자신의 죄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의 심각성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지식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로 인해 죄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심판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질 형벌에 대한 지식인 것만은 아니다. 회개가 기쁨으로 주께로 나아가는 것까지 포함하는 참된 회개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에 대한 이해도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회개란 율법 안에서는 주어질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의 복음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율법이란 아픔을 느끼게해 줄 수는 있어도, 그 아픔의 자리에서 일어나 소망의 길로 들어서도록 하는 능력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롬 3:19-20; 7:7).

 

바로 이 회개의 첫째 요소에 있어서도 교회교육의 중요성은 지적될 수 있다. 물론 위에서도 지적했던 바와 같이 교회교육을 논할 때, 염두에 두는 회개의 개념이란 구원역사의 초기에 주어지는 일회적인 회개의 사건을 가리키는 개념보다는 중생된 이후 계속되는 신자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회개의 삶으로서의 개념이다. 교회교육의 주제가 논의될 영역은 전자의 의미에서 보다는 후자의 의미에서의 회개이다. 그러한 2차적인 의미에서 회개의 개념 속에서 우리는 신자에게 하나님에 대한 좀 더 정확하고 깊이 있는 이해가 주어질 때 좀 더 성숙한 회개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사야와 같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에 들어간 자만이 자신의 부패한 죄성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예수님의 복음의 함축적인 의미들을 바로 깨달은 자만이 그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회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러한 부분들이 교회교육이 마땅히 감당해야할 영역들일 것이다.

 

둘째로 회개란 정적인 요소도 지닌다. 진정한 회개란 하나님의 거룩하심 그의 심판에 대한 이해와 아울러 감정적인 측면도 포함되어 설명된다. 회개란 전인격적인 돌이킴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성과 아울러 감정을 지닌 인간으로서 죄인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애통하는 마음이 따르게 되는 것이다. 시편 51편에서 다윗왕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후 나단 선지자로부터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말씀을 듣고 자신의 죄에 대해서 지적으로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애통하며 눈물로 회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사람에 따라 좀 더 정적인 사람도 있고 좀 더 이지적인 사람도 있으므로 그 반응의 정도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회개란 지정의(知情意)의 전인격적인 변화이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자기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 때 죄송스러운 마음을 갖으며 애통하고 슬퍼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여기에서 회개의 감정을 슬픔의 상태로만 이해하려 해서는 안된다.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회개란 단순히 후회감이나 유감 탄식의 감정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깨닫고 그 분께로 돌이키는 것까지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기쁨까지 포함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회개에는 의지적인 요소가 있다. 지적으로 깨닫고 애통하는 마음을 가질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생활 속에서 죄에서 멀리 떠나며 성결한 삶을 추구하려는 의지적인 결단이 있어야 한다. 죄에서 떠난 삶의 모습들이 나타나져야 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참 회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교육이란 바로 이러한 생활 속에서의 참 회개의 모습을 보여주도록 그리스도인들을 돕는 일을 수행해야할 것이다. 자기가 지적으로 깨닫고 느낀 바대로, 생활 속에서 죄를 떠나는 열매들을 맺을 수 있도록 혹은 하나님의 거룩한 모습을 따라 살아가도록 돕는 일을 교회교육의 목표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질 때, 신자들은 추가적으로 몇 가지 새로운 변화들을 경험하게 된다. 먼저 그는 죄에 대해 새로운 관계가 설정된다. 더 이상 죄는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위치에 있지 못하고, 이제는 의의 종으로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구체적으로 죄로부터 떠나려는 결심을 하고 그것을 위한 실천을 시도하게 될 것이다. 또한 하나님에 대해서도 더 이상 진노와 심판의 존재가 아니라, 사랑을 베푸시는 은혜로우신 아버지로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결국 자신에 대해서도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되는데 더 이상 자신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아니며, 이제는 그리스도의 의를 인하여 의롭다함을 얻은 자가 되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변화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들도 교회교육을 통해서 성도들에게 좀 더 명확하게 제시되고 가르쳐져야 할 교육내용들이 되는 것이다.

 

V. 결론

 

서론에서 제기했던 바, “중생과 회심을 교회교육의 내용 속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 본고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첫단계의 사건에 대한 조직신학적인 이해들을 통해서 그 답변을 제시하려 하였다. 인간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첫 단계를 우리는 중생 혹은 회심이라고 말하는데, 우선 그 두 개의 개념을 구별하여 설명하였다.

 

우리는 성경에서 중생이란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비밀한 역사이며, 인간 편에서는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는 하나님의 단독적인 사건으로 설명되고 있음을 확인하였으며, 따라서 그 역사에 대해서는 교회교육이 어떠한 시도도 할 수 없음을 지적하였다. 물론, 교사가 의도하지 않은 것일지라도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 속에서 발생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교육이 성취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시도할 수 있는 목표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회심을 중생의 역사가 주어진 신자에게서 나타나는 반응이요, 변화라고 볼 때 우리는 회심에 대해서는 교회교육이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회심의 2가지 의미들 중에서 신자가 되는 초기의 일회적인 사건으로서의 회심의 의미에서 보다는 중생한 이후에 계속해서 이루어가는 신자의 삶의 관점에서 설명되는 회심의 의미 속에서 교회교육의 중요성과 필요성이 더욱 드러나게 되는 것임을 우리는 확인하였다.

 

특히 회심의 내용들로서 제시되는 믿음과 회개의 성격들과 그것들이 지니는 여러 가지의 요소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우리는 교회교육이 참여하고 관여하여 신자들을 지도하며 도와주어야할 부분들이 많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볼 때 구체적인 교육방법들이나 내용들의 구체적인 부분들에 대해서는 기독교교육학적으로 더 설명이 되어야 하겠으나 원리적으로 우리는 온전한 믿음과 회개의 삶을 살아가도록 함에 있어서 교회교육이 감당해야할 부분들은 분명히 있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이 말하는 바대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도록 하기 위한 교육의 목표들이 올바르게 설정될 때 2차적인 의미에서의 회심의 역사는 더욱 효과적으로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그러한 작업이 이 땅 위에서 온전히 완료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신자들로 하여금 회심의 사람 즉 믿음과 회개의 사람이 되도록 하는 일에 있어서 교회교육을 맡은 이들의 사명은 중차대하다고 하겠다.

 

교회 안에서의 교육의 목표와 방법들이 더욱 성경적으로 조명되어, 성경적인 가르침에 일치되는 교육이 이루어질 때 21세기의 한국교회는 더욱 견실하게 세워지고 더욱 풍성한 열매들을 맺게 될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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