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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믿음”에서 말하는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What Kind of Faith Is the Faith in Sola Fide?

이성호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우리는 믿음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굳건하고 확실한 지식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진 약속의 진리에 기초하며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지성에 계시되었고 우리의 마음에 인쳐졌다.

-John Calvin


문제제기


“오직 믿음(sola fide)”은 종교개혁이 참 교회에 가져다 준 가장 큰 선물 중에 하나이다. 이 교리야 말로 신자들에게 복음의 메시지 그 자체였고, 이 메시지를 듣고 수많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깨닫고 교회의 억압된 전통으로부터 참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이 아무리 바른 교리라 하더라도 제대로 혹은 충분히 이해되지 않으면 악용이나 오용이 될 수 있다. 사실 이 교리는 한국 개신교회에서 상당한 기간 동안 피상적으로 이해되어 왔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문구가 말해 주듯이 “오직 믿음”은 교회를 다니기로 결심한 사람에게 천국을 영구히 보장해 주는 천국행 티켓처럼 이해되고 있다. 그들은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다. 오늘 당장 죽어도 천국 갈 자신이 있다. 왜냐하면, “내가 믿기 때문”이다. 천국이 보장 되어 있으니 자신의 삶은 부차적이거나 사소한 일이 된다. 한국 교회 성도들의 윤리적 수준이 세상 사람들 보다 비슷하거나 오히려 낮은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 개신교 신학자들이 종교개혁의 핵심 교리인 이신칭의를 새로운 관점에서 보고자 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문제는 이신칭의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신칭의를 제대로 교회에서 가르치지 않은 것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아마 한국교회 설교 강단에서만큼 “믿습니까?-아멘”이 빈번하게 외쳐지는 경우가 없을 것이다. 목사들은 설교의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믿습니까?”라고 질문한다. 그 설교를 듣는 성도는 그 질문에 아멘이라고 답을 하지 않으면 믿음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큰 소리로 “아멘”이라고 외친다. 아멘이라는 소리가 크면 클수록 믿음이 더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는다. “믿습니까?”라는 질문 바로 전에 목사가 무엇을 이야기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설교시간에 청중들은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할 시간이 없다. 목사의 질문에 신속하게 아멘이라고 반응하지 않는 것도 믿음 없는 것으로 비추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믿습니까?”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큰 소리로 “아멘”이라고 응답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제기한 두 가지 예는 믿음과 관련되어 한국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들이다. 그러나 이 예들에서 나타난 믿음의 모습이야말로 종교개혁이 말하는 교훈과 정면으로 반대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믿음에 대한 이런 피상적인 이해야 말로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큰 문제점 중의 하나이다. 종교개혁 기간을 맞이하여 “오직 믿음”에서 말하는 믿음의 성격이 정확히 무엇인지 개혁파 입장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오직”에 대한 바른 이해


믿음을 다루기 전에 먼저 “오직”을 먼저 잠시 다루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 “오직”이 잘못 이해됨으로 신자들에게 많은 오해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오직”이 오해를 주는 이유는 이 단어 자체가 어떤 배타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물론 믿음은 배타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배타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오직 믿음”이 의도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먼저, “오직 믿음”은 믿음만 있으면 되고 다른 것은 필요없다는 말이 아니다. 심지어 믿음이 최고라는 말도 아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고린도전서 13장에 따르면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 그 뿐만 아니라 성경에는 지혜의 중요성을 대단히 강조하고 있다. 잠언 4장 7절은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고 강하게 명령한다. 따라서 “오직 믿음”에서 “오직”을 무조건적인 배타성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믿음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의 은덕을 받은 유일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배타성을 가진다.


오직 믿음은 또한 행위를 무조건적으로 배제하지도 않는다. 믿음과 행위는 서로 인과관계에 있으며 비록 구분되지만 서로 분리 될 수 없다. 야고보서의 가르침대로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즉, 행위를 통해서 우리는 어떤 믿음이 참 믿음인지 아니면 헛된 믿음인지를 비로소 구분할 수 있다. 종교개혁이 결사적으로 거부한 것은 믿음만으로 죄인을 의롭다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주장이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는 것인데, 믿음만으로 부족하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부족하다는 것을 뜻하였다. 개혁가들이 오직 믿음을 사수한 근본적인 이유는 오직 그리스도를 사수하기 위함이었다. 이 점에서 오직 믿음과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는 연결된다. 따라서 오직 믿음은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칭의론적인 제한된 의미에서 “오직” 믿음이다.


구원을 일으키는 믿음(saving faith)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오해가 발생하는 중요한 이유는 ‘믿음’에 대해서 서로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것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더 어려운 점은 성경이 믿음이라는 단어를 믿음과 비슷한 현상들을 가리키는데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마치 여러 종류 혹은 여러 단계의 믿음들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표적인 예로 성경에는 역사적(historical) 믿음, 일시적(temporal) 믿음, 기적을 일으키는(miraculous) 믿음이 소개되어 있다. 종교개혁 당시 로마교회는 이런 것들을 다 믿음의 카테고리 안에서 이해하였지만 종교개혁은 그것들을 진정한 의미에서 믿음으로부터 제외시켰다.


먼저 역사적 믿음을 살펴보자.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역사적 사실로 믿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믿음은 그리스 신화 중 어떤 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믿는 것과 형식에 있어서는 차이가 전혀 없다. 그러나 이 믿음은 그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어떠한 영적인 유익을 가져오지 않는다. 대표적인 예로, 귀신도 하나님이 한 분인 줄 알지만 그 믿음은 귀신에게 어떤 유익을 주지 않는다(약 2:19). 이것은 믿음이라고 표현은 되지만 사실 지식과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단지 믿음처럼 보일뿐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믿음이라고 부를 뿐이다.


일시적 믿음은 복음을 진리로 인정할 뿐 아니라 잠시 동안 그 안에서 기쁘고 즐거워하지만 결국 어떠한 열매도 내지 않는 믿음이다(마 13: 22). 심지어 한 번 비췸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자들도 넘어질 수 있다(히 6:4-6). 역사적 믿음과 달리 이것은 지성뿐만이 아니라 감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그 영향이 영구적이지 않고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역사적 믿음과 본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없다. 실제로 적지 않은 신자들이 처음 예수 믿고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하다가 어려운 일을 당하여 낙심이 되면 믿음에서 떠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수련회에서 많은 이들이 은혜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 효력이 실제 생활에서 적용되는 경우가 많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잘 안다. 여기서 우리가 지적해야 할 것은 그러한 경험들이 가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두려워 해야 할 것은 비록 그 경험들이 진짜라 하더라도 그것들이 믿음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은 어떤 놀라운 결과를 일으킨다는 점에서 앞의 두 경우와 다르다. 아무리 작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산을 옮길 수 있다(마 17:20, 고전 13;2). 물론 이 놀라운 힘은 그 믿음을 가진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물론 다른 신을 믿어도 이와 같은 이적을 일으킬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바로의 술객들도 나무 지팡이를 가지고 뱀을 만들 수 있었다. 문제의 핵심은 아무리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을 가졌다고 해서 그 믿음이 구원을 일으키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를 우리는 마태복음 7장에서 “주여, 주여!”하는 자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큰 일을 행하였지만 정작 주님으로부터는 불법을 행하는 자로 정죄를 받았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을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역사적 믿음이나 일시적 믿음, 그리고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을 가진 자들의 믿음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이 믿었던 내용 자체는 사실이었고, 그들이 경험한 기쁨도 거짓이 아니었다. 귀신을 쫓아내거나 병을 고치는 것 자체가 거짓은 아니었다. “주여, 주여!”라고 외친 자들은 심지어 주의 이름으로 그와 같은 능력들을 행하였다. 따라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참이냐 거짓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 것들이 겉으로는 훌륭하고 대단한 믿음처럼 보이고, 믿음이라는 용어로 표현은 되지만 사실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적 믿음은 지식, 일시적 믿음은 열정,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은 능력 혹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라고 불러야 한다. 이것들은 그 자체로 나쁘거나 거짓된 것이 아니다. 심지어 이것들은 잘만 사용되면 진정한 의미에서 믿음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들 자체만으로는 진정한 믿음, 즉 구원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믿음에 대한 여러 가지 혼동을 제거하기 위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작성자들은 형용사를 사용하여 “구원을 일으키는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독립된 항목을 만들었다.


분명한 지식으로서의 믿음


구원을 일으키는 믿음은 참된 지식에 기초해 있다. 따라서 지식에 기초하지 않은 믿음은 맹목이지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지식으로서의 믿음은 무턱대고 무조건 다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식이 없더라도 교회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헌금과 기도와 같은 종교적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 소위 좋은 믿음이 아니다. 더 나아가서 설교 내용에 대한 정확한 이해없이 무조건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종교개혁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해가 없이 믿는 것도 일종의 믿음이라고 생각하였고 이것을 함축적 믿음(implicit faith)라고 불렀다. 그 당시 대부분의 평신도들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무지했기 때문에 성직자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 교회는 평신도들이 교리를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하더라도 그들이 교회를 신뢰하는 한 그것도 믿음이 될 수 있으며 구원을 받는데 충분한 조건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반대로, 개혁가들은 함축적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고 생각하였으며, 믿음을 “굳건하고 확실한 지식”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러나 칼빈이 믿음을 분명한 지식이라고 할 때, 믿음이 완전한 지식을 의미한다고 보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칼빈에 따르면, 믿음에 속한 많은 것들이 우리에게 숨겨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많은 오류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모든 것을 완전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성경에 많은 모호한 구절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이것들 때문에 가장 뛰어난 교사라 할지라도 겸손히 성경을 배우게 된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가지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그들은 여인들의 말을 듣고 무덤에 갔지만 여전히 부활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믿음이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이 참되다고 증거하였기 때문이다.


개혁신학이 함축적 믿음을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다. 물론 함축적 믿음이 초래할 수 있는 로마교회의 오류는 거부하였지만, 이 용어 자체는 거부하지 않았다. 윌리엄 에임스(William Ames, 1576-1633)는 명시적 믿음과 함축적 믿음을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믿음은 부분적으로는 명시적 혹은 구체적이고 부분적으로는 함축적인데, 명시적 믿음은 믿음의 진리들을 구체적이고 개별적으로 믿는 것이고, 함축적 믿음은 공통적인 원리 안에서 믿음의 진리들을 한꺼번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대표적인 성경적 예는 바울 사도가 벨릭스 총독에게 자신이 “율법과 선지자에 기록된 것을 다 믿었다”(행 24: 14)고 고백한 것이다. 즉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참되다고 믿는다면 비록 아직 그 속에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모르더라도 암시적으로 믿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종교개혁가들은 이 함축적 신앙이 선하고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구원을 얻는데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구원을 일으키는 명시적 믿음은 어떤 구체적인 내용을 가지는가? 물론 그 내용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가르침이 믿음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와 같은 성경의 가르침은 확고한 진리이며 신자들은 반드시 이것들이 사실이라고 믿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구원을 일으키는 믿음을 주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은 의로우시다”는 것을 확실히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죄된 모습을 보면서 두려움과 근심에 사로잡혀 의로우신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칼빈은 성경에 있는 내용이라 하더라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지식이야 말로 구원을 일으키는 믿음이라고 보았다. 이 지식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지식”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진 약속의 진실 위에 기초한” 지식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 중 율법이 아니라 은혜의 복음이 신자에게 구원을 일으키는 것이다. 적어도 신자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비록 완벽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복음에 대한 확고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믿음이 지식에 근거한다는 것은 단지 이론적으로 중요할 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실천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 특별히 지식으로서의 믿음은 참된 기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칼빈은 기도를 “믿음의 가장 중요한 실천”으로 정의를 한다. 기도가 믿음의 실천이기 때문에 기도는 철저하게 말씀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이 이유 때문에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기도를 다루면서 주기도문을 상당히 상세하게 해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기도가 철저하게 말씀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기도와 관련하여 종교개혁이 이룬 가장 큰 공헌은 공 예배 시간에 모국어로 기도를 드리게 된 것이다. 로마교회는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가 다른 언어에 비해서 우월하다고 생각하면서 서방교회는 라틴어로 미사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모국어로 예배를 드리면 오히려 예배가 저급해 진다고 주장하였다. 비록 그 기도의 내용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무익한 것은 아니고 오히려 기도 자체가 하나의 신비로서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유익을 준다고 로마교회는 가르쳤다. 반대로 개신교는 이해가 없는 기도는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기 때문에 소리를 내어서 기도를 할 때에는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해야 한다고 고백하였다.


굳건한 확신으로서의 믿음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믿음에 있어서 지식은 필수적이지만 믿음은 단지 지성의 문제만은 아니다. 칼빈은 믿음이 본질적으로 마음의 문제라는 것을 매우 강조한다. 믿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지식이기 때문에 지성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지식으로서의 믿음은 약속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관찰이나 추리에 의해서 얻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약속은 그 약속의 내용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서 “이 복권을 사면 1억의 당첨금을 받는다!”) 약속을 하는 사람이 그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확신이 더욱 중요하다. 확신이 지식과 다른 점은, 지식이 합리적인 증거에 근거한 것이라면 확신은 신적인 진리에 대한 설득에 의해 야기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확신은 우리 안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확신을 하고 싶다고 해서 확신을 할 수 없다. 비록 확신은 우리가 하지만 그 확신의 근거는 우리에게 있지 않기 때문이다. 칼빈은 이 근거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약속이 아니라면 어떤 것도 우리에게 확신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아무리 말씀에 근거한 약속이 믿을 만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그 약속 자체가 우리에게 확신을 주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이 바로 성령의 사역이다. 칼빈은 이것을 성령의 인치심이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오직 말씀에 근거한 이 인치심이야 말로 신자들에게 약속에 대한 절대적 확신을 주신다. 이 점에서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성령님께서 주시는 영구적인 확신과 일시적인 종교적인 분위 속에서 흔히 일어나는 결단과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확신을 믿음의 아주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매김을 하였던 개신교와는 달리 로마교회는 그와 같은 확신을 교만으로 간주하고 거부하였다. 그와 같은 확신은 어떤 특별한 계시를 받은 사람 이외에는 가질 수 없는 특별한 은사라고 보았다. 물론 로마교회 신학자들은 신자들이 어떠한 확신도 가지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거부한 것은 절대적이고 불실不失(absolute and infallible)한 확신이지 도덕적 추측(moral conjecture)에 의한 상대적 확신까지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런 도덕적 추측을 통하여 신자들이 잠시나마 은혜 안에 거한다는 확신을 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 대해서 칼빈은 그들의 주장이 사변에 지나지 않으며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난다고 주장하였다. 칼빈에 따르면, 성령이 주는 확신은 영구적인 확신이며 이 확신으로 인해 양심이 진노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참다운 해방과 자유 그리고 평강을 누린다고 주장하였다.


확신으로서의 믿음은 어떠한 의심도 없는 상태를 말하지 않는다. 믿음과 의심은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지만 믿음과 의심이 서로 공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완벽한 믿음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리 믿음이 강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최소한의 의심이 그 사람 안에 존재한다. 여기서 우리는 참된 믿음/거짓 믿음의 구분과 더불어 강한 믿음/약한 믿음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약한 믿음은 확신이 전혀 없는 상태를 말하지 않는다. 믿음이라는 것은 지식과 더불어 이것에 대한 확신이 필요한데, 이 확신이 전혀 없다면 그것은 아예 믿음이아니라고 해야 한다. 의심이 커지면 확신을 흔들 수는 있으나 확신을 없앨 수는 없다. 의심 중 어떤 것은 확신을 완전히 제거시키고 어떤 것은 약화시키는데, 전자는 약한 믿음과 공존할 수 없으나 후자는 공존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확신과 관련하여 강조하고 싶은 것은 믿음이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약속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의 대상과 관련된 문제이다. 이 믿음의 대상은 기복적 신앙이 만연되어 있는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특별히 강조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약속은 제대로 이해되지 않으면 다음과 같이 논리적으로 쉽게 확장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 →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적인 복도 주신다.” 칼빈은 이러한 어설픈 논리를 거부하면서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말한다.


믿음은 이 세상에서의 장수나, 존귀나 부귀를 확실하게 약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님은 이것들 중 어느 것도 우리를 위해서 지정하기를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확신으로 만족한다: 이 세상의 삶을 유지하는 것과 관련하여 아무리 많은 것들이 우리를 실망시킨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확신과 관련하여 우리의 믿음은 현재가 아니라 장차 올 것과 주로 관련되어 있다. 믿음이 이 세상의 삶과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믿음이 세상적인 좋은 것을 우리에게 보장해 주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서 어려움과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은혜야 말로 우리의 복의 원천이고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거두신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복들은 저주로 바뀌게 된다.


전적인 신뢰: 믿음의 본질


지식과 확신만으로 믿음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믿음을 정말로 믿음이 되게 하는 것은 신뢰이다. 이것 역시 믿음의 지식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지만, 믿음은 역사적 사실이나 공리에 대한 지식이 아니다. 보다 쉽게 표현하자면, 믿음의 지식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죽으셨다”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나를 위해 죽으셨다”에 관한 것이다. 즉 믿음의 지식은 3인칭이 아니라 2인칭이다. 이 지식은 인격적 지식이기 때문에 지성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 더 구체적으로 의지의 문제이다. 믿음은 본질적으로 관계적인 지식이기 때문에 서로 간의 친밀한 교제 없이 획득될 수 없다. 확신을 뛰어 넘어서 신뢰가 믿음에 필수적인 요소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믿음이 본질적으로 의지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믿음과 행위는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믿는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의지의 행위 혹은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활동이 없다면 믿음은 단지 지성적 활동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을 행위라고 규정할 때에는 매우 세밀하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가장 논쟁이 되는 성경구절 중의 하나는 요한복음 6장 29절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work, 행위)이니라.” 이 구절은 종교개혁 당시 로마교회와 개신교회가 “오직 믿음”과 관련하여 논쟁이 치열했던 부분이다. 루터의 대적이었던 존 에크는 이 구절에 근거하여 행위와 믿음은 구분되지 않으며 믿음도 일종의 행위라고 주장하였다. 여기에 대해서 칼빈은 믿음이 일종의 행위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문제의 핵심은 어떤 의미에서 행위냐는 것이었다. 행위도 여러 행위가 있는데, 칼빈이 부정한 것은 행위가 일종의 공로(merit)가 되어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호의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믿음을 행위라고 한다면 그것은 수동적 행위(a passive work)일 뿐이며 이것을 통해 인간이 하나님께 뭔가를 드리는 것이 아니고 단지 받는 행위이며, 하나님이 그것 때문에 뭔가를 상을 주는 것은 더욱 아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은 본질상 의지의 활동으로서 지성의 활동 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활동이다. 지성적 활동만으로 신자로 하여금 어떤 실제적 행위를 하도록 하지는 않지만, 의지는 어떤 식으로든지 그와 같은 행위를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수동적 활동으로서의 믿음과 그 믿음의 실제적 결과인 선행 혹은 순종은 구별해야 할 것이다. 믿음은 반드시 행위를 일으키기만 그렇다고 믿음이 행위는 아니며, 행위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수단은 더욱 아니다. 실제로 우리의 행위가 선행이 되는 이유도 우리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받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따라서 믿음은 철저하게 수단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엄밀히 말해서 우리가 믿었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 이 때문에 벨직 신앙고백서는 믿음의 수단적 그리고 수동적 역할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만약 믿음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믿음과 구원의 관계를 인과관계로 설명하는 순간 우리는 종교개혁가들이 그토록 거부하였던 공로주의의 위험에 빠지게 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믿음은 위대하지만 믿음 자체에 위대함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믿음이 받는 내용, 즉 그리스도에게 위대함이 있다.


믿음은 순종(선행)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서로 동일한 것이 아니듯이 믿음은 또한 사랑과도 구분되어야 한다. 이것은 종교개혁 시대에 개신교와 카톨릭이 서로 격렬하게 논쟁하였던 부분이다. 로마 교회에 있어서 믿음은 미형성된 믿음(fides informis)과 사랑으로 형성된 믿음(fides caritate formata)으로 구분되어서 이해되었다. 이 구분에 따르면 믿음은 단지 지식에 지나지 않고 이 믿음만으로는 죄인을 의롭다하지 못한다. 갈라디아 5장 6절로 볼 때, 믿음은 사랑이 역사해야 참된 믿음이 되고 이 믿음과 더불어 이 사랑에서 나온 행위를 통하여 죄인이 의롭게 된다. 로마교회는 개신교의 오직 믿음을 거부한 근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믿음’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서로 달랐던 것이다. 그들은 ‘오직 믿음’을 사랑이 없는 믿음으로 해석을 한 것이다.


‘오직 믿음’은 사랑이 배제된 믿음을 말하지 않는다. 오직 믿음에서 말하는 믿음은 사랑의 역사로 형성된 믿음이다. 따라서 종교개혁가들은 미형성된 믿음이라는 개념 자체를 거부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카톨릭과 마찬가지로 개신교 역시 믿음과 사랑이 결코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개혁신학은 믿음과 사랑을 동일시 한다든가 믿음의 본질을 사랑이라고 주장한다든가 믿음 속의 사랑이 죄인을 의롭게 한다는 사상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믿음과 사랑은 항상 함께 가지만 칭의의 은혜를 받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해서이다. 칼빈은 “우리는 바울과 함께 사랑을 통해 역사하는 믿음 이외에 어떤 다른 믿음도 의롭게 하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믿음이 칭의의 힘을 사랑의 역사에서 취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믿음은 사랑에 의해서 역사된 믿음이지만 사랑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은 아니며 사랑이 믿음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도 아니다. 로마교회의 구분에 따르면 본질적으로 믿음과 사랑은 구분되지 않는데, 사랑이 믿음의 본질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 종교개혁가들은 사랑이 믿음보다 큰 것은 사실이지만(고전 13장 13절) 그렇다고 해서 믿음이 사랑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믿음을 행위나 사랑이나 지식과 구분하는 본질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서 개혁가들은 “신뢰”라고 답을 하였다. 마치 사고를 당한 사람이 구조대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는 것과 같이 구원을 받기 위해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이 신뢰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모든 영적인 유익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바로 이 신뢰로서의 믿음을 통하여 죄인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며, 그 결과 그리스도 안에 있던 칭의와 성화의 은혜가 죄인에게 전해진다. 이 은혜는 죄인을 의인으로 선언하며 동시에 그 죄인을 중생시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다. 이렇게 변화된 하나님의 자녀는 자신 안에 내주하는 성령의 힘으로 율법을 순종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이 속에 인간의 공로나 행위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을 선포하여 은혜의 은혜됨을 확보하려고 했던 것이 종교개혁의 정신이었다.


결론


이상에 우리는 개혁파 신학이 말하는 진정한 믿음에 관한 핵심적인 이슈들을 살펴보았다. 믿음에 관한 세밀하고 정밀한 신학적 작업을 통하여 개혁신학은 로마교회와 합리주의(소시니안, 알미니안) 속에 자리잡은 잘못된 신앙관을 바로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개혁신학이 말하는 믿음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교리들을 올바로 정리하지 않으면 쉽게 그릇된 길로 갈 수 있고 그것이 교회의 실제적인 역사이기도 하였다. 그럴 때 교회는 복음이 가진 진정한 능력을 상실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이 오늘 한국 개신교회가 처한 상황이 아닌가 생각한다.


먼저 우리는 믿음에 대한 무분별한 용어 사용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 종교개혁시대와 마찬가지로 믿음이 아니거나 믿음과 비슷한 것을 믿음이라고 부름으로 인해 많은 혼란이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오직 믿음”에서 말하는 믿음은 무엇보다 “오직 (구원을 일으키는) 믿음”이다. 또한 이 믿음은 “오직 (사랑이 역사하는) 믿음”이고 “오직 (성령이 인치신) 믿음”이며, 따라서 “오직 (선행을 일으키는) 믿음”이다. 그리고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오직 이 믿음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모든 은덕들(칭의, 성화, 영화)을 받을 수 있다. 이 믿음은 무엇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하심, 즉 복음에 관한 것이다. 믿음은 복음에 대한 ‘분명한 지식,’ 복음이 제시하는 약속에 대한 ‘굳은 확신,’ 그리고 이 약속을 하시는 분에 대한 ‘철저한 의지’를 의미한다.


믿음을 이렇게 바로 이해할 때, 우리는 ‘오직 믿음’과 관련된 여러 가지 오해들을 쉽게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이신칭의의 교리가 성도로 하여금 윤리적 나태나 복음 전도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진다는 비판은 ‘오직 믿음’에서 ‘오직’만 보고 ‘믿음’의 성격에 대해서는 충분히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것을 발전시키자면 “오직 믿음”은 “오직 (전도하는) 믿음”이라고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야고보가 말했을 때, 이 믿음은 믿음이라고 부르지만 믿음이 아니라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결국 한국 교회가 보다 고민해야 할 문제는 행함에 관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행함은 믿음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행함을 강조한다고 해서 성도들이 선행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거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을 일으키기 위해서 무엇보다 강단에서 복음이 선포되어야 한다. 믿음은 두루뭉술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지식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생명력을 잃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설교 안에 여러 가지 비복음적인 요소들이 많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성도들을 즐겁게 하고 감동과 놀라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들은 구원에 이르는 신앙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결국 강단에서 복음을 분명히 선포하고, 설교를 통해서 복음에 대한 확신을 주고 그리하여 자신의 전 삶을 주님께 드리도록 하는 것이 생명력을 잃어가는 한국교회의 말씀의 사역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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