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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09 16:31

루터의 노예의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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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터의 노예의지론 ("목회와 신학", 1992. 8월호)

 

성기호 / 성결신학대학교 총장

 

. 들머리

 

인간의 자유의지는 죄와 사탄에게 예속되어있으므로 구원을 위한 아무런 작용도 할 수 없다는 루터의 주장을 반박하여 당시의 인문학자며 최고 지성을 대표하는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of Rotterdam)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 ; The Diatribe or Discourse on the Freedom of the Will)1524년에 출간하였다.

 

루터는 그의 친구인 케테(K3the)의 권면으로 에라스무스에게 반박하는 논문인 "노예의지론(De servo arbitrio ; On the Bondadge the Will)"을 쓰게 되었다. 에라스무스의 박식함에 대처하기 위하여 라틴어로 쓰여진 이 논문은 1525년에 발간되었는데, 루터가 쓴 논문가운데 그 내용이나 방대함에서 중요한 논문에 속한다.

 

독일 남부에서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의 '눈먼 자아의지(blind self-will)'를 비판하던 날카로운 공개서한이나 팜플렛에 비해 노예의지론은 한층 논리적으로 정리되었고 인간의지의 죄로의 속박을 진술하고 있다. 이 논문에서 루터는 인간의 본성, 숨겨진 하나님, 계시된 하나님, 신앙과 은혜의 중요성, 율법과 복음의 관계 등 중요한 교리적 문제들을 취급하고 있다.

 

. 기독자의 자유

 

인간의 자유의지와는 별개로 루터는 기독자의자유(Christian Liberty)를 취급하고 있다. 기독자의 자유란 자유의지의 선택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에게 주신 신학적, 영적 자유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는 죄에서 해방되고 장차 올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않는 영적 상태를 의미한다. 이 자유는 정치적이거나 육체적인 자유가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의 약하고 썩어 질 육체가 영광스럽고 강한 그리고 썩지 아니할 몸을 입게될 최종의 자유까지를 포함한다.

 

신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를 얻었음으로 누구도 그 자신의 동의없이 신자의 자유를 권력이 법률로 강제하거나 속박할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교황이나 감독이 행하는 규제에 반대하는 근거를 삼는다.

 

신자가 착고에 채워져 감옥에 던져진다 하여도 감옥이나 교황이 기독자의 자유를 속박할 수 없음은 이 자유가 육적이거나 외적인 자유가 아니라 신앙으로 얻는 영적인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적인 압박, 즉 감옥, 고문, 유혹, 두려움 등이 기독자의 자유를 뺏지 못하고 오히려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가게하는 도움이 될 뿐이라고 한다.

 

신자가 병들고 죽어 무덤에 들어가는 등 속박을 받으나 기독자의 자유란 양심의 자유, 은혜로 얻는 의인(義認)인 까닭에 율법이나 세상의 일에 매이지 아니하는 자유라 한다. 그러나 이 자유는 인간의 의지가 선과 악을 선택하여 실행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자유와는 구별되는 영적인 내적 자유를 의미한다.

 

. 자유의지와 노예의지

 

루터에게 있어서 자유의지(Free Will)라는 말은 신적인 용어(divine term)로 인간에게 쓰여질 말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만 해당되는 말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만 자기가 원하시는 일을 행하실 수 있고 선택할 능력이 있다는 의미에서 자유의지를 소유하신다고 한다. 만일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신성(divinity of God)도 부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신성모독적인 발상이라고 반박한다. 아담의 타락이후에도 인간에게 이성(理性, reason)이 있어서 다른 동물과 구별되며, 이 이성의 능력은 인간에게 매우 훌륭한 능력임에 틀림없으나 이 이성적 능력이 인간 구원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인간의지의 전적 무능력(total incapability)을 루터는 주장한다. 이와같이 루터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철저히 부정한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의지나 마귀의 의지에 지배되는 노예의지(奴隸意志, servo arbitrio)일뿐 인간 스스로자기의 의지를 지배할 수 있는 자유는 아니라고 한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실 때는 인간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를 자원하여 선을 행하게 되나, 우리가 이세상 신의 지배 아래 있게 되면 하나님의 역사나 성령의 감화에서는 멀어져 마귀의 원하는 일을 행하고 죄를 짓게 되는 예속된 의지를 소유할 뿐이라 한다.

 

루터는 인간의지의 예속화 현상을 설명하기를 짐승을 타는 이가 짐승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의 의지대로 인도함같이 인간의지는 하나님의 의지나 마귀의 의지에 복속(服屬)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인간의 의지에 관하여 말할 때 그것은 하나님과 마귀 사이에 서있어 짐을 지는 짐승과 같아서 하나님이나 마귀가 그 짐승을 올라타거나 '소유'하거나 '' 수 있어서 짐승은 복종하지 않으면 안된다(Of the human will, which stands like a beast of burden between God and the devil ; either can mount, and 'possess' or 'ride' it ; it has to obey.).

 

타락한 인간의 의지는 자기 스스로 결정하여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못하고, 오직 중성적 작용밖에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든 마귀든 초자연적 힘에 대항할 능력이 인간에게 없으며 연약한 도구에 불과한 것이 인간의 의지라 한다.

 

. 인간의지와 구원

 

루터는 말하기를 만일 자기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진다 해도 구원에 이르는 길에 놓여있는 수많은 장애물과 위험, 특히 마귀의 방해를 이길 능력이 없기 때문에 구원의 길을 갈 수 없을 것이라 한다. 따라서 구원을 얻으려는 인간의 노력은 허공을 치는 주먹과 같이 한갓 헛된 수고가 될 뿐이라 보는 것이다.

 

구원을 얻으려는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고 이 구원은 하나님의 은하로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을 강조한다. 만일 구원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라면 마귀의 강력한 반대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인간은 없을 것이며 다만 모두가 멸망에 이르게 되었을 것이라 한다. "에라스무스 인간의 의지는 영원한 구원을 얻는데 유용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며 자유의지의 선용 가능성을 주장한다. 이에 비하여 루터는 인간이 타락한 후 인간의 의지도 타락하여 자유의지라는 말은 이름만 남아있고 오직 죄를 짓는 경향성만 있어서 필연적으로 죄를 짓게 되니 스스로 구원에 이르게 될 아무런 능력도 없다고 한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의지란 의를 이루는 일에나 구원을 얻는데 가장 큰 적이 될 뿐이라고 한다."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죄의 영향 아래 있게 되고 정죄에 이르게 되었고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타락한 의지를 가지고 출생함으로 죄를 짓고 정죄 받을 일을 행하는 외에 선한 선택을 할 수 없는 노예의지를 가지고 있을 뿐이라 한다. 하나님의 감화를 받지 못하는 자연인의 자유의지는 사탄의 지배영역(Free will in man is the realm of Satan)이 라는 루터의 표현은 인간의지의 죄로 향하는 이러한 경향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말씀에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30:15, 19)라고 명하신 것은 인간에게 선을 선택할 능력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선택하여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보이기 위한 말씀일 뿐이라고 해석한다. 구약에서 명령하고 교훈하는 바가 인간의 능력으로 실천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보이는데 목적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루터의 주장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드러내고 은혜로만(sola gratia) 구원받을 수 있음을 주장하려는 데서 연유한 것을 감안한다 해도 인간이 실천할 능력이 전혀 없다. 그런데도 실천 불가능한 명령을 내리시는 하나님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게 하는 루터의 해석에 동의하기 어렵다.

 

루터는 인간의 무능력에 대하여 말하기를 인간의 행위나 공로가 자기 구원에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기에 구원에 행위는 무용지물이라 한다. 하나님만이 인간의 구원을 이루실수 있는데, 인간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율법이나 율법의 행위에서 멀리 떠나 있는 것 같이 인간의 의지나 선택으로부터도 멀리 떠나있다 한다.

 

V. 하나님의 예지와 예정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구원하시고 무슨 일을 행하실 것인가에 대해 미리 아시고(예지(豫知, foreknowedge) 그일이 그렇게 이루어지도록 예정(豫定, predestine)하신다. 하나님의 예지(freknowedge)가 예정의 기초이지만 이는 어떤 조건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며 무오(戊午)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되어질 뿐이라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만이 자유의지를 소유하시는 것이라 한다.

 

하나님께서 유다의 배반을 예지 하셨다는 것은 그가 필연적으로 배반할 것을 의미하며 예지 된 사람이나 피조물이 자기 뜻으로 하나님의 예지나 예정을 변경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루터는 주장한다. 즉 하나님께서 예지하신 일은 필연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그러나 유다가 배반하는 일이 하나님의 예지나 강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기 의지로 선택하여 배반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이 루터의 해석이다. 예지하신 일이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에 신실성을 부여하게 하며 인간의지의 작용이나 인간의 자유선택이 불가능함을 보이는 것이라 한다.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예지하시고 이일이 이루어지도록 예정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absolute sovereignty)에 속하는 일이며 인간의 이해가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다. 인간이 알 수도 없고 알려고 해서도 안되는 부분은 하나님의 위엄과 성품에 위임할 문제일 뿐이라 한다.

 

이렇게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을 루터는 숨겨진 하나님(Deus Absconditus, the Hidden God)이라 부르며 디모데전서 616절에 기록된 대로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자"로 인식한다.

 

영원한 생명이나 하나님의 예정에 관한 문제 등은 인간에게 감추어져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일이라 한다. 이사야 644절을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29절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였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고 인용한 것같이 숨겨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부분이라 한다.

 

하나님의 특성 중에 숨겨진 부분도 있지만 성육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계시하시고 성경을 통해 소개된 하나님을 루터는 계시된 하나님(Deus Revelatus, the Revealed God)이라 부른다. 계시된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을 계획하시고 육체를 입으신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완성하셨다. 자기의 무가치성을 인정하고 죄인임을 자백하는 겸손한 사람에게 회개와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은 복음에 계시된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 은혜의 역사를 행하실 때 인간의 노예의지는 변화를 받아 구원과 선을 소원하며 이 구원을 얻기 위해 작용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되는 것이라고 한다. 구원은 인간존재 내부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밖에 계신 분 즉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주어지는 것이라 한다.

 

구원과 생명에 관한 일은 인간에게 알려지지 않은 부분으로 숨겨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인데 성령의 조명을 통해 인간에게 구원의 길이 제시된다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이루신 구원을 죄인에게 적용할 때 인간은 자기 자신이 무가치한 죄인임을 깨닫게 되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속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210절에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 라도 통달하시느니라." 한 것이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나타내는 것이다.

 

. 구원을 위한 율법과 복음의 역활

 

율법과 구약은 죄인에게 공의의 심판을 행하시며 정죄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냄으로 죄인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한편 복음과 신약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제시한다. 인간의 자연적 이성은 자신이 죄인됨과 구원의 필요성도 깨달을 수 없을 정도로 무력하나 율법과 복음의 반복적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율법은 인간의 죄를 지적하고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3:20)한 것같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한다. 죄인을 정죄하고 인간의 무능력을 단언하는 것이 율법이 하는 역할이다. 복음은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는 자를 위로하며 그리스도안에 있는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적용한다.

 

율법과 복음의 계속적인 작용 가운데 인간은 자기의 무가치성과 무능력을 깨닫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죄와 마귀로부터 해방된 인간의 의지는 죄의 경향성과 투쟁하게 되나 성령의 역사를 통해 급진적 변화를 이루어 하나님께서 의롭게 보시는 새사람으로 태어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벧전 5:5) 하신대로 자기 능력의 한계를 깨닫고 구원이 자기의 힘이나 방책, 인간적 노력이나 선행 등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겸손히 고백하는 자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다. 루터는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지의 무능력을 강조하며 구원의 피동성을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인간에게 속했던 죄와 정죄는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께 전가(轉嫁, imputation)된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의(, righteousness)와 영원한 생명이 회개하는 죄인에게 전가된다. 하나님께만 구원이 있는 줄 깨닫고 인간이 자기를 부정하며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 인간의 죄와 그리스도의 의가 교환되는 '행복한 교환(frohlich Wechsel)'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자와 그리스도는 신부와 신랑이 그들의 소유를 공유(共有)함 같이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용서와 의인(義認), 기독자의 자유를 얻게 된다.

 

. 은층과 구원

 

에라스무스나 루터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구원에 선행되는 요소로 본 점에서는 동일하다. 에라스무스는 하나님의 은총을 구원의 제일 원인(primary cause)으로 보고 이에 응답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구원의 제2원인(secondary cause)이라 주장한다. 한편 루터는 인간의지의 무능력을 전제로 하여 구원사역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것이며 인간에게 베푸시는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설명한다.

 

루터는 요한복음 155절의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그리스도 밖에서 인간능력의 무가치성과 자유의지의 무능력을 강조한다. '아무 것도'라는 말은 도덕적 선행을 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고 자기 구원을 위해 완전한 종교적 선행을 이를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에라스무스에게 있어서 인간의지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총에 응답하고 협력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구원을 받고 못 받는 일은 그 책임이 자유의지를 구원을 위해 선용하거나 하지 못한 인간 편에 있게된다. 즉 구원의 책임을 하나님께 두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책임에 귀착시킴으로서 인간의 의지와 협력을 강조한다. 펠라기우스는 손상되지 않은 자유의지를 소유하고 있는 인간이 하나님의 은총이 없이도 자기의 선택으로 자기의 구원을 성취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서 이단으로 정죄를 받게 되었다. 에라스무스는 펠라기우스와는 달리 하나님의 은총이 배제된 인간의 구원을 반대하였다는 점에서 루터와 일치한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구원의 길을 선택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협력하였다고 해서 인간의 공로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에라스무스의 입장이다. 즉 자유의지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물이기 때문이다.

 

에라스무스는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선행은총은 모든 인간에게 꼭 같이 주어진다고 보았으나 루터는 죄된 인간 의지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도록 변화되는 신앙마저 하나님의 예정에 근거한다는 운명론적인 주장을 한다. 루터의 이러한 과격한 주장에 대하여 요한 웨슬리도 반박을 하며 하나님의 구원이 절대적으로 예정되어 있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소원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에 배반되는 주장이며 하나님의 구원은총 자체에 대한 위협이며 신성 모독적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 마무리

 

인간의지가 자신의 구원에 아무런 쓸모가 없고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하는 루터의 주장은 수도원 생활을 통해 경험한 자신의 체험과 성경을 통한 신학적 이해에 근거를 둔다. 수도원에서 종교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기도와 금식 등 노력을 기울였으나 구원의 확신은커녕 죄책감만 더해갈 뿐이었고 한없는 번민과 불안을 느끼게 되었던 경험에서 루터는 인간의 행위와 의지가 구원에 무익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마치 눈먼 말이 반대방향으로 줄달음질 치듯이 죄된 욕망이 자기를 사로잡아 원치않는 곳으로 끌어감을 체험했다. 이러한 무력감과 죄책감이 인간행위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확신을 루터에게 안겨주었다. "구원을 인간의 자유의지에 맡기는 것은 위험한 것으로 여겨 자유의지의 존재 마저 부정하고 인간에게 있는 의지는 오직 죄와 마귀에게 예속되어 죄를 필연적으로 지을 수밖에 없는 노예의지뿐이라고 주장한다. 루터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자기 주장으로 인해 일어날 위험은 보지 못한 것 같다. 인간의 선택이나 의지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하는 루터의 주장은 인간의 도덕적 책임감 내지 구령의 열심을 감소시킨다. 또한 신앙을 택하기 위하여 인간의 이성(理性)을 부정해야 될 것처럼 느끼게 하는 이율배반을 가져온다.

 

신앙과 지식 사이에 모순이 없고 계시와 이성 사이에도 배반됨이 없는데 루터는 이를 상반되는 개념으로 소개함으로 신앙생활에 부정적 영향을 가져오게 한다. 그러나 구원이 인간의 노력이나 선행에 기인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sola gratia)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의 언약을 믿음으로(sola fide) 이루어진다고 주장함으로 로마 가톨릭의 행위의인(行爲義認, work-righteousness) 주장에서 탈피한 것은 루터의 공로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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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ichard Faiendenthal, br. by John Nowell, Luther : His Life and Times(New York : A Helen and Kurt Wolff Book. 1970) p. 450.

 

2. Ewald M. Plass, comp., What Luther Says : An Anthology(Saint Louis. MO : Concordia Pub. House, 1956). vol., p. 776.

 

3. Milton C. Oswald, ed., Luther's Works vol. 19 : :ectures on the Minor Prophets H, Jonah, Habakkuk(Saint Louis : Concordia Pub. House, 1974. pp. 68, 70.

 

4. Plass, What Luther Says, p. 777

 

5. Jaroslav Pelikan, ed., Luther's Works. vol 27 : Lectures on Galatians 1535(Saint Louis : Concordia Pub. House, 1964), pp. 346-348.

 

6. E. Cordon Rupp & Philip W. Waston eds., Luther and Erasmus : Free Will and Salvation(Philadelphia : Westminster press. 1969), pp. 141, 170.

 

7. Hugh T. Kerr, A Compend of Luther's Theology(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74), p. 88.

 

8. Rupp, Luther and Erasmus, p. 140.

 

9. Friendenthal, Luther, p.450.

 

10. Rupp, Luther and Erasmus, p. 450.

 

11. Albert Hyam, Luther's Theological Development from Erfurt to Ausburg(New York : F.S. Croffs & Co.,1928), pp. 176, 177.

 

12. Rupp, , Luther and Erasmus, p.296. Free choice is nothing else but the supreme enemy of righteousness. and man's salvation

 

13. Heiko A. Obermand, Luther, Man between God and the Devil(New York Yale Univ. Press, 1982), pp. 212-213.

 

14. Ibid., pp. 189-191.

 

IS. Rupp, Luther and Erasmus, p.260.

 

16. Ibid., p. 313.

 

17. Ibid., p. 307.

 

18. Ibid., p. 248.

 

19. Ibid., p. 240.

 

20. Ibid., p. 244.

 

21. Ibid., p. 206.

 

22.'Ibid., p. 172.

 

23. Ibid., p. 200-201

 

24. Ibid., p. 190.

 

25. Ibid., p. 185.

 

26. Ibid., p. 196, 211

 

27. Ibid. p. 137.

 

28. Brian A. Gerrlch, "Atonement and Saving Faith", Theology Today17(1960), p. 182.

 

29. Rupp, Luther and Erasmus, p. 212.

 

30. Ibid., p. 281.

 

31. Friendenthal, Luther, p. 31.

 

성기호/서울대 상대와 성결교신학교를 졸업했으며, 드루대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뉴저지 한인 교회와 로워박스 한인교회에서 목회했으며, 지금은 성결교신학대학교 총장으로 있다.

 

https://mylord.kr/m/490?category=75634

 

루터의 노예의지론

 

성기호 / 성결신학대학교 총장 . 들머리 인간의 자유의지는 죄와 사탄에게 예속되어있으므로 구원을 위한 아무런 작용도 할 수 없다는 루터의 주장을 반박하여 당시의 인문학자며 최고 지성을 대표하는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of Rotterdam)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 ; The Diatribe or Discourse on the Freedom of the Will)1524년에 출간하였다. 루터는 그의 친구인 케테(K3the)의 권면으로 에라스무스에게 반박하는 논문인 "노예의지론(De...

 

mylord.kr

 

인간의 자유의지는 죄와 사탄에게 예속되어 있으므로 구원을 위한 아무런 작용도 할 수 없다는 루터의 주장을 반박하여 당시의 인문학자이며 최고 지성을 대표하는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of Rotterdam)"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 The Diatribe or Discourse on the Freedom of the Will)"1524년에 출간하였다.

 

루터는 그의 친구인 케테(K the)의 권면으로 에라스무스에게 반박하는 논문인 "노예의지론(De servo arbitrio; On the Bondadge of the Will)"을 쓰게 되었다. 에라스무스의 박식함에 대처하기 위하여 라틴어로 쓰여진 이 논문은 1525년에 발간되었는데, 루터가 쓴 논문 가운데 그 내용이나 방대함에서 중요한 논문에 속한다.[Richard Faiendenthal, tr. by John Nowell, Luther: His Life and Times (New York: A Helen and Kurt Wolff Book, 1970), 450.]

 

독일 남부에서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의 `눈먼 자아의지‘(blind self will)를 비판하던 날카로운 공개서한이나 팜플렛에 비해 노예의지론은 한층 논리적으로 정리되었고 인간의지의 죄로의 속박을 진술하고 있다. 이 논문에서 루터는 인간의 본성, 숨겨진 하나님, 계시된 하나님, 신앙과 은혜의 중요성, 율법과 복음의 관계 등 중요한 교리적 문제들을 취급하고 있다.

 

1. 기독자의 자유

 

인간의 자유의지와는 별개로 루터는 기독자의 자유(Christian Liberty)를 취급하고 있다. 기독자의 자유란 자유의지의 선택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에게 주신 신학적, 영적 자유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는 죄에서 해방되고 장차 올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않는 영적 상태를 의미한다. 이 자유는 정치적이거나 육체적인 자유가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의 약하고 썩어질 육체가 영광스럽고 강한 그리고 썩지 아니할 몸을 입게 될 최종의 자유까지를 포함한다.

 

신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를 얻었음으로 누구도 그 자신의 동의없이 신자의 자유를 권력이 법률로 강제하거나 속박할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교황이나 감독이 행하는 규제에 반대하는 근거를 삼는다.

 

신자가 착고에 채워져 감옥에 던져진다 하여도 감옥이나 교황이 기독자의 자유를 속박할 수 없음은 이 자유가 육적이거나 외적인 자유가 아니라 신앙으로 얻는 영적인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적인 압박, 즉 감옥, 고문, 유혹, 두려움 등이 기독자의 자유를 뺏지 못하고 오히려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가게 하는 도움이 될 뿐이라고 한다.

 

신자가 병들고 죽어 무덤에 들어가는 등 속박을 받으나 기독자의 자유란 양심의 자유, 은혜로 얻는 의인(義認)인 까닭에 율법이나 세상의 일에 매이지 아니하는 자유라 한다. 그러나 이 자유는 인간의 의지가 선과 악을 선택하여 실행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자유와는 구별되는 영적이고 내적 자유를 의미한다.

 

2. 자유의지와 노예의지

 

루터에게 있어서 자유의지(Free Will)라는 말은 신적인 용어(divine term)로 인간에게 쓰여질 말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만 해당되는 말이라고 한다. ) 하나님께서만 자기가 원하시는 일을 행하실 수 있고 선택할 능력이 있다는 의미에서 자유의지를 소유한다고 한다.

 

만일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신성(divinity of God)도 부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신성 모독적인 발상이라고 반박한다. ) 아담의 타락 이후에도 인간에게 이성(理性, reason)이 있어서 다른 동물과 구별되며, 이 이성의 능력은 인간에게 매우 훌륭한 능력임에 틀림없으나 이 이성적 능력이 인간 구원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인간의지의 전적 무능력(total incapability)을 루터는 주장한다. 이와 같이 루터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철저히 부정한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의지나 마귀의 의지에 지배되는 노예의지(奴隸意志, servo arbitrio)일 뿐 인간 스스로 자기의 의지를 지배할 수 있는 자유는 아니라고 한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실 때는 인간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를 자원?선을 행하게 되나, 우리가 이 세상 신의 지배 아래 있게 되면 하나님의 역사나 성령의 감화에서는 멀어져 마귀의 원하는 일을 행하고 죄를 짓게 되는 예속된 의지를 소유할 뿐이라 한다.

 

루터는 인간의지의 예속화 현상을 설명하기를 짐승을 타는 이가 짐승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의 의지대로 인도함같이 인간의지는 하나님의 의지나 마귀의 의지에 복속(服屬)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인간의 의지에 관하여 말할 때 그것은 하나님과 마귀 사이에 서 있어 짐을 지는 짐승과 같아서 하나님이나 마귀가 그 짐승을 올라타거나 `소유'하거나 `'수 있어서 짐승은 복종하지 않으면 안된다.”(Of the human will, which stands like a beast of burden between God and the devil; either can mount, and `possess' or `ride' it; it has to obey.)

 

타락한 인간의 의지는 자기 스스로 결정하여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못하고, 오직 중성적 작용밖에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든 마귀든 초자연적 힘에 대항할 능력이 인간에게 없으며 연약한 도구에 불과한 것이 인간의 의지라 한다.

 

3. 인간의지와 구원

 

루터는 말하기를 만일 자기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진다 해도 구원에 이르는 길에 놓여 있는 수많은 장애물과 위험, 특히 마귀의 방해를 이길 능력이 없기 때문에 구원의 길을 갈 수 없을 것이라 한다. 따라서 구원을 얻으려는 인간의 노력은 허공을 치는 주먹과 같이 한갓 헛된 수고가 될 뿐이라 보는 것이다.

 

구원을 얻으려는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고 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을 강조한다. 만일 구원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라면 마귀의 강력한 반대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인간은 없을 것이며 다만 모두가 멸망에 이르게 되었을 것이라 한다.

 

한편 에라스무스가 주장하는 바 인간의 의지는 영원한 구원을 얻는데 유용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며 자유의지의 선용 가능성을 주장한다. 이에 비하여 루터는 인간이 타락한 후 인간의 의지도 타락하여 자유의지라는 말은 이름만 남아있고 오직 죄를 짓는 경향성만 있어서 필연적으로 죄를 짓게 되니 스스로 구원에 이르게 될 아무런 능력도 없다고 한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의지란 의를 이루는 일에나 구원을 얻는데 가장 큰 적이 될 뿐이라고 한다.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죄의 영향 아래 있게 되고 정죄에 이르게 되었고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타락한 의지를 가지고 출생함으로 죄를 짓고 정죄받을 일을 행하는 외에 선한 선택을 할 수 없는 노예의지를 가지고 있을 뿐이라 한다. 하나님의 감화를 받지 못하는 자연인의 자유의지는 사탄의 지배영역(Free will in man is the realm of Satan)이라는 루터의 표현은 인간의지의 죄로 향하는 이러한 경향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말씀에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30:15, 19)라고 명하신 것은 인간에게 선을 선택할 능력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선택하여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보이기 위한 말씀일 뿐이라고 해석한다. 구약에서 명령하고 교훈하는 바가 인간의 능력으로 실천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보이는데 목적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루터의 주장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드러내고 은혜로만(sola gratia) 구원받을 수 있음을 주장하려는 데서 연유한 것을 감안한다 해도 인간이 실천할 능력이 전혀 없다면 실천 불가능한 명령을 내리시는 하나님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게 하는 루터의 해석을 동의하기 어렵다.

 

루터는 인간의 무능력에 대하여 말하기를 인간의 행위나 공로가 자기 구원에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기에 구원에 행위는 무용지물이라 한다.) 하나님만이 인간의 구원을 이루실 수 있는데, 인간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율법이나 율법의 행위에서 멀리 떠나 있는 것 같이 인간의 의지나 선택으로부터도 멀리 떠나 있다 한다.

 

4. 하나님의 예지와 예정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구원하시고 무슨 일을 행하실 것인가에 대해 미리 아시고(豫知, foreknows) 그일이 그렇게 이루어지도록 예정(豫定, predestine)하신다. 하나님의 예지(foreknowle-dge)가 예정의 기초이지만 이는 어떤 조건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며 무오(無誤)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되어질 뿐이라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만이 자유의지를 소유하시는 것이라 한다.

 

하나님께서 유다의 배반을 예지하셨다는 것은 그가 필연적으로 배반할 것을 의미하며 예지된 사람이나 피조물이 자기 뜻으로 하나님의 의지나 예정을 변경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루터는 주장한다. 즉 하나님께서 예지하신 일은 필연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그러나 유다가 배반하는 일이 하나님의 예지나 강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기 의지로 선택하여 배반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이 루터의 해석이다.) 예지하신 일이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에 신실성을 부여하게 하며 인간의지의 작용이나 인간의 자유선택이 불가능함을 보이는 것이라 한다.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예지하시고 이 일이 이루어지도록 예정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absolute sovereignty)에 속하는 일이며 인간의 이해가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다. 인간이 알 수도 없고 알려고 해서도 안 되는 부분은 하나님의 위엄과 성품에 위임할 문제일 뿐이라 한다.

 

이렇게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을 루터는 숨겨진 하나님(Deus Absconditus, the Hidden God)이라 부르며 디모데전서 616절에 기록된 대로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자"로 인식한다.

 

영원한 생명이나 하나님의 예정에 관한 문제 등은 인간에게 감추어져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일이라 한다. 이사야 644절을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29절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였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고 인용한 것같이 숨겨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부분이라 한다.

 

하나님의 특성 중에 숨겨진 부분도 있지만 성육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계시하시고 성경을 통해 소개된 하나님을 루터는 계시된 하나님(Deus Revelatus, the Revealed God)이라 부른다. 계시된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을 계획하시고 육체를 입으신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완성하셨다. 자기의 무가치성을 인정하고 죄인임을 자백하는 겸손한 사람에게 회개와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은 복음에 계시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 은혜의 역사를 행하실 때 인간의 노예의지는 변화를 받아 구원과 선을 소원하며 이 구원을 얻기 위해 작용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구원은 인간존재 내부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밖에 계신 분 즉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주어지는 것이라 한다.

 

구원과 생명에 관한 일은 인간에게 알려지지 않은 부분으로 숨겨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인데 성령의 조명을 통해 인간에게 구원의 길이 제시된다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이루신 구원을 죄인에게 적용할 때 인간은 자기 자신이 무가치한 죄인임을 깨닫게 되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속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210절에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한 것이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나타내는 것이다.

 

5. 구원을 위한 율법과 복음의 역할

 

율법과 구약은 죄인에게 공의의 심판을 행하시며 정죄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냄으로 죄인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한편 복음과 신약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제시한다. 인간의 자연적 이성은 자신이 죄인됨과 구원의 필요성도 깨달을 수 없을 정도로 무력하나 율법과 복음의 반복적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율법은 인간의 죄를 지적하고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3:20)한 것같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한다. 죄인을 정죄하고 인간의 무능력을 단언하는 것이 율법이 하는 역할이다. 복음은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는 자를 위로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적용한다.

 

율법과 복음의 계속적인 작용 가운데 인간은 자기의 무가치성과 무능력을 깨닫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죄와 마귀로부터 해방된 인간의 의지는 죄의 경향성과 투쟁하게 되나 성령의 역사를 통해 급진적 변화를 이루어 하나님께서 의롭게 보시는 새사람으로 태어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벧전 5:5) 하신대로 자기 능력의 한계를 깨닫고 구원이 자기의 힘이나 방책, 인간적 노력이나 선행 등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겸손히 고백하는 자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다. 루터는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지의 무능력을 강조하며 구원의 피동성을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인간에게 속했던 죄와 정죄는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께 전가(轉嫁, imputation)된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의(, righteousness)와 영원한 생명이 회개하는 죄인에게 전가된다.

 

하나님께만 구원이 있는 줄 깨닫고 인간이 자기를 부정하며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 인간의 죄와 그리스도의 의가 교환되는 `행복한 교환'(frohlich Wechsel)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자와 그리스도는 신부와 신랑이 그들의 소유를 공유(共有)함 같이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용서와 의인(義認), 기독자의 자유를 얻게 된다.

 

6. 은총과 구원

 

에라스무스나 루터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구원에 선행되는 요소로 본 점에서는 동일하다. 에라스무스는 하나님의 은총을 구원의 제일 원인(primary cause)으로 보고 이에 응답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구원의 제2원인(secondary cause)이라 주장한다. 한편 루터는 인간의지의 무능력을 전제로 하여 구원사역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것이며 인간에게 베푸시는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설명한다.

 

루터는 요한복음 155절의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그리스도 밖에서 인간 능력의 무가치성과 자유의지의 무능력을 강조한다. `아무것도'라는 말은 도덕적 선행을 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고 자기 구원을 위해 완전한 종교적 선행을 이룰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에라스무스에게 있어서 인간의지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총에 응답하고 협력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구원을 받고 못 받는 일은 그 책임이 자유의지를 구원을 위해 선용하거나 하지 못한 인간 편에 있게 된다. 즉 구원의 책임을 하나님께 두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책임에 귀착시킴으로서 인간의 의지와 협력을 강조한다.

 

펠라기우스는 손상되지 않은 자유의지를 소유하고 있는 인간이 하나님의 은총이 없이도 자기의 선택으로 자기의 구원을 성취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서 이단으로 정죄를 받게 되었다. 에라스무스는 펠라기우스와는 달리 하나님의 은총이 배제된 인간의 구원을 반대하였다는 점에서 루터와 일치한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구원의 길을 선택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협력하였다고 해서 인간의 공로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에라스무스의 입장이다. 즉 자유의지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물이기 때문이다.

 

에라스무스는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선행은총은 모든 인간에게 꼭 같이 주어진다고 보았으나 루터는 죄된 인간 의지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도록 변화되는 신앙마저 하나님의 예정에 근거한다는 운명론적인 주장을 한다. 루터의 이러한 과격한 주장에 대하여 요한 웨슬리도 반박을 하며 하나님의 구원이 절대적으로 예정되어 있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소원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에 배반되는 주장이며 하나님의 구원은총 자체에 대한 위협이며 신성모독적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7. 맺는 말

 

인간의지가 자신의 구원에 아무런 쓸모가 없고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하는 루터의 주장은 수도원 생활을 통해 경험한 자신의 체험과 성경을 통한 신학적 이해에 근거를 둔다. 수도원에서 종교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기도와 금식 등 노력을 기울였으나 구원의 확신은 커녕 죄책감만 더해갈 뿐이었고 한없는 번민과 불안을 느끼게 되었던 경험에서 루터는 인간의 행위와 의지가 구원에 무익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마치 눈먼 말이 반대방향으로 줄달음질치듯이 죄된 욕망이 자기를 사로잡아 원치 않는 곳으로 끌어감을 체험했다. 이러한 무력감과 죄책감이 인간행위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확신을 루터에게 안겨주었다.

 

구원을 인간의 자유의지에 맡기는 것은 위험한 것으로 여겨 자유의지의 존재마저 부정하고 인간에게 있는 의지는 오직 죄와 마귀에게 예속되어 죄를 필연적으로 지을 수밖에 없는 노예의지 뿐이라고 주장한다. 루터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자기주장으로 인해 일어날 위험은 보지 못한 것 같다.

 

인간의 선택이나 의지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하는 루터의 주장은 인간의 도덕적 책임감 내지 구령(救靈)의 열심을 감소시킨다. 또한 신앙을 택하기 위하여 인간의 이성(理性)을 부정해야 될 것처럼 느끼게 하는 이율배반을 가져온다.

 

신앙과 지식 사이에 모순이 없고 계시와 이성 사이에도 배반됨이 없는데 루터는 이를 상반되는 개념으로 소개함으로 신앙생활에 부정적 영향을 가져오게 한다. 그러나 구원이 인간의 노력이나 선행에 기인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sola gratia)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의 언약을 믿음으로(sola fide) 이루어진다고 주장함으로 로마 가톨릭의 행위의인(行爲義認, work righteousness) 주장에서 탈피한 것은 루터의 공로라 아니할 수 없다.

 

 

("목회와 신학", 1992. 8월호)

[출처] 루터의 노예의지론 ("목회와 신학", 1992. 8월호)|작성자 고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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